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학대학원

사사기의 두 레위인

by 영동장로교회 2019. 6. 23.



https://drive.google.com/file/d/1p_mL1U71aMApsp-YJaomQHz2DMLAcwlv/view?usp=sharing


2019. 6. 21. (목회자를 위해 작성함)

사사기의 두 레위인

 

사사기에 두 레위인의 이야기가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지도자로 인한 심각성을 깨우쳐주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함께한 지도자, 사사들을 통해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성역을 감당해야할 제사장들의 잘못된 행위가 가져오는 엄청난 재앙을 사사의 그것과 대비시켜줌으로 교훈을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세상적인 방법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 세대가 사사시대의 그 미가와 흡사하다.

(미가의 우상 숭배)

(17:13) 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 이러한 미가의 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 하나님을 가나안의 우상과 동일 선상에서 미신적인 대상으로 섬겼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미가는 파행적인 방법으로 세운 레위인을 합법적인 제사장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12절과 같이 행한 제사장 임명식을 정당하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비록 아론의 자손들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규례가 있다 할지라도(28:1; 17) 미가는 레위인이면 모두 제사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레위인을 통하여 미가는 이제 어머니로부터 받은 저주(2)가 자기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자기 가정을 번영케 하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즉 미가에게 있어서 여호와는 드라빔과 같은 일개 가정의 수호신에 불과하였다(Goslinga). 이처럼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우상 숭배로 인한 혼합주의에 의하여 크게 왜곡되어 있었다.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기쁨의 사명으로 그 일을 감당하여야함에도 불구하고 직업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은 미가의 제사장과 너무 닮아있다.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이주할 곳을 찾는 단 지파]

(18:4)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여차여차히 나를 대접하여 나를 고빙하여 나로 자기 제사장을 삼았느니라

- 여기서 '고빙하다'에 해당되는 '사카르'(*)는 임금을 주고 고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본 절에서 레위 소년은 자신이 삯을 받고서 제사장으로 고용된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종교인들이 얼마나 부패했던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즉 제사장이라는 직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세우심을 받는 성직(聖職)인데도 불구하고 레위 소년은 이에 대하여 천박한 직업의식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한편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 또한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복음을 증거하고 그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성스러운 일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28:19;벧전 2:9). 그리고 이러한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상업적 이해관계가 개입되어서는 아니 되며, 다만 서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피차의 부족함을 채우는 일이 요청된다(고후 8:14). 왜냐하면 성도들이 누리는 복음은 값없이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9:18).

 

특히 교회의 교직자(敎職者)들은 자칫 천박한 직업의식에 빠져 거룩한 복음 사역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삯꾼이 아니라 선한 목자로 봉사하기를 힘써야 한다(10:11, 12). 그리고 교회에 소속된 모든 성도들은 교직자로 하여금 복음 사역에 전무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여야 한다(6:4).

 

하나님이 그 마음에 임재하지 않은 자들은 모든 일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행하게 마련이다. 여호수아 시절에는 그들이 가나안을 정복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 그 당시 그들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려고 했다면 결코 여리고성을 정복하려고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단 지파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으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생각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신앙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정탐꾼들의 보고]

(18:8) 그들이 소라와 에스다올에 돌아와서 그 형제에게 이르매 형제들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 보기에 어떠하더뇨

(18:9) 가로대 일어나서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말라

- 본 절에서는 단 지파가 라이스를 공격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 동기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제시한 가나안 정벌의 신앙적 동기(14:6-9)와 비교해 볼 때 완전히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일단 외형적으로 보기에 좋기 때문에 그 땅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신앙이 없는 자들은 안목의 정욕을 따라 자신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게되는 것이다.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정탐꾼들의 보고]

(18:10) 너희가 가면 평안한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 평안한 백성 - 이에 해당하는 '암보테하'(*)'방심한 백성'이란 뜻이다. 이는 라이스 거민들이 물질적 풍요와 천연적 방어벽을 과신하여 안이한 심경에 젖어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 일반적인 성전(聖戰)의 구호에서는 하나님의 명칭을 '여호와'(1:2;2:13;2:24;6:2;10:8;삼상 7:8)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단 사람들은 '엘로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레위 소년에게 신탁을 구한 것과 관계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절에 기록된 성전 구호는 단순히 형식만 따랐을 뿐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본래의 성전 구호와 비길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 지파의 전쟁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정욕을 쫓아 행하는 전쟁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기업으로 받은 땅을 저버리고(11) 심지어 우상 숭배에 깊이 젖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30, 31) 마치 하나님의 성전(聖戰)을 수행하고 있는 양 행동하였던 것이다.

