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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29.
“나사렛 예수”
예수께서 태어나신 곳은 유대 베들레헴이었다. 그의 부친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호적을 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갔다가 마리아가 그곳에서 예수를 낳았다.
(눅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후에 부친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눅 2: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눅 2:37)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눅 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 2:39)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에 있는 한 촌이다. 반면에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 지역에 속한 동네이다.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의 중심이었고 따라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거주하는 곳이어서 갈릴리 촌 동네와는 비교되지 않는 세련된 도시였다. 갈릴리는 예루살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시골이었고 그래서 무시를 당하는 땅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촌구석에서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행하셨다. 세련된 예루살렘을 놔두고 왜 그 촌구석에서 사역을 하셨을까?
세례 요한이 잡히는 사건이 있은 후에 주님은 갈릴리의 또 다른 지역인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비로소 사역을 시작하셨다. 이는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바가 있었다. 드디어 버림받은 갈릴리에 새 생명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가장 죄 많은 동네, 진실로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 그곳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주어짐을 보이신 것이다.
이 스불론과 납달리는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 앗수르에게 가장 먼저 정복당하는 아픈 역사를 지닌 땅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런 저들에게 위로를 베푸셨다.
(사 9:1)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 진실로 죄인임을 회개하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임한다는 것을 주님 스스로 그 사역하심을 통해 몸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마 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마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위대한 치유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자신들의 죄를 드러내어 고백한 갈릴리 그 땅에 주님은 그 일을 시작하셨다.
(마 4:23, 개역)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참으로 엄청난 한 사건이 벌어지고 그 일은 주님께 전해졌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그 현장에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을 죽여 그 피가 제물에게까지 묻혀지는 참으로 이스라엘로서는 용서 못할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러나 민족적인 감정보다는 주님은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이야기하셨다.
(눅 13: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눅 13: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주님의 이 말씀 속에는 이미 갈릴리 사람들 스스로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모두가 갈릴리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하는 사상이 일반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갈릴리 사람들이기에 주님은 그곳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이다. 반면에 예루살렘 그곳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못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그 날에 소경이 눈을 뜬 사건에 대한 예루살렘에 있던 바리새인들의 태도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요 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 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요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 9:13)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요 9: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요 9: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요 9:16)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요 9:17)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 대
그들은 이미 예수를 죄인이라고 하고 하나같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한 상태였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한 저들이었다.
(요 9: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요 9: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요 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요 9: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요 9:24)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바리새인들은 소경의 눈을 열게 하신 그 예수를 욕하며 자신들은 오직 모세의 제자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자신들이 알거니와 예수는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하는 아집에 사로잡혀 있었다.
(요 9: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요 9:26)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요 9: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요 9:28)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요 9: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러나 눈을 뜬 소경은 진실을 사실대로 분명히 보고 이렇게,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라고 말했다.
(요 9: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요 9: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요 9:32)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요 9: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갈릴리 사람들이 대체로 그러했다.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야가 필요함에 대해 긍정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주님의 제자들이었다. 열두 제자를 구분하여 보면 어부 출신이 4명, 농부 출신이 2명, 그리고 도마는 배를 만드는 기술자였다. 셀롯이라는 시몬은 열심당 출신이고 그와 친했던 야고보의 아들 유다 즉 다대오와 가룟 유다 역시 열심당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그 부친의 이름이 마태의 부친과 같다. 세리 출신의 마태나 작은 야고보는 제자들 명단에서 항상 하위에 기록되는 소외된 계층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모두 위로가 필요한 소외된 족속들이었다. 그런 그들이기에 그들의 생각은 대체로 열려져 있었고,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신 그 사역들을 보고 주님이 분명 그리스도이심을 믿었다. 베드로의 그 고백은 갈릴리 사람들을 대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눅 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눅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 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눅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눅 5: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눅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눅 5: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이 소경의 진실된 진술에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신앙적 오만을 그대로 표출했다. 모세의 율법, 즉 “성경 말씀에 정통한 우리를 말씀에 무식한 네가 가르치려고 드느냐”고 소리쳤다.
(요 9:34)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갈릴리 사람들인 주님의 제자들은 유식한 예루살렘의 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대체로 무식한 시골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고 멸시당하는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리고 아는 것이 없으니 가르침을 거부할 무엇도 없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산상수훈을 베푸셨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가르치셨다. 왜냐하면 그런 자라야 복음을 수용할 수 있고 끝내는 천국에 이르는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유식한 예루살렘의 그들은 일일이 자신들의 주장을 옳다하고 주님의 그 가르침을 거부했다.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었다. 그 결과로 심지어 구원의 주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조롱하며 낮추어 부르면서 그의 가르침을 거부했다. 참람하게도 주님을 율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자라며 조롱했다. 그러나 그는 그 율법을 주신 바로 그 하나님이셨다.
(요 7: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요 7: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요 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요 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요 7:52)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마 26: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마 26: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요 18:3)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요 18: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요 18: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요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나사렛’이란 촌놈이란 의미이다. 그 시골 촌놈이 무엇을 알까, 그가 모세의 가르침을 이해나 했을까 하는 정도로 업신여긴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바닷가 사람이니 다소 거칠기는 할지라도 주님의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순수한 심성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었기에 훗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 집에 베드로가 복음을 전한 것은 이방인 선교의 대표적인 예이다. 만약 예루살렘 그들에게 주님이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사역을 맡기셨다면 과연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까? 자신들만의 신앙적 이기심으로 뭉쳐있었으니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그 명령은 지켜지지 못했을 것이다.
(행 11: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행 11: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행 11:3)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행 11:4)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행 11:5) 가로되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행 11: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행 11: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행 11:8)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행 11:9) 또 하늘로부터 두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행 11: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행 11:11)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행 11: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행 11: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행 11: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행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행 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행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행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느 지역 사람들과 같은가?
나름대로 배움을 가졌으니 이리저리 따지는 모습은 바로 그 예루살렘의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까! 성경의 말씀을 이렇게 저렇게 세상적인 방법으로 분류하고 재구성하여 자신들에게 맞도록 해석해버리거나 성경은 비과학적이라 배척해버리는 그 오만함은 바로 예루살렘의 그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은 스스로 모세의 율법에 통달한 자라고 여기며 말하는 그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주님의 그 가르치신 말씀을 시골촌놈들인 제자들처럼 그렇게 수용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모습이 아닐까?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이르지 못할 것이란 주님의 그 가르침은 이같이 순수한 영혼들이라야 주님이 합당한자로 여길 것이란 의미인 것이다.
(마 18:2, 개역)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마 18:3, 개역)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 모두 갈릴리 사람이 되자. 그래서 주님을 진실로 그 마음에 두고 섬기는 주님의 참된 제자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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