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27.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그는 진실로 메시야, 구원의 주님이셨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로 예정되어있다면 굳이 지금 예수를 믿고 따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세상의 유혹을 따라 세상을 즐기다가 나중에 가서 예수를 믿으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과연 그렇게 해도 되는 일일까?
하나님은 구원하기로 선택한 자들과 간과하기로 한 유기된 자들로 분명히 구별하셨다.
그리고 그 선택하신 자들을 당신의 천국 백성으로 삼으셨다.
통상 사람들의 생각은 그가 경험한 것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사람들은 죄로 오염된 세상 속에 살게 되었고 그곳에서의 삶이 그들의 경험으로 되었다. 그 경험에 따라 그들은 사고하게 되는데, 그들의 경험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오염된, 그래서 갇힌 공간으로 변화된 세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은 이 세상에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생각 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이 땅에 속한 것뿐이다.
이 땅에 속한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욕심내는 행위가 아담의 죄를 물려받은 자에게서는 본능이다.
예수께서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마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이 땅의 것을 욕심내는 자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현재가 중요하다. 그래서 혼인 잔치를 마다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현재 눈에 보이는 그 일이 중요한 법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미래의 금은보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먹을거리나 그것을 살 수 있는 돈이 더 중요한 것이다.
(마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마 22: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들은 천국을 사모하는 그 심령을 가질 수 없다. 천국을 사모하는 것은 죄인된 자로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알게 하시는 능력에 힘입어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 잔치는 바로 천국을 상징한다. 또 왕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상징한다. 잔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자기의 밭일이나 사업을 중시하는 자는 택하심을 입지 못한 유기된 자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존재들이기에 애초부터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잔치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자들이다.
세상을 더 즐기다가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자들은 천국의 그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천국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자들은 선택받지 아니한 자들과 동류이기에 나중에 예수를 믿겠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택하심을 입지 아니한 자라는 고백과 같다.
(마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마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마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주님의 이 비유에서 청함을 받은 자들은 이스라엘 족속들을 상징한다. 그 옛날 하나님은 종이라고 표현된 많은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구원받아 천국의 백성이 되라고 강권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을 사모하기보다는 세상을 더 사랑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종살이 하던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보다는 그 땅에서 더 많은 수확을 바라고 그 세상적인 욕심에 따라 그 땅의 우상인 바알을 섬겼다.
외형상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들의 내면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그 땅의 물질을 더 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청함에는 관심이 없고 그의 밭이나 사업에 더 몰두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 대상들은 청함을 받은 자들에게서 네거리 길에서 만나는 대로의 아무에게 나로 바뀌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 전파의 대상이 이스라엘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바뀌게 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마 22: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되는데, 선택된 자들만이 아니라 선택되지 아니한 자들에게도 전파되어짐을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라고 표현되고 있다. 예복을 입은 것은 임금의 뜻에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그 뜻에 순종함을 드러낸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아니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지식과 행위로 구원받기에 충분하다고 믿는 자들을 상징한다.
(마 22: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이들은 구원받지 못할 자들인 가라지들이요, 염소들이요, 주여주여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마 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마 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마 13: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마 13: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마 13: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 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 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택함을 입었다는 것은 이제 잔치를 맛볼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을 말하는데, 바로 천국의 백성 자격을 얻음이다. 그 조건은 부르심을 받고, 주시는 예복을 입는 것이다. 인간 편에서는 오로지 다 받을 것뿐이다.
선택의 교리의 핵심이 여기에서 나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예수를 알 수 없고 예수께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그가 바깥 어둠에 내어 던져지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은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 마지막 심판의 형벌을 받는 그것을 비유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택정함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택함을 입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적고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인간의 교만이 그토록 크기 때문이다.
자신의 세상에서의 유익을 먼저 누리고 후일에 예수를 믿겠노라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교만한 자들이다. 그들은 구원의 반열에서 제외된 자들일 뿐이다.
