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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15.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
(벧전 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예수님의 재림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베드로 사도가 말씀을 전하던 그 때에도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과연 주님은 재림하실까?
만약에 주님이 재림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을 것이며 우리의 구원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가 오실 것이란 구약의 그 약속은 모두 거짓이 되고 만다. 그리고 계시록의 그 기록도 모두 거짓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메시야가 오실 것이란 예언을 구약에 기록하였고 구약의 그 예언을 예표하는 일들은 모두 성취되었다.
에녹의 사건은 믿는 자가 죽음을 보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에 대한 예표였다. 이 일은 메시야가 오셔야만 성취될 일이었다.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한 성을 예비하심은 주님의 부활이 없이는 불가한 일이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은 그 준비될 성에 대해 미리 말씀하셨다.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히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히 11: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히 11: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주님 자신도 그 성의 예비하심에 대해 직접 말씀하셨다. 주님이 말씀하신 ‘처소‘란 바로 구약에서 언급한 그 ’성‘이다.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뜻을 헤아려 안다 함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이 생명이다. 그 고귀한 생명 중에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며 사랑하신 것이 바로 ‘나의 생명‘이다. 믿음의 백성들의 생명 하나하나를 온 천하보다 귀중히 여기시는 것이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생명을 사랑할 줄 아는 자란 곧 주님의 그 뜻을 이해하는 자란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의 이 땅에서 행하심과 같이 그렇게 주님을 대신하여 일할 수 있는 자를 의미한다.
그런 자에게는 주님이 좋은 날을 약속하셨다.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주님이 그 처소로 인도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시 오셔야만 한다. 그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한 것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재림’이라 한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좋은 날 보기를 희망하는 자는 자신의 이기적 욕망에서 나오는 그 처소의 차지함을 위해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님과 다시 함께 하기를 원하는 믿음의 소망에서이다. 그 결과로 처소는 당연히 따라오는 상급일 뿐이다.
이렇게 주님과 다시 함께 하기를 원하는 믿음의 백성들은 ‘혀를 금하라’고 명하고 있다. 이 혀는 사단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바로 그 혀를 이름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던 그 혀는 뱀과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이미 타락해 버렸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악한 것을 말하고 간사스럽고 교묘함인 궤휼을 말하는 그것이 되어버렸다.
(약 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를 금한다는 것은 우리의 성화를 이루는 바로 그 과정인 것이다. 주님의 그 거룩함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성화가 없이는 우리는 결코 ‘영화‘를 이루지 못하고 천국의 그 ’성‘의 주인이 될 수도 없다.
(벧전 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뱀과 대화하던 사악한 우리의 혀를 정화시키시려고 주님은 스스로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다. 그리고 우리의 그 혀를 정화시키셨다. 주님의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따라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혀를 정화시키셨다.
아담의 후손이던 주님의 제자들이 드디어 주님의 그 말씀을 따라할 수 있게 되었다. 본문의 베드로의 이 말도 바로 주님의 그 말씀을 따라 한 것이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는 이 말을 고기 잡던 그 때의 베드로였다면 할 수 있었을까?
주님은 그의 공생애 사역에서 이스라엘의 지배자인 로마와 대립각을 세우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그들의 것을 인정하시고 그들의 것을 그들에게 주라하셨다. 오직 하나님의 화평을 주시기를 원하셨다.
(막 12:14)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막 12: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막 12: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막 12:17)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재림주로 오실 성자하나님은 결코 불의를 용서하실 하나님이 아니시다. 만약 그가 죄를 적당히 눈 감으실 하나님이시면 그는 처음부터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었고 더더욱 재심주로 오실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재림주로 이 땅에 재림 하실 것은 공의로 이 땅을 심판하시고자하시는 것이다.
그런고로 주는 언제나 의인을 살피시고 행악 자들에게는 그의 공의 의 낯을 향하고 계시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 무단히 아무를 선택해서 그에게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가 있었는지를 가려서 물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항상 살피시고 때가 차면 당신의 공의를 집행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다.
(벧전 3: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주님의 제자된 믿음의 백성들은 베드로처럼 부지런히 주님의 말씀을 따라 연습하여야 한다.
그것이 제자된 의무요 책임이다.
믿음의 백성 모두에게 작은 예수가 되는 은혜가 주어지기를 원하노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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