 

한편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 !)라는 표어는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히 적용되어야 마땅하다(고전 10:31). 그러나 현실의 복잡 다양한 제반 상황들에 적응하다 보면 그러한 표어가 한갓 공허한 추상적 원리로 머물 때도 있으며 심지어는 그와 전혀 상반되는 일을 하면서도 그 표어대로 살고 있는 양 착각하는 경우마저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늘 스스로를 돌아보아 그러한 표어가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크신 권능이 함께 하사 모든 대적들을 성도의 손에 붙이게 될 것이다(고후 10:4).

 

 

직업적으로 목회하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경고하고 계시는 것이다. 레위 소년이라고 언급되는 이 사람은 오직 그의 생계를 위하여 제사장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떠돌이였던 그가 미가의 집 제사장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처지에 있었으나 이제는 한 지파의 제사장으로 청빙을 받을 때 그는 뛸 듯이 기뻤다. 세상적으로 더 풍족한 지위에 오름이니 그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오늘날 사명으로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땅에서 직업인으로서의 목회자가 된 자에게 대한 하나님의 경고하심인 것이다.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신상을 강탈한 단 지파]

(18:20)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취하고 그 백성 중으로 들어가니라

- 여기서 레위 제사장의 타락한 본성을 또다시 보게 된다. 처음에 그는 생계를 잇기 조차 궁색한 때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던 미가의 제안에 감격하여 한 개인의 제사장으로도 크게 만족했었다. 그리고 이 레위 소년은 미가에게서 아들과 같은 사랑도 받았었다(17:10, 11). 그러나, 단 사람들의 새로운 제안은 단순히 경제적인 충족뿐만 아니라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명예까지 부여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 제안을 기쁘게 수락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번 물질에 혹했던 사람은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게 되고 그러한 자기 욕구를 채워 줄 대상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이전의 은인까지도 배반하는 법이다.

 

? 에봇과 드라빔과 생긴 우상을 취하고 - 이처럼 보다 나은 조건에 미혹된 제사장은 본래 주인과의 의리와 계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기가 앞장서서 우상과 종교 기물들을 훔쳐 낸다. 그리고 단 지파와 동행한다. 이렇게 하여 미가의 가정을 타락시켰던 이 제사장은 이제 한 지파 전체를 잘못된 우상 숭배의 길로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된다(30,31).---잘못된 제사장 또는 목회자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됨.

 

미가가 자신이 섬기는 신이 진실로 참된 하나님이셨다면 이같이 행동할 수 있었을까? 참된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미가는 단 지파가 자신보다 우월함을 보고 자신이 찾으려고 왔던 그 신상들을 포기하고 있다. 이는 철저히 자신의 세상적 욕망을 위해 우상 신을 만든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과연 어느 하나님일까? 미가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에게 복을 가져다줄 그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닐까?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추격과 단 지파의 협박]

(18:26) 단 자손이 자기 길을 행한지라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

- 본래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없이 단지 자기 손으로 만든 신상을 소유하는 것에서 복을 받으리라고 기대했던 미가(17:13)였기 때문에 이처럼 그는 자기보다 강한 자와 대적하면서까지 신상을 되찾을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사실 현세적인 복에 몰두했던 미가로서는 자신의 목숨에 대해 남다른 애착심을 가졌을 것이다.

 

 

이러한 단 지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냉엄했다. 그들을 이스라엘에서 제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구원 얻을 자를 상징함인데 여기서 이름이 제하여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됨을 의미하니 이는 가장 큰 심판하심을 상징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했고, 그것이 하나님이 뜻인양 포장한 위선적인 신앙인이었다. 하나님은 결국 그들의 이름을 이스라엘에서 제하셨다. 이는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제할 것을 상징한다. 결국 이들의 기록을 성경에 두신 것은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지닌 자들에 대한 경고의 뜻을 담아두신 것이다.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단 지파의 라이스 정복]

(18:29) 이스라엘의 소생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더라

(18:30)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이 백성이 사로 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18: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의 지은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 이곳 라이스는 가나안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단이라고 칭한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의 전영토의 경계를 말할 때에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란 말을 쓰게 되었다(20:1). 여기서 '브엘세바'는 팔레스틴 최남단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기업이다(15:28).

 

한편 이때부터 실제로 단 지파는 단 지역의 사람과 소라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로 분리되게 된 듯하다. 아무튼 이후로 성경에선 이들 지파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든데 역대기에도 단 지파에 속한 인물에 대해서는 한 명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Cassel).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도 열 두 지파 가운데 단 지파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7).결국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고 이분(二分)되었던 단 지파는 영적인 이스라엘의 족보에서조차 사라진 셈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그 원인을 단지파의 거족적인 우상 숭배 탓으로 이해하고들 있다.

