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3.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예수에 관한 오해와 그에 관한 참된 이해”
사람은 선험적 능력을 보유하고는 있다할지라도 통상적으로는 자신이 경험한 바를 바탕으로 하여 사고하고 판단한다. 이러한 경향은 인간의 모든 활동영역에서 공통한 경향을 지닌다.
신앙적 사고 활동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기독교 교리가 발전되어온 역사에서도 이러한 사실들이 관찰되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섭리하심은 인간의 경험이전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알게 하지 않으시면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는 알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뜻하심은 그것을 드러내어 보이기 전에는 인간이 전혀 알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은 인간의 사고의 산물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하여 만들어낸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모세는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애굽에서 왕자로서의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 세상 최고의 학문을 한 자였다. 세상 최고의 그런 지식이 있음에도 그는 하나님에 대해 스스로 안 것이 아니었다. 그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그 어머니로부터 듣고 안 것이었다. 그것도 그 아는 정도에서 완전하지 못했다.
그가 80세에 이르러 하나님을 대면하였을 때, 하나님이 누구시냐고 묻는 바로 그 물음에서 그때까지 그가 하나님을 완전히 알고 있지 않았음을 보게 된다. 그 때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기고 그제서야 비로소 모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이 그 사고함을 통해 만들어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계신 자로서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심으로써 우리에게 알려진 존재가 되셨다.
(출 3: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모든 뜻을 사람이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드러내어 보이신 만큼은 알 수 있는 것으로 되어졌다. 그 드러내심을 우리는 ‘계시’라고 한다. 이 계시가 하나님이 만드신 그 자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일반계시’라 하고, 특별히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 것을 ‘특별계시’라 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것이다.
하나님이 그 하시는 일 모두를 우리에게 알게 하시지는 않으셨다. 특별히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꼭 필요한 것만을 필요한 만큼만 우리에게 알게 하셨는데, 그것이 성경의 기록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알리시려고 하셨다면 그 기록이 단지 한권의 성경정도로 가능했을까?
특별계시인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려는 그 일에 관한 것만을 기록하게 하셨다. 예수의 행하신 그 많은 일 중에서도 우리의 구원과 관계되는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것만을 선택해서 성경으로 기록되게 하셨다.
(요 21: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성경의 핵심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것이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고 향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그 뜻이 기록된 것이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을 역사책으로 보거나(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열왕기서와 같은 역사서들이다.), 인간의 윤리적이거나 철학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책으로 보거나, 창세기의 그 이야기를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려고 하는 그런 시도는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하셨다. 그 일을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일을 위해 창조한 그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이 하나님 당신의 뜻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신 것이 성경이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신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는 그 일을 통해 당신이 영광받기를 원하신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신 그 인간이 비록 하나님을 배반하는 그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래서 죽을 운명에 빠진 그들을 건져내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매다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이 일을 직접 담당하신 이는 성자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다. 즉, 한 본체에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이 삼위로 계신다는 말이다. 이 말은 한 본체에 세 가지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분 하나님으로 계신다. 오직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세 인격, 즉 삼위로 계실 수밖에 없으신 것이다.
영원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할 것을 아시기에 죄인인 우리를 살리시려고 작정하시고 그 일을 준비하신 것이다. 이는 주로 성부하나님이 하실 일이었다. 우리를 대신하여 제물이 될 그 준비를 친히 감당하신 자는 성자하나님이셨다. 이 일을 위해 성부하나님은 영원에서 성자하나님을 있게 하셨다. 이를 성자하나님의 ‘발생’이라 하고, 성경에서는 ‘낳으심’의 뜻이 함의된 ‘독생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죄인된 자를 그 죄에서 건져내는 그 구속은 성자하나님의 하실 일이고, 그 이후에 견인하는 그 일은 성령하나님의 하실 일이었다. 이렇게 그 사역하심에서의 구별이 분명하여 한 위가 그 모든 사역을 감당할 수는 없고, 또 그렇게 되는 그것은 모순이 된다.
그러나 그 사역하심에 있어서는 ‘구별’이지 ‘구분’은 아니었다. 만약에 구분되었다면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은 그 사역하심에서 서로 도우실 수도 없고 간섭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역하심에서 서로 도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이 사실이 성경에서는 “우리가... 만들자”라고 표현되고 있다.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성부하나님은 계획하시고 그 계획은 성자하나님을 통해 실현되었다.
창조의 모든 계획이 성부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그것은 성자하나님을 통해 실현되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당신이 지은 것 중에 가장 소중하고 귀한 존재는 바로 우리들이었다. 그런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존재였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런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우리는 그를 ‘예수’라고 부른다.