세상일을 감당하고 나중에 믿겠노라 하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명령은 단호하다.
선택된 자들은 세상의 지식과 경험에 갇혀진 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의 사고 영역은 선택되지 아니한 자들과는 달라야 한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닐 뿐만 아니라 죄악된 이 세상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 커야 한다.
그래서 비록 세상에서는 큰일이며 소중하게 생각해야할 부친의 장사일지라도 천국까지 확장된 사고 영역에서는 사소한 일이 된다. 죽은 자들이라고 하는 표현은 선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 즉 세상에 속한 자들이기에 그들에게는 이 일이 매우 소중하고 큰일이다.
그러나 선택함을 입은 자들은 천국의 일, 즉 주님을 따르는 그 일이 더 소중한 일이 된다. 이 일은 즉시 행하여야 할 일이다. 미루었다가 나중에 해도 되는 그런 사소한 일이 아니다.
(마 8: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 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성령의 은혜로 이렇게 천국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때로는 세상에 속한 자들보다 더 많은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믿는 자가 이 땅에서 더 많은 고난을 받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죄를 범한 아담에게 하나님은 그 근본되는 땅을 갈게 하셨다. 아담이 먹지 말라 한 그 선악과를 먹었으니 괘심해서 골탕 먹이시려고 그리하셨을까?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다윗은 왕으로 택함을 입었다. 사무엘 선지자가 그에게 하나님의 명령으로 기름을 부었으니 그 땅에서 가장 복된 자가 된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이후의 그의 삶은 도무지 복된 삶이라 할 수 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기도 했고, 원수의 나라인 블레셋 땅에서 원수들 앞에서까지 목숨을 구걸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삶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몸을 피한 가드는 블레셋 땅이다. 이스라엘을 늘 괴롭힌 원수의 땅이 아니던가!
그런 곳으로까지 피신을 가야했던 다윗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차라리 나를 왕으로 세우지 마시지 왜 나를 사울왕을 대신해서 왕으로 세우시고 이 고난을 겪게 하십니까”하고 크게 원망할만하다.
그리고 그 사울왕은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가 아니던가!
그 장인이 자기를 죽이려고 창을 던졌고 그것을 겨우 피해 목숨을 건졌다. 그 이후로는 자신을 죽이려고 직접 찾아다니기까지 한 그 장인이었다. 숨을 곳이 없어 이제는 원수의 땅 블레셋에 피신을 왔고 그 원수의 나라의 왕 앞에서 미치광이 행세를 하여 목숨을 보전한 다윗이었다.
이때의 다윗처럼 그런 삶을 살라하면 장차 왕이 될지라도 그런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까?
(삼상 21: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삼상 21: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삼상 21: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삼상 21: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삼상 21:14)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삼상 21: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그런 세월을 다 보내고 훗날에 다윗은 이런 기록을 남긴다. 하나님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고. 아들이 떡을 달라하고 생선을 달라 할 때 돌을 주며 뱀을 줄 아비가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의 참 아버지시니 우리가 생각지 못한 것을 계획하시고 또 그 계획하신대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리라.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다윗의 시]
(시 37: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시 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 37: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시 37: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마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마 7: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 옛날 욥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동방에서 가장 부유한 자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2)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욥 1: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그런 욥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그 많던 재산을 하루아침에 모두 잃고 만다. 가장 부유한 자가 하루아침에 거지로 전락한 것이다. 설상가장으로 자기의 자식 열 명이 한 순간에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졌다.
그 많던 재산을 모두 잃고 다 장성한 열 명의 자식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이 아픔을 겪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 자들 중에 이 욥만큼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이 또 있을까?
이런 고난을 당하면 과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의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
(욥 1:13)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욥 1:14)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욥 1:15)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욥 1:16)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욥 1:17)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욥 1:18)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욥 1:19)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그 순간에도 욥은 그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에게 경배한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도대체 이 욥만큼 그렇게 큰 불행을 당한 자가 있을 수 있을까?
