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4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삶 그리고 죽음”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아마 유사 이래로 철학자들의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삶이란 무엇인가”일 것이다. 믿는 우리에게서 이 ‘삶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함이 없이는 바른 신앙생활도 가능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것에 대한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우리의 삶의 시작을 성경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입은 사람인 우리의 삶의 시작은 참으로 영광스러웠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입었으니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의 본질이셨으니 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입은 우리는 사랑이 충만한 존재였을 것이다.
이런 우리의 삶은 진실로 복된 삶이었음에 분명하다. 성경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기록함으로써 그 삶이 진정으로 복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땅의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으로 다스리는 자리에 있었으니 참으로 그 삶은 보람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셨다. 이 사실을 성경은 “모든 채소와 모든 나무”라는 표현으로 기술하고 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이 삶이 어찌 복되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 복된 삶의 시작과 함께 하나님은 그 사람 아담과 한 가지 약속을 정하셨다. 그 사람 아담에게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시되 다만 한 가지, 동산의 중앙에 있는 선악과의 열매는 먹지 말라하신 것이다.
이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시고 먹지 말라 하심은 아담으로 하여금 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려하심이었다. 아담의 이 순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귀한 믿음의 삶이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아담이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신 것이다. 여기서 그 아담은 바로 나를 상징하는 자였다.
그 일은 아담으로 하여금 신앙적으로 성숙해져 가게 하는 일이 되는 결과를 이루게 할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지켜보심으로 기쁨을 얻으실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아기가 자라가는 그 일이 그 부모에게 기쁨이 되는 그것과 유사한 것이다.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완전한 복으로 채워진 이 삶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대 사변이 발생한다.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 변화된 삶의 모습이 현재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모습이다.
애초의 그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그 순간의 이야기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들은 하나님이 금하신 그 열매를 탐하는 욕심을 드러내었다. 부족할 것이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탐할 것이 하나도 없는 그들이 탐하지 말아야할 그것에 대해 선을 넘어버렸다. 넘보지 말아야 할 자리, 자신들을 있게 만드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셔서 그들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자리를 넘본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는 말은 그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들이 서겠다는, 즉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는 의미이다. 가지지 말아야 될 욕심이었다. 넘지 말아야 될 이 선을 넘는 일은 곧 죄가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죄는 부끄러운 것이니 그들은 그 부끄러움을 인지했다. 이것을 성경은 그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은 그들에게 판결하셨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판결은 그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그렇게 복된 자의 자리에서 죄인된 삶의 자리로 떨어져버렸다. 그렇지만 그래도 이 삶은 완전한 절망적인 삶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하나님이 정하신 법은 그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그 열매를 먹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당장 죽음에 떨어지게 하실 수도 있었다. 만약 그리하셨다면 우리 인간은 완전히 불행한 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영원히 죽음에 처해지는 자를 어찌 불행한 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를 그 영영한 불행자의 자리에 세우시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참된 회개를 통해 다시 그 복된 자의 자리에 돌아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다.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시간을 허락해주신 것,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그 삶이 된 것이다.
(겔 18:30)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니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마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눅 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행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이 땅에서의 삶이라 할지라도 해산의 고통과 같은 그 끔찍한 고통들이 가득하고, 땀을 흘리는 힘든 수고를 통해서만 겨우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그 삶이 진정으로 복된 삶이라 할 수 있을까?
땅은 저주를 받았으니 그 소산의 수확이 풍성할리는 만무하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기아와 기근이 무성한 이 땅이 과연 복되다 할 것인가? 그리고 ‘복수’라는 의미의 꽃말을 가진 것이 엉겅퀴인데, 오죽하면 그 땅에 그 엉겅퀴가 무성할까?
이 땅의 많은 이들이 이 불행으로부터 해방된 삶을 이루려고 발버둥 친다. 그러나 이 불행이 어디서부터 생겨난 것인지에 대한 그 근본적 원인을 알지 못한 채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허사이다. 성경은 이 삶의 그 불행에 대한 근원이 바로 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땅을 사는 이유는 이 죄에 대한 철저한 용서, 즉 참된 회개를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이어져가는 이곳은 참된 회개를 이룰 수 있는 기회의 시간으로 허락된 ‘시간의 공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있다. 따라서 이 땅의 삶이 불행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영원한 사망에 이르는 것과 같은 철저한 불행을 전제로 하는 그런 삶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비록 불행하기는 하나 희망 있는 고난을 감내해야 하는 그런 삶이다. 소망 있는 불행, 이것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의 특징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용서를 구하는 그 일, 즉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그런 회개를 이루는 삶, 그것이 선택받은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그 길을 열어주시려고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니 그가 ‘예수’이시다. 그래서 그는 ‘메시아’이시고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있어서 성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되신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 앞에 합당한 회개를 이룬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이란 애초에 하나님이 선고하신 “죽으리라”한 그 죽음과는 다른 죽음이 된다.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서의 죽음이란 “죽으리라”하신 그 죽음대로 영원한 사망에 이르는 문이 된다. 즉 지옥인 ‘불못’으로 들어가는 문이 그들에게서는 죽음이다.
(계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서의 죽음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복을 누리는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예쁜 나비를 보고 즐거워한다. 누구라도 그 예쁜 나비를 보고 싫어할까? 그렇지만 그 예쁜 나비도 애벌레의 시기를 거친다. 그때의 그 애벌레를 예쁘다고 할까?
아이들도 그 애벌레의 흉측한 모습에 기급을 한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모습은 그 애벌레를 닮았다. 죄를 덮어쓰고 있고, 그래서 고통과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으니 누구라도 그 흉측한 모습에 기겁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애벌레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고치로 변한다. 흡사 죽은 것과 같다. 이 고치의 시간을 거치고 때가 되면 그곳에서 예쁜 나비가 태어난다. 믿는 우리에게서의 죽음은 바로 이 고치가 되는 그 순간에 해당한다. 비록 무덤에 머물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가 되면 고치에서 아름다운 나비가 나오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죄의 허물이 벗겨지고 애초에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회복된 의인의 모습을 한 우리로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이렇게 태어나는 그 순간을 우리는 ‘부활의 순간’이라 한다. 그 때는 하나님의 은혜로 아름다운 나비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참된 행복, 복된 삶이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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