통상 사람들은 그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대로 인식하고 또 판단한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인간인 예수만 생각한다. 그래서 그러한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것을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말하고 있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 예수의 본질, 그의 사역을 바르게 이해함이 없이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고 더더욱 하나님의 뜻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역하심에서 분명하게 인격적 구별을 가지고 계신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그에게 죽음을 선고하신 자는 성부하나님이시다. 그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셔야 할 그 성부하나님이 만약 그 죄인에게 “내가 너의 죄를 사하여 줄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는 공의롭지 못한 자가 되고 만다. 공의롭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되시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 도덕적 속성상 반드시 공의로우셔야만 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지만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죄의 책임을 물으시는 인격으로서 성부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에게 그 죄에 대한 사죄를 선포하실 또 다른 인격이 별도로 계셔야만 할 것이다. 그 인격적 존재가 바로 성자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부하나님의 위가 존재함과 동시에 성자하나님의 위가 존재하여야만 한다.
성자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과연 오신 성자하나님이신 예수께서 그 땅에서 죄사함을 베푸시는 장면이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그는 죄를 사하는 권세를 베푸셨으니 분명 그는 성자하나님이시다.
(마 9: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마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마 9: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마 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마 9: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마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마 26: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눅 7: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 7: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이전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제사를 통해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그 방법을 알려주셨고 그들이 죄인의 자리에서 구출되게 하셨다. 이는 하나님 앞에 죄인된 우리가 예수를 통해 구속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에 대한 예표였다.
구약의 그 제사는 인간이 스스로 고안해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모세에게 알려주신 방법이었다. 따라서 죄인의 구속에 관한 그 비밀한 원리는 인간의 지혜로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다.
(레 4: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 4: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레 4:13)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레 4:14)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레 4:15)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레 4:17) 그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레 4:20) 그 송아지를 속제죄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라
(레 4:22) 만일 족장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레 4:23)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수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레 4:24) 그 수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을지니 이는 속죄제라
(레 4:25) 제사장은 그 속죄 희생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레 4:26) 그 모든 기름은 화목제 희생의 기름 같이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레 4:27) 만일 평민의 하나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레 4:28)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와서 그 범한 죄를 인하여 그것을 예물로 삼아
(레 4:31)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희생의 기름을 취한 것 같이 취하여 단 위에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레 4:32) 그가 만일 어린 양을 속죄 제물로 가져 오려거든 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레 4:35)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취한 것 같이 취하여 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의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알려주신 이 제사의 특징은 희생의 제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대신 담당할 제물이 있어야 하고, 그 제물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 앞에 그 죄가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이 원리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이 방법과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할 제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이 제물은 특히 아무 흠이 없을 것이 요구되고 있다.
(레 5:18) 그는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가 부지중에 범죄한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죄 있는 자가 죄를 지은 자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른다는 것은 공의로운 일이 될 수 없다. 죄가 없는 자만이 죄인을 대신하여 그 값을 치를 수가 있다. 인간은 모두 예외 없이 죄인이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따라서 인간들 중에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이 될 수 있는 자가 있을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당신의 아들이신 성자하나님의 동정녀 탄생을 준비하셨다. 즉 성자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그래서 우리를 위한 희생의 제물이 되시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대속물이 될 대상은 반드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신의 신분 상태로 대속물이 되는 것은 불가하다. 사람이 죄를 지었기에 사람으로 그 값을 치루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대속물은 반드시 사람이어야 하기에 성자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만 한다. 그리고 그 육신은 반드시 죄가 없어야 한다. 그래서 동정녀인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다. 동정녀 탄생은 절대적인 필요조건이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여자의 후손”이라고 이미 창세기에 예언되고 있다.
(창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는 분명히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지닌 성자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우리를 대신할 제물이 되셔야하므로 완전한 사람의 몸을 입으신 존재이셨다. 그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셨다. 이는 성자하나님이 인성을 취하신 것이다. 완전한 하나님의 속성을 지니신 성자하나님이 인성을 또 하나의 속성으로 취하심이셨다. 그가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아는 일에 한계가 있는 뜻한 모습을 드러내신 그 때는 인간인 예수로서의 모습이실 때였다.
