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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15.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아!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여!”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농업을 시작할 때, 그가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했다. 이는 포도농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왜 포도농사를 시작했을까?
당장 먹을 것이 필요했을 터인데 어찌해서 쌀이나 밀농사를 놔두고 포도나무를 심은 것일까?
물론 노아가 양식을 위해 밀이나 쌀 같은 먹을거리도 경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것에 대한 기록을 외면하고 포도농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경은 우리를 살리시려는 구원의 비밀을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 이것에 벗어나는 이야기를 구태여 지면을 할애해서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구원에 관한 기록만 하여도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양인데, 그런 자잘한 것까지 기록했다면 이 성경책은 도저히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양이 되고 말았을 것이며 그런 책은 성경이 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창 9: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나무를 심었더니
주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로, 그리고 우리는 그 가지로 비유하셨다. 여기에 그 답이 있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바로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내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방주를 통해 구원함을 입었으니 이제 구원의 은혜를 입은 그가 장차 오실 주님과 동행하는 그 삶을 사는 것은 그로서 당연한 삶의 의무였다. 그런 삶을 통해 그는 많은 성화의 과실을 맺어갔다는 것을 포도나무농사가 번창한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포도나무가 많은 열매를 맺었으니 그가 많은 포도주를 생산한 것이리라.
(요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 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요 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 포도주를 마시고 노아가 취했다. 적당히 마신 것이 아니라 흠뻑 마신 것이다. 이것은 그가 구원의 그 은혜에 온전히 참여한 것을 상징한다. 그는 온전히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 구원의 은혜에 온전히 동참한 자였다. 그는 그 구원의 은혜에 감사함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산 것이다. 이는 구원받은 백성들이 온전히 본 받아야 하는 그런 삶이었다. 그는 더 이상 죄의 부끄러움에 갇혀 살 자가 아니었다.
그의 장막은 온전한 교회의 상징이었고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누리는 온전한 죄에서 자유한 자였다. 그것을 성경은 그가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죄에서 벗어난 우리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창 9: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본 것은 그가 스스로 죄를 부정함이었다. 그는 스스로 의롭다 여겼기에 아비의 그 하체가 부정하게 보였던 것이다.
(창 9: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창 9: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셈과 야벳은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옷을 취하여 덮은 것은 스스로가 죄인임을 고백한 일이었다. 자신들이 죄인이라 여기는 마음이 가득했기에 자신들의 그 하체는 부끄러운 것이 되었다. 자신들의 그 하체가 부끄러운 것이니 당연히 그 아비의 하체도 그들에게는 부끄러운 것으로 다가 왔을 것이다.
그러하므로 그들은 그 아비의 부끄러울 것 같은 그 하체를 보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옷으로 덮어 가리운 것이다. 그러나 그 아비의 하체는 더 이상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포도주를 마시고 잠든 몸의 하체라는 것은 온전히 거룩하여진 것을 상징한다.
포도주란 바로 주님의 보혈을 의미하니 그 포도주를 마신 것은 주님의 그 피로 우리의 죄가 씻겨짐을 상징하는 일이었고 그 포도주를 마시고 잠든 것은 주님의 그 의롭다고 칭하신 그 은혜에 온전히 취하여짐을 상징한다.
온전히 의롭다함을 입은 그 노아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었다. 그 때의 그 노아의 하체는 죄로 인한 그 드러움을 나다내는 그 무엇이 더 이상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을 더럽다고 여기는 것은 하체는 더럽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체를 부끄러운 것이라 여기고 조롱한 그 함은 부끄러운 하체를 가진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하체, 즉 자신은 스스로 의로운 자라고 여겼고 그러하기에 이미 깨끗케 되어진 그 아비의 하체를 조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반대였다. 아비의 하체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조롱 받을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하여진 참으로 거룩한 것이 되었고 깨끗하다고 자부한 자신의 하체는 가장 부끄러운 그것이었다.
셈과 야벳은 스스로 죄인이라 여겼기에 어쩌면 자신들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아비의 하체도 부끄러운 것이니 그 부끄러움을 가려주려고 자신들의 옷으로 가려준 것이다. 그 옷을 덮어줄 때 그들이 뒷걸음쳐 들어간 것은 그 부끄러움을 보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는 더 이상 죄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믿음의 백성의 모습이요, 죄인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주님의 그 심성을 닮아 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심성을 갖게 된 것은 죄인된 자를 칭의하신 하나님이 칭의된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이었다.
그들의 옷으로 아비의 하체를 가린 것은 짐승의 가죽 옷으로 아담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신 하나님의 그 행동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이는 제자들이 주님의 그 모습을 닮아 그 땅에서 사랑을 실천할 때의 그 모습을 상징처럼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이 사랑의 행위를 하나님이 직접 셈과 야벳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한 함은 그 아비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었고, 스스로 죄인이라 고백하고 주님의 그 모습처럼 사랑을 베푼 셈과 야벳에게는 노아가 복을 빌어주었다. 이는 칭의받은 자를 반드시 구원하시는 복을 허락하실 것과 죄인들에 대한 심판하실 것에 대한 예표였다.
(창 9: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창 9: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창 9: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창 9: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과연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함과 같은 자의 자리에 설 것인가 아니면 셈과 야벳가 같은 자리에 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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