(욥 1: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욥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 1: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의 불행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몸뚱이 밖에 남지 않은 그 욥에게 지독한 피부병이 발생했다. 얼마나 가려우면 무너진 집의 기와조각으로 밤낮으로 긁고 앉았을까? 과연 그 모습이 아름다웠을까?
가장 불행한 자의 자리에 선 욥에게 그의 아내가 다가와 저주를 퍼붓고 그를 떠나버렸다. 아내조차도 외면해버려 그 땅에서 가장 불행한 자가 되어버린 욥이었다.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짓밟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욥 2:7)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 2: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욥 2:9)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 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은 스스로 고백했다. 이전까지의 자신의 그 믿음은 그저 귀로만 들은 믿음이었다고. 귀로만 들은 믿음이란 온전한 확신에 찬 믿음이 되지 못한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욥의 그런 정도의 믿음이라도 우리의 믿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그런 믿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욥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그런 정도의 믿음의 사람의 자리에 두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 욥이 이런 시련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완전한 믿음의 경지에 이르게 하시려고 그 일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이제 욥이 고백한다. 이전에는 내가 귀로만 들은 믿음이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게 된 완전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노라고.
그 믿음은 하나님을 진실로 기쁘게 하였다. 하나님이 이 믿음을 기뻐하신 것은 드디어 욥이 하나님을 만나 완전한 천국백성이 된 구원받은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죽음을 향해가는 욥이 아니라 새 생명을 얻어 살 자가 된 욥이었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신 것이다.
(욥 42: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제서야 하나님은 그 욥을 다시 회복시켜주셨다. 재산은 곱절로 늘었고 새 가정을 만들어 주셔서 다시 열 명의 자녀들을 얻었다. 이전의 가정의 딸들은 미인이었다고 하는 기록은 없다. 새로 얻은 세 명의 딸들은 그 땅에서 가장 예쁜 미인들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욥 42: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욥 42: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욥 42: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욥 42:15)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욥이 그 시련 중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키워나갔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그 버리신 자들에게도 성령의 역사가 있게 하셨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들의 죄 때문에 성령의 제재를 철수하시고 그들을 그 자신들에게 또는 악의 세력에 내어맡기신다고 한 것은 성령의 일반적 역사가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자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표시함이다.
그런 자들에게도 성령이 모두 그 마음에 공작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리할지라도 그들은 끝내 하나님을 외면하고 죄인된 자로서 자신들의 길을 간다.
(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롬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롬 1: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다.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들이었지만 그들은 끝내 그들의 길을 갔다.
(시 81:11)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시 81:12)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그런 자들, 비록 하나님이 버리신 자들일지라도 그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맛보게 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일시적으로 믿음을 가지다가 필경은 타락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들도 한 때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말하기도 하지만 끝내는 타락한 자들의 자리에 선다.
(히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히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히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선택되지 못한 악인들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릴지라도 그것을 부러워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은 그렇게 하는 그 일이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의 뜻을 깊이 살펴 깨닫게 되는 것은, 믿는 자들에게 고난이 오는 것은 그들이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것보다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여 하늘 백성이 되지 못할 것을 미리 막고자 하심이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 자신을 세상적인 부모나 자식보다 더 사랑해달라는 이기심을 드러낸 말이 아니라, 예수를 통한 구원을 얻어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천국의 백성이 되는 그 일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이다.
우리를 구원하여 천국 백성 만들기를 정말로 간절히 원하고 바라시는 주님의 그 심정을 잘 드러낸 표현이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이렇게까지 표현하셨을까!
(마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주일설교-링크 클릭하면 재생됩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0) | 2021.07.11 |
---|---|
예수의 비하 5계단 (0) | 2021.07.04 |
예수의 인성과 비하 (0) | 2021.06.20 |
예수에 관한 오해와 그에 관한 참된 이해 (0) | 2021.06.13 |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뜻은? (0) | 2021.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