 

자신들의 욕심에 따라 떨어져나간 저들은 하나님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구원의 반열에서 완전히 멀어진 것이다. 자신들의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 우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다.

 

 

 

19:1절에 다시 한 레위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미 앞에서 미가 집안을 통해 한 레위 소년이 언급되었는데, 또 레위인의 이야기가 언급된 것은 타락한 제사장에 의한 중대한 과오와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오늘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보여주려 하심이다. 하나님의 뜻을 그 땅에 선포해야 할 그들이 온전히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 땅을 어떻게 치리하시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려 하심이다. 그리하심으로 오늘 이 땅을 사는 사역자들이 어떻게 행하여야하는지를 가르치시고자 하심이다.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첩을 데리러 간 레위인]

(19: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 17:6 18:1과 유사한 구절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 때에'라고 한 것은 본장의 배경이 17, 18장과 동일한 시대임을 암시해 준다. 그런데 본서 기자가 이미 왕정 제도에 대하여 알고 있는 점으로 보아 본장의 사건을 기록하던 시기는 사사기 시대 이후로 상당 기간이 지난 때임을 알 수 있다(Goslinga).

 

?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 전장(前章)에 이어 본장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레위인이란 점은 당시 극도로 타락한 이스라엘의 사회상을 여실히 증거해 준다. 한편 여기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이란 에브라임 산지의 북쪽 끝 실로(Shiloh)의 인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Keil). 그런데 레위인이 그곳에 '우거'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레위인도 전장(前章)에 나오는 게르손의 아들인 요나단(18:30)처럼 에브라임 산지를 떠도는 나그네였음이 틀림없다(Pulpit Commentary).

 

?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 17:7에 나오는 레위 소년도 유다 베들레헴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그곳에는 레위인들의 거주지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한편이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했는데, 고대 사회에서 첩을 취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첩 때문에 기드온의 가정이 파멸된 것처럼(8:31) 본장에서도 이 레위인이 첩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을 보여 주고 있다. '축첩 제도의 부당성'을 참조하라.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온전하여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율법이 금하는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 그 결과는 한 가정의 파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형제를 살해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 이는 믿음의 백성들이 도무지 용서받지 못할 정도의 죄를 범한 결과를 초래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지 않는 지경에 이름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주제1: [타락한 가정의 비극]

주제2: [첩을 데리러간 레위인]

(19:2)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 아비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달의 날을 보내매

- 여기서 '행음하다'에 해당되는 원어 '자나'(*)는 주로 창기와 같은 직업적인 음란 행위나 또는 그와 같은 성향의 행음(行淫)을 가리킨다. 그런데 히브리 원문에는 '자나'뒤에 '그에게 대항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알라이우'(*)가있어서 이 여인이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그같은 행음을 하였음을 보여 준다. 아마 이 레위인이 먼저 동일한 행음을 범하므로서 자기 첩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음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Moore). 다음으로 여기서 '남편을 떠나'라는 말은 그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양자 간에 불화(不和)하여 서로 헤어진 것을 가리킨다(Cassel). 한편 레 21:7에 따르면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는 모든 레위인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 레위인이 이같이 행한 것은 당시의 성직자들이 윤리적으로 얼마나 타락했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첩을 데리러간 레위인]

(19:3)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비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비가 그를 보고 환영하니라

-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에 해당하는 원문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녀의 마음에 말하고'이다. 이것은 레위인이 진정으로 그녀와 다시 화해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Wycliffe).

 

한편 율법상으로 살인죄(35:31), 간음죄(20:10), 부모를 치는 죄(21:15) 등은 어떠한 제믈로도 속()할 수 없다. 그런데도 본문의 레위인은 자기 첩이 넉 달 동안(2)이나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오히려 그녀를 연모하므로 다시 그녀를 데려오고자 했던 것이다. 이로 볼 때 당시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거의 무시되고 있어 사회의 기강이 많이 흐트러져 있었음이 분명하다(Matthew Henry).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사랑없는 냉랭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것이 이것이다. 자신의 동족이 있는 곳까지 일부러 찾아왔으나 아무도 반겨주지 않고 있다. 사랑이 식어져버린 오늘의 모습 그대로를 묘사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모습이 사랑을 잃어버린 오늘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19:15)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이켜 들어가서 성읍 거리에 앉았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더라

?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더라 - 레위인 일행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그들을 환대하는 기본적인 예절을 보이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는 것은 기브아 사람들의 성품이 얼마나 악했는가를 보여준다(18:3-8;19:2,3; 25:43;벧전4:9).

