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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의 속죄 사역(4)”-속죄의 화목성과 구속성

by 영동장로교회 2021. 9. 26.

2021. 9. 26.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 사역(4)”

-속죄의 화목성과 구속성

 

하나님의 진노를 잠재운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속죄 사역이었다. 이를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를 통한 ‘유화’라 한다. 성부하나님의 죄를 향한 진노와 성자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을 위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모두 하나님의 가장 중심적 속성인 그의 사랑에 근거한다.

 

어떤 이들은 죄를 향한 성부하나님의 그 진노하심이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한다.

혹자는 하나님의 마음에와 신격의 위들 사이에 내면적 알력이 있음을 추측하는 것이라고 공격하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가?

 

진노하신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만든다는 것과 진노하신 하나님이 또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의미이다. 전자는 하나님을 전혀 오해한 사상이요, 후자는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한 바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진노가 십자가를 통하여 유화된다는 것은 또한 참이다. 전자의 경우는 진노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으로의 전환을 의미하고, 후자는 하나님 그 본질에서 진노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고로 죄에 대해서는 그 진노를 숨기실 수 없으시다. 또한 그는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죄를 범한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감추실 수 없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자하나님의 속죄사역을 정하시고 그리스도 예수로서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게 하셔서 유화를 스스로 이루신 것이다.

 

이 유화는 하나님의 그 진노의 정지를 위한 신적 준비를 배치하고 화목은 주의의 초점에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원(疏遠)과 우리를 그의 총애에 회복하는 방법을 배치한다. 따라서 유화와 화목은 동일선상에 놓여있고 다만 그 선후의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고찰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속죄의 세 번째 성격으로 화목성을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 죄인된 우리사이의 화목을 생각하면 우선 분열된 관계를 예상할 수 있다. 이것은 적의의 소원을 함의한다 할 것이다. 이 소원은 이중적이어서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원과 하나님의 우리로부터의 소원이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그 행위언약을 파기한 그 순간부터 이 소원은 시작이 되었으니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우리로부터의 소원이다. 하나님이 우리로부터 버림을 받은 셈이다.

(창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하나님은 그 사랑이 너무나도 충만하시고 무한하셔서 우리와 사랑의 우교를 나누시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본질이신 그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부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그러나 아담은 그 욕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서기 원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일을 거부하여 그만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그를 위해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다. 이는 그를 여전히 사랑하심이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그 죄를 향한 진노를 발하시어 그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셨다. 이는 아담을 향한 진노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였다. 또한 하나님의 아담을 향한 소원(疏遠)이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우리의 불의들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분리하였고 우리의 죄는 그의 얼굴을 숨겼다.

(사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화목은 우리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적의를 제거하는 일인가?

아니면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하지 못한 적의를 제거하는 일인가?

 

신약의 가르침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화목된다고 가르치고 있고,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 5: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고후 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능동태가 사용된 경우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 자신에게 화목시킨다고 가르치고 있다.

(고후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따라서 화목이란 하나님에 대항하는 우리의 적의를 제거하는 것에 한정되고,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시는 우리를 향한 거룩한 소원을 제거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화목을 하나님 편에서의 행동으로 살피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적의를 사랑으로 전환시키려고 하신 일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화목은 하나님이 우리의 적의를 제거하심이었고, 이 일을 행하시려고 하신 일이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 사역인 것처럼 보인다. 한 마디로 화목은 우리의 적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생각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성경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일이다.

 

하나님에 대항하는 우리의 적의가 화목의 전면에 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우리에게로의 소원하심이 그리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 편에서의 소원은 참으로 우리의 죄로 인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의 이 반동을 격발한 것은 우리의 죄이다. 그러나 화목이 행동으로 관찰되든지 결과로 보여지든지를 물론하고 전면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그 소원(疏遠)이다.

 

그리스도 예수가 행하신 화목의 사역에 직접으로 관설하는 성경구절들에서 화목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주관적 적의의 포기를 뜻하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의 소원을 없이함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화목을 성취하였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의 최고 현현으로 말하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하게 하나님에 향한 사람의 태도에로 끌리지 말고 역사적 사건에서 증거된 하나님의 태도에로 주의를 돌려야 한다. 화목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실 때 단번에 이루어진 것으로 제시되고 있으므로 사람 편에 있는 적의의 제거라고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이란 것은 그 화목하게 하는 일이 법정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에 신적 행동과 심판의 객관적 영역에서 된 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우리의 적의를 제거 혹 포기한다는 관념에 조화되지 않는 표현이 된다.

