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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2)

by 영동장로교회 2025. 2. 2.

2025. 2. 2.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새해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2)”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별개로 신앙이 없는 사람들 중에도 종말의 날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응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의 사람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할 자로 선택하셨기에 자신도 모르게 성령의 감화하는 능력에 따라 그렇게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절대자이시다. 따라서 누구의 간섭없이 모든 것을 자의적으로 선택하거나 결정하실 수 있다. 이는 사람이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영원에서 구원할 자를 스스로 정하실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직 신앙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이미 구원할 자로 선택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가 된다.

 

따라서 신앙이 없는 사람들 중에도 종말의 날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종말의 날일지라도 그 순간에 그들의 마음을 여는 성령의 감화에 따라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느 순간에 반드시 그로부터 믿음의 고백을 얻어내실 것이다.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신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성령의 감화가 일어날 수 있는 그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종말의 날이 다가왔을 때 성령