 

즉 나그네를 사랑하고 대접하라는 것이 율법의 가르침이었는데도(10:19) 그들은 이를 철저히 무시하였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레위인과 그의 첩과 하인은 이방인의 성읍인 여부스에서 머물기를 마다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성읍까지 오면서 가졌던 기대를 한꺼번에 잊어버리고 낙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Wycliffe).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기브아에서의 유숙]

(19:16) 이미 저물매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우거하는 자요 그곳 사람들은 베냐민 사람이더라

본절에서 본서 기자는 레위인 일행에게 친절을 베푼 에브라임 출신의 노인 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기브아 성읍에는 타지(他地)에서 온 이 한 사람 외에는 정직한 사람이 없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 우거하는 자 - 이에 해당하는 원어 `게르'(*)'나그네(손님)로서 체류(거주)하다'는 뜻의 '구르'(*)에서 온 말로, 타지에서 온 사람을 가리킨다.

 

이 상황은 룻에게 온 천사들을 그 땅의 남자들이 남색하려고 요구했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모습은 이와 같아서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과 같다.

한편 그 레위인은 자신의 안일을 위해 자신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주었다. 율법이 금하는 일을 자신이 앞장서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이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 거룩한 행실을 보이지 않는 이 레위인의 모습은 흡사 이 땅의 우리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기브아 비류(匪類)들의 악행]

(19: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비류들이 그 집을 에워 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

(19:23)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악을 행치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었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19:24)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 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어찌하든지 임의로 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하나

(19: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내매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 자신의 딸을 내어 놓겠다는 노인의 제안은 비류들에 의해 거절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같은 경내(境內)에 살고 있는 노인에게는 해를 끼치려 하지 않은 것 같다. 아니면 그들은 남녀간의 성 행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비정상적인 남색(男色) 행위에만 관심을 둔 듯하다.

 

?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 내매 - 많은 학자들이 여기서 `그 사람'은 노인을 가리킨다고 본다(Keil, Goslinga). 그러나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여기서 `그 사람'이란 분명히 `그 레위인'을 가리킨다. 그 레위인은 노인의 제안이 거절 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자신과 자기의 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일단은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 주었다.

 

비록 사랑을 고백하며 설득하여 장인에게 데려온 아내였지만 (3-10) 이 레위인은 자기의 안전을 위하여 아내를 비류들에게 내어주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들의 극한적인 이기주의 성향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반대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그보다 더 큰사랑은 없을 것이라고 교훈하셨다(15:13).

 

이는 성도들을 사단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져야 하는 목회자가 오히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성도들을 버리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타락한 성직자가 보여주는 가장 최악의 모습인 것이다.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악행에 대한 고발]

(19:27)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지고 그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 그의 주인이 일찌기 일어나 - 자신의 아내를 죽음으로 내어 몰았던 이 비정한 레위인은 간밤에 당한 공포스런 일을 생각하며 일찌기 그 성읍을 떠나 위험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아내의 행방이나 생사여부를 확인해 보려는 최소한의 관심조차도 기울이지 않았다. 이로 볼 때 이 레위인에게는 그의 첩에 대한 육적인 사랑은 있었을지 모르나 진정한 사랑은 전혀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앞서 그의 장인이 계속해서 떠나려는 이 레위인 사위로 하여금 자기 집에 하루라도 더 묵도록 한 것도 아마 자기 딸에 대한 이 레위인 사위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5-8).

 

그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12등분하여 각 지파에게 보내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비류들의 죄상을 강력히 고발하고 전 민족적 차원의 징계를 호소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레위인의 이같은 끔찍스러운 행동은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을 저버리는 죄악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상대방의 허물에 대한 적개심에만 불타 있었기 때문이다(7:3-5).

기브아 사람들의 이 행음은 하나님을 떠난 자가 행할 수 있는 타락의 끝을 보여준다. 이 일은 훗날 호세아 선지자가 언급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건이 지금 이 땅에 난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이 시대에 강력한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기브아 사람들의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백성들은 민족적 차원에서의 회개 운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되었다(20). 훗날 선지자 호세아가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타락의 극치로 까지 들고 있는 것을 볼 때(9:9;10:9) 기브아 사람들의 행악의 여파가 얼마나 컸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믿음의 백성들의 모습이 여기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의 모습과 너무나도 일치한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며 모든 잘못은 상대에게 있는 것으로 자신은 회개치 않고 상대만 정죄하는 모습은 그 때의 이스라엘과 같다.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총회의 결의]

(20:10)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에 열, 천에 백, 만에 천을 취하고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예비하고 그들로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의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취하고 - 앞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미정복지를 정복하러 올라갈 때에는 자기에게 분배된 기업을 차지하기 위하여 각 지파별로 올라갔다(1). 그런데 본 절에서는 기브아 비류들을 응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전지파가 공동으로 각 지파중에서 사분의 일씩 선발하여 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아 사람들의 문제를 대처함에 있어 혼연일치하였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이스라엘 내에서 죄악을 제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고자한 열 한 지파의 궐기는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13:5;17:7;19:19).

