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링크 클릭하면 재생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 사역(3)”-속죄의 제사성과 유화성

by 영동장로교회 2021. 9. 19.

2021. 9. 19.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 사역(3)”

-속죄의 제사성과 유화성

 

예수의 우리 죄를 대신하는 그 속죄를 논하는 일은 ‘형벌 대속론’ 또는 ‘만족론’의 진술을 대표하게 될 것이다. 이는 속죄의 성질 묘사가 대속론 또는 만족론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속죄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택하신 죄인들을 살려내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의 자기희생의 사역을 행하심이다.

그러면 이 속죄는 도대체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 첫째가 속죄의 제사성이다.

 

속죄란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 중에서 그의 제사장 사역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제사장 사역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제사의 사역으로 여기서 말하는 속죄 사역이다. 따라서 속죄가 제사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제사의 성격의 한 국면을 속상이라고 하는 것은 속죄의 성격의 한 국면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그 가장 중요한 한 국면이다.

 

구약의 제사들은 기초적으로 속상적이었다. 제사는 죄인들의 죄를 가려주고 신적 진노와 저주를 멈추기 위하여 신적으로 제정된 규례였다. 구약에서 예배자는 제단에 제물을 가져올 때 동물의 희생을 자기 대신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동물에게 자기의 죄책과 그 결과인 사형까지 그 제물되는 짐승에게 전가시켰다.

 

이 제사는 그림자이며 모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상적 상념은 아주 현저하였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제사의 해석에 배경을 제공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이 소와 염소와 양들에게 비교될 바는 아니었지만 구약의 그 제사의례에 의해 제공된 모형의 완전한 표현들로 나타나는 그 ‘속상’이었다. 예수의 그 사역은 구약 제사에서의 그 짐승과 비교할 수 없는 초월한 가치와 효능과 완전성을 가진 속상이었다.

 

하나님께 흠 없이 드려진 큰 제물이 된 그의 속상에는 택하신 죄인들의 모든 죄가 전가되어져 있고 이 전가 때문에 그는 수난하시고 죽으셨다. 그는 단 한 번의 제사로 구원 얻을 모든 자들의 사죄를 완성하셨다.

 

신약 히브리서 9장의 대속죄일 행사들은 구약의 모세가 가르쳐준 제사 의식의 상징적 의미를 기초로 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제사에 대한 초월적 효능, 그 완전성, 최종성을 말하고 있다.

(히 9: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히 9: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히 9: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히 9: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히 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 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약의 레위기에서 소개되고 있는 제사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다. 모세가 가르쳐준 피의 제사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을 정화한 그리스도 예수 자신의 큰 제사의 모형들이었다.

(히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이것은 레위기 제사들에 구성요소가 된 바가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제사에 구성 요소로 되었을 것이라는 명제를 확정함에 이바지 한다. 그래서 만일 레위기의 제사가 속상적이라면 원형적인 그 제사는 완전하게 속상적일 것이며,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며 예비적이고 부분적인 수준의 속상이 아니라 오직 영원적이고 불변적이며 최종적이고 완전한 수준에서 속상적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성경 구절에 드러난 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그리스도 예수의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은 죄 때문에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동시에 또한 제사장 그 자체이셨다는 것이다. 그는 제사장으로서 자신을 드려 제사하였다. 예수가 이 사역을 감당하심으로써 제사장의 사역은 완성되었고 이 땅에서의 그 제사장 사역은 종료되었다. 그래서 예수 이후에는 더 이상 제사장이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제사장으로서의 제사에 대한 완전성과 같은 그의 제사장으로서의 효능으로 또는 그의 제사장의 작용의 수행으로 죄를 속하신다. 그는 과연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셨으며 또한 세상 죄를 제거하시려고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드리신 제사장이셨다. 그 안에 제사장직과 제물의 사역은 놀랍게 연합되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요 1: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리스도 예수는 지금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사장이 아니라 한 번 드리신 제사로부터 생긴 모든 효과와 효능의 영구한 인격적 체현으로서의 제사장이시다. 그는 이러한 제사장으로서 그의 백성을 위한 중재 대언을 계속하신다. 이는 우리가 이 땅에서 기도하는 한 그가 하나님 앞에 중재 대언자로서의 그 일을 계속하심을 의미한다.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계시는 주님의 이 사랑을 어찌 우리는 깨닫지 못하는가!

 

그의 항상 계속하시며 언제나 효과적인 중재는 한 번 드린 그 제사에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은 그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제사는 완성하고 중재 대언은 계속하시는 때문이다.

 

 

 

둘째는 속죄의 유화성이다.

유화란 속죄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는 일이다.

 

영어 성경에서의 Propitiation(유화 = 달램, 화해)이 우리 성경에서는 ‘화목제물’ 또는 ‘속량(구속)’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용어가 사용된 구절들은 예수의 사역을 묘사하고 있는데, 내용상 영어단어의 그 뜻대로 하나님과의 ‘유화’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유화(宥和)로 해석되어질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나는 한역번역이 원래의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 잘못된 번역이라 생각한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히 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구속)하려 하심이라

(요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유화의 관념은 구약의식의 구조에 치밀하게 직조되어 있어 만일 유화가 한 번 드리신 큰 제사에 치밀하게 결합되어 있지 않으면 구약의식을 그리스도 예수의 제사의 모형으로 보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제사와 유화는 가장 밀접한 상호관계에 서 있다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함이다.

 

유화란 ‘가리우는 것’이란 의미이다. 이 가리우는 것과의 관련에서 세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가리우는 것이 죄에 관하여 생기는 일이며, 둘째는 이 가리우는 것의 효과는 깨끗하게 함과 용서함이며, 셋째는 주 앞에서 가리우는 것과 그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레 4:35)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떼낸 것 같이 떼내어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레 10:17) 이 속죄제물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레 16:30)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이 세 가지는, 죄는 주께 관설되는 정세(情勢), 가리우는 것을 필요하게 하는 정세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하나님의 거룩한 불쾌 혹은 진노를 격발하게 한다. 보복은 죄에 향한 하나님의 거룩의 반동이요, 가리우는 것은 죄가 격발한 신적 불쾌를 멈추기 위한 것이다.

 

유화는 하나님의 진노와 불쾌를 예상하게 하고 유화의 목적은 이 불쾌를 없이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화의 교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유화하셨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백성들에게 호의적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 유화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화만 내는 하나님만을 생각하여 하나님을 고약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죄에 대해 화만 내는 고약한 하나님이 아니라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반드시 죄에 대해 분노하셔야만 한다.

 

그러나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죄인된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자신의 독생자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화목을 회복시키시려 하신 것이다. 이 화목을 위해 예수는 자신의 속죄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유화시키신 것이다.

 

이 신적 진노를 가라앉히는 유화의 교리를 향한 반감은 속죄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데 근거한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정죄와 형벌을 결과하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의 형벌을 대신 받아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시므로 죄인들을 정죄와 영원한 벌에서 구출하신 것이 구속이다. 따라서 유화를 부정하는 것은 죄의 형벌의 대리적 견딤이라는 속죄의 성질을 상당히 훼손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대리적 속죄를 부정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