 

여기서의 이 화목은 우리에게 주어진 값없는 선물로 제시되고 있으니 당연히 우리 편에서 생긴 어떤 주관적인 변화는 결코 아니다. 고후 5:18-21의 교훈의 특징들을 열거하는 것은 롬 5:8-11에서 발견된 바를 확증해주고 있다. 따라서 화목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의 사역인 것이다.

(고후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고후 5: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속죄의 화목은 하나님을 유화시켜 죄인과 화목시키는 객관적 활동을 우선하며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일을 차선으로 한다. 화목되신 하나님은 죄인을 칭의하시고 그 죄인의 마음에 성령으로 공작하시어 그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중지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완전한 속죄의 열매를 취하게 하신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을 죄인에게 화목시키는 사실은 죄인에게 반사적 동작을 일으켜 그가 하나님에게 화목된다고 말할 만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객관적 속죄는 성취된 사실이요 지금은 죄인을 권면하여 이 속죄의 열매를 이용하여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원을 끝내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신된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이 일을 감당하는 그 모습이 복음 전하는 모양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우리에게 있어서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사항이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속죄의 성질 마지막인 네 번째는 구속성이다.

 

구속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위한 사역의 전 과정, 전 내용을 다 가리킨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주 ‘구속의 역사’, ‘구속적 사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경우에 ‘속죄’는 ‘구속의 역사’의 한 점을 점령하고 ‘구속적 사역’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작은 범위의 일이 된다. 또 한편으로는 ‘구속’이 좁은 뜻으로 속죄와 같은 뜻으로 사용된 예도 있다.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히 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위의 성경구절에서 사용된 구속의 관념은 ‘속량’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구속의 용어는 매수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며 더욱 특별히 ‘대속물’ 혹은 ‘속전‘에 의한 속량을 가리킨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딤전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속량은 대가를 내고 해방을 취함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룩하신 구속은 이런 말들로 해석될 수 있다. 예수가 이루려고 세상에 오신 사역은 속량의 사역이요, 그의 생명을 주심은 속가를 보상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구속의 중요한 임무는 속량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속죄의 구속성’은 그것의 ‘속량성’을 의미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구속의 중요한 임무인 속량은 어떤 종류의 속박 혹은 수금(囚禁)을 예상하며, 따라서 구속은 속량이 해제하여야할 관계들에 대면해 있다. ‘구속’이 대면하여 있는 가장 현저한 관계들은 ‘율법’과 ‘죄’이다.

 

성경은 우리가 율법을 통해 구속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율법은 사랑의 두 큰 계명을 대강령으로 포함하였으며,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은 사랑에 의해 성취된다.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따라서 우리가 율법을 지킬 의무로부터 구속된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성도들은 율법의 어떤 관계로부터, 즉 율법의 저주, 의식적 율법, 행위의 율법으로부터는 구속받음이 사실이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 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대한 우리 관계는 이중이니 ‘언약적’이며, ‘도덕적’이다. 복음 아래 있는 우리는 율법에 대한 언약적 관계로부터 구출된다.

 

구속이 대면하여 있는 관계의 두 번째인 ‘죄’의 힘은 율법이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다.

(고전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나 성경은 또한 구속을 죄와 직접관계에 두어 말한다. 이 구속은 죄의 모든 방면들과 모든 결국들로부터의 구속이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계 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구속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완성하여 놓으신 일로 제한된 의미의 구속을 생각할 때에 그의 완성된 구속이 관계를 가지는 죄의 두 큰 방면이 있는데 그것은 ‘죄책’과 ‘그 세력’이다. 이 두 방면에 미치는 완성된 구속의 효과는 칭의와 사죄, 그리고 죄의 노예화하는 오예와 그 세력으로부터의 구출이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오예로부터의 구출)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속은 사단 위에 승리를 의미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 승리의 혜택은 사단의 활동을 인식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승리가 사단의 세력을 파멸하였다는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만 임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단의 세력이 파멸하였다는 신앙을 가졌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