 

그러나 그들은 형제 지파를 매몰차게 정죄하기에 앞서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통절히 느껴야 했고, 그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민족 현실을 두고서 회개해야 했다. 오늘날도, 교회와 사회에 내재해 있는 여러 문제들을 보고 의분을 느끼고 비판하는 자는 많지만 그러한 문제들을 곧 자기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부터 개혁시키고자'하는 진정한 개혁자는 그리 많지 않다(7:3-5).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두번째 접전]

(20:24) 그 이튿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나아가매

(20:25) 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일만 팔천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 다시 이스라엘 자손...땅에 엎드러뜨렸으니 - 이처럼 본 절은 두 번째 전투에서도 이스라엘이 패배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볼 때 2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날이 저물도록 흘린 눈물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패배로 인하여 여호와를 원망하는 눈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한 번의 패배를 통해서도 바른 자각을 얻지 못하고 동일한 실수와 범죄를 반복한 것이다.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두번째 접전]

(20:26)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서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고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거듭 패배를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자손들은 보다 근원적으로 패인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스스로를 돌아보아 교만하고 완악했던 모습들을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전까지는 병력의 수효만을 믿고 하나의 요식(要式) 행위로 하나님을 찾았지만, 이번에는 '모든 해결책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겸허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즉 그들은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죄악된 실상들을 직시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우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119:71;5:8). 진정으로 회개하고 마음을 비운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지혜와 위로로 채워 주실 것을 약속하였다(107:9;2:5).

? 저물도록 금식하고 첫 번째 전투에서 패했을 때에 그들은 여호와 앞에 나아가기에 앞서 '스스로 항오를 벌였다'(22). 반면에 이번에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자세를 취하였다. 즉 그들이 또다시 힘으로 베냐민 지파와 전쟁하려고 했다면 힘을 쇠잔케 하는 금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성경에는 회개를 위해 금식한 경우가 많이 있으며(삼상 7:6;2:13;9:9),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기 위해 금식한 예도 여러 번 있다(34:28;1:14).

 

? 번제와 화목제 - '번제'(Burnt Offerings)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유지를 기원하며 드리는 제사이다. 그리고 '화목제'(Peace Offerings)는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화목과 친교를 도모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한편 이 두 제사는 모두 예배자가 자원하여 드리는 자원제(自願祭)이다. --- 참된 제사를 드린 이스라엘, 그리고 그 때 함께 하신 하나님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두번째 접전]

(20:28)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셨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묻자오되 내가 다시 나가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셨더라 - 본 절에 등장하는 비느하스(Phinehas)는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이 부디엘의 딸을 통하여 얻은 아들이다(6:25).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시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이미 활동하기 시작했다(25:7). 때문에 그가 제사장으로 지낼 때는 사사 시대 초기임이 분명하다. 이로 볼 때 본 장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의 발생 연대 역시 사사 시대 초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 세번째 전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승리를 보증하는 이같은 약속을 주신 것은 26절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화목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화평을 누리기 위한 목적으로 회개하고 서원함으로 드려진다. 그러므로 본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승리의 관계가 다시금 회복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공의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보이신 현장이다. 비록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죄를 범한 베냐민이지만 그래도 그들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에 의해 600명이라도 살리신 하나님이시다. 이 은혜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줄 사도바울을 예비하신 것이다.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전멸]

(20:47) 베냐민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서 넉 달을 지내었더라

? 육백 명이...거기서 넉 달을 지내었더라 - 무사히 림몬 바위로 피한 600명은 21:13절 이하의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그곳에서 4개월간을 지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육백 명을 남겨 두신 것은 진노 중에라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 대한 당신의 언약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기인한 것이었다(35:12;49:28;24:4;1:5-15;4:3, 4; 19:28;1:1;7:4). 만일 당시에 베냐민 지파가 전멸되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 지파의 후손인 사도 바울(11:1)의 이름을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학대학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택의 교리  (0) 2019.07.19
유기의 교리  (0) 2019.07.17
2019년도 조직신학 - 서론(1)  (0) 2019.03.24
조직신학 - 응용편(8)  (0) 2018.12.09
조직신학-응용편(7)  (0) 2018.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