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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by 영동장로교회 2021. 3. 21.

2021. 3. 21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구원이 무엇인가?

 

죄인된 우리를 최종적으로는 완전한 의인되게 하셔서 하나님 당신과 함께 하는 그곳, 천국의 백성된 자리에 세우시고 당신의 아들 삼으시는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은 두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는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내 마음에 믿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이 두 가지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천국 백성되는 절대 자격인 ‘의인’되는 그 일이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이 일은 또한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게 됨을 특징으로 한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9단계가 있는데, 이 두 가지는 ‘신앙’에 해당되는 그 단계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

 

‘소명’이나 ‘중생’과 같은 것은 우리의 행함이 전혀 배제된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이 ‘신앙’은 우리의 행함이 크게 드러나는 영역이다. ‘성화’의 경우에도 우리의 행함이 드러난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구원을 얻는 그 일에 이 ‘성화’를 언급하지 않고 ‘신앙’만 언급한 것은 ‘성화’를 ‘소명’이나 ‘중생’과 같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볼뿐만 아니라 ‘성화’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그 ‘행함’도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로 본 것이다. 결코 우리의 노력이 공로가 될 수 없다는 철저한 사상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신앙’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그 행함은 우리의 공로라고 내세우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것이니 우리의 구원 얻는 그 모든 단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 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앙’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고백이 행해져야한다는 것이 바울의 믿음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감당할 내용에 해당되는 이 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서정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그 서정은 9단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그 시작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부르심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부르시는 그것을 ‘소명’이라 한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그 중에서 특별히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것을 내면적 소명, 또는 유효적 소명이라 한다. 구원하여 살리시려고 죄인들 중에서 특별히 우리를 구분하여 부르시는 이 사랑의 부르심인 이 내면적 소명을 ‘내소’라고 칭하는 것이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 부르심에 어떤 조건이 있었을까?

우리가 의로운 일을 행하였기 때문도 아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공로를 세웠기 때문도 아니다. 오직 그의 기쁘신 뜻에 따라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이니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을까!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어떤 오류가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기에 그 하시는 일에 오류가 있을 수 없고, 그 오류가 있어 하게 될 후회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이 후회하심으로 취소되는 그런 일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구원의 반열에 서게 하신 고로 우리의 구원이 거절되거나 취소되어 구원에서 멀어지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구원이 보장되었으니 이후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구원의 은혜를 입었으니 그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항상 어떻게 하면 그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믿는 자로서의 마땅한 삶이다.

(롬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정한 자들을 부르시면 그들은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하는 자의 자리에 선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벧전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이 ‘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죄인된 인간은 이미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므로 아무런 영적활동 능력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죽은 자가 자신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것은 그래서 잘못된 생각이라 할 것이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코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다시 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 일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그 중에서도 성령 하나님에 의한 재창조 사역이라 할 것이다. 이 중생에는 ‘발생’과 ‘출생’의 두 가지 요소가 존재한다.

 

이미 타락하여 전혀 쓸모가 없게 된 영혼에 하나님이 새 생명의 원소를 심어 들이는 그것을 ‘발생’이라 하고, 이 원소가 발아하여 드러나는 것을 ‘출생’이라 한다. 이는 영적 새 생명을 심어들임과 주관적 성향의 근본적 변화를 말한다. 이 변화는 그 사람의 지력과 감성과 의지에 변화를 가져온다. 이 ‘지력’과 ‘감성’과 ‘의지’는 이후에 따라올 ‘신앙’의 주된 요소가 되어 진다.

 

지력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제시하는 관련 성구는 다음과 같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후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엡 1: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감성에 변화를 가져옴을 말한 성구는 다음과 같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의지의 변화를 말한 성구는 다음과 같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살후 3: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히 13: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중생’은 태어남을 결과함이니 그 태어난 순간의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된 모습의 드러남은 한 순간의 일이다. 따라서 ‘중생’은 그 사람의 세상 생활 속에서 점진적 변화를 이루어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변화라는 특징을 가질 것이다.

 

이 중생의 결과로 영혼은 새롭게 거듭나게 되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된다. 이 순간에 자신의 중생되기 전의 모습에 대해 인식하게 될 것이고, 이 인식의 결과로 그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던 자신의 그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일을 당연히 하게 될 것이다. 이 단계를 ‘회심’이라고 한다. ‘회심’은 죄인이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 돌아가는 의식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예수를 만난 삭개오의 행동은 죄인의 회심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눅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눅 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눅 19: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사도 바울은 회심한 후에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회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도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하지 못했다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지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지했더라도 사죄를 요청할 마음의 문을 성령 하나님이 열어주지 않았다면 그가 자신의 입으로 그 죄를 고백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입으로 고백한 것은 자신이 한 일이지만 그렇게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신 이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 공로는 하나님께로 돌려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도 그렇게 고백한 그 사람의 공로로 인정해 주신다. 그 고백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한다. 이 ‘신앙’은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영혼의 운동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심적으로 신뢰한다.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신앙’은 ‘지식’과 ‘찬동’과 ‘신뢰’를 그 주요 요소로 갖는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 계획에 대해 바르게 아는 것과 그 사실에 대한 찬동과 그것의 이루어짐에 대한 신뢰를 갖는 것이 바른 신앙일 것이다. 신앙의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신뢰하는 신앙이 이룬 결과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신앙’을 담보로 하여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칭의’라고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하여 죄인에 관한 모든 율법적 요구가 만족된 것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적 행위이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이 칭의하심에 따라 오는 것이 ‘수양’이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를 당신의 아들로 삼아주시는 일이다. 당신의 아들로 삼아주셨으니 천국이 그의 기업이 될 것은 정해진 일이다. 그런데 천국은 의인만이 갈 수 있는 곳이기에 하나님은 그 아들 된 죄인을 진실로 의로운 자가 되게 하셔야만 한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의인되게 하는 훈련을 이 땅에서 시키신다. 이 훈련과정을 ‘성화’라고 한다. 이는 칭의된 죄인을 죄의 오염에서 건지셔서 그의 전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닮아 가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시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회심’은 단번적인 변화인 반면에 ‘성화’는 점진적 변화라는 특징을 갖는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이를 때까지 우리를 온전히 인도하시는데 이를 ‘성도의 견인’이라고 한다. 성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자는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것을 보장하며 완성하시는 이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딤후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가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영화‘단계에 이르게 된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땅을 사는 날 동안 우리가 감당할 그 ’성화‘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로 이루어져가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결코 완전한 의인의 자리에 나아가지는 못한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한 의인이 되는 것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이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천국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완전한 의인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흠 있는 자는 결코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없다. 티끌만큼의 죄의 흔적이 있는 상태로는 결코 천국 백성이 될 수 없다.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곳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의의 원천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죄 있는 자와 함께 하실 수 없으시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아들 삼으시고 천국의 백성으로 맞아주시는 그 순간이 우리의 죽음의 순간이니, 그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씻기시고 의의 흰옷을 입혀주시는 것이다. 이 사랑의 은혜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이 ‘구원의 서정’은 구성된다. 바울은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바울이 말한 믿음의 고백인 ‘신앙’은 단지 입으로만 앵무새가 말하듯 그렇게 형식적으로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참된 고백, 그 진실한 고백으로 이루어지는 ‘신앙고백’을 말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