(마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또한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때는 인간인 예수로서의 죽음이었으니 그가 온전한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그가 만약 그 완전한 고통을 당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우리를 대신할 제물, 즉 우리의 대속물이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그 순간 완전한 신성으로 그 일을 행하셨다면 즉, 하나님이시라면 그런 고통을 느끼실 리가 없으셨을 것이다. 그 순간에는 그의 신성이 전혀 드러나서는 안되는 순간이었다, 온전히 그의 인성이 그 고통을 감당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당하신 그 수난의 순간이 지나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이후로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 예수에 관해 고찰하기를 쉼 없이 행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직접 대면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유대인들 중에 점차 예수를 믿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유일신주의에 강하게 몰입되어 있었다. 하나님 한분이라는 생각만이 그들을 강하게 지배했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있기 불가했다. 그들에게서의 삼위 하나님이란 개념은 하나님을 세 분으로 생각하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개념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그룹이 ‘에비온파’이다. 그들은 유일신주의의 연고로 그리스도 예수의 신성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가 신성을 지닌 하나님이라면 하나님 유일사상이 무너지는 꼴이 되고 만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삼위 하나님의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 사역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지 못한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예수가 아브라함 이전에 존재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부정했다. 단지 사람인 예수로만 보았을 뿐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요 8: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그들은 예수를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만 생각했고 그가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메시아의 자격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성령은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떠나가셨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죄를 사하실 성자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전적으로 부족했던 것이다. 유일신 주의에 집착한 인간적인 논리적 사고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생각한 예수는 전혀 메시야가 되지 못한다.
2,3세기의 미소한 한 종파인 ‘알로기파’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예수는 단지 한 인간일 뿐이라고 했다. 비록 예수가 동정녀 탄생의 이적적 탄생을 이룬 자일지라도 그가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가 강림하여 초자연적 능력을 부여했다고 믿었다.
그런 예수라면 죄 사할 권세를 독자적으로 가질 수 있었을까?
그런 예수라면 죄를 사하는 그 순간 내가 죄를 사하노라고 하는 대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를 사한다고 했어야만 했다. 그렇더라도 그런 예수는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신 것이다. 사모소타의 바울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무리가 등장했다.
인간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예수를 이해하려고 한 무리들이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물질은 고유적으로 악하다고 보았다. 그들의 이 추상적 논리의 결과로 그리스도는 순결하시니 그의 인적 실체는 환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예수가 그러하다면 그 예수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지고 죽어주실 수 있는 대속물이 되실 수 없고 그는 우리의 메시야가 되실 수 없다. 그런 예수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실 그 일에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러한 주장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 알렉산드리아 사람이며 필로의 제자인 게린더스(A.D. 85년)였다.
영지주의자들 역시 물질은 고유적으로 악하다고 보았으므로 하나님이 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함의하는 성육신의 관념을 배척하였다. 역사적 그리스도는 사람뿐이었으나 모든 영체들 중에 가장 훌륭한 하늘의 그리스도에게 점령되셨고, 하늘의 그리스도는 사람 예수에게 동작하였으나 예수는 세례 받으실 때 그에게 강림하셨다가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하늘로 돌아가시고 사람 예수만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대다수는 그리스도를 성부와 동체인 영으로 보았다. 그들은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해 지극한 몰이해를 한 자들이었다.
‘사벨리안파’는 삼위를 단일신의 3양태로 보았다. 이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지극한 몰이해에서 하나님의 단일성을 보전하려고 예수의 인성을 아예 부인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의 구별이 없는 한 하나님의 형상 혹은 현현으로만 보았다. 이들은 삼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325년에 정죄를 당한 아리우스는 예수의 신성을 완전히 부정했다.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아리안파’라고 한다. 이들의 그릇된 견해는 그리스도의 비하 상태의 성경적 보도를 오해함과 지상의 일시적 종속을 본래적 영구적 불평등으로 오인함에서 기원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비하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깨달음이 부족하였고 그 부족함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깊은 이해를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 얻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오리게네는 본체에서의 종속을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이시나 그 자신에서 하나님은 아니시며 그는 시간 안에서 발생되지 않으셨으나 영원에서 발생되셨다고 했다. 하나님의 계시에 따른 그 가르침의 의존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경험적 또는 지식적 사고에 기초한 인식에 의존함으로써 잘못에 인도된 결과이다.
이 외에도 많은 잘못된 주장들이 있어 왔는데 그 주장들의 근원을 살펴보면 모두가 성경의 이 특별계시에 의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보다는 인생경험에 바탕을 둔 사람중심의 사고의 산물뿐이었다.
하나님 편에서의 이해보다는 사람 편에서의 이해를 중시하고 인간 경험에 기초를 두려고 하는 잘못된 신앙관이 빗은 결과물들이었다.
바른 신앙이란 특별계시인 성경을 중심으로 한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그 지식에 기반 한 ‘확신’과 ‘찬동’을 하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 없이 무조건적으로 믿는 믿음은 광신으로 발전할 수 있다. 신앙은 건전한 이성에 따라 성경을 바르게 지식함으로써 바르게 자랄 수 있다.
부디 당부하노니, 인적 사고에 따른 예수에 관한 이해를 추구하거나 성경적 지식에 기반을 두지 않는 맹목적인 믿음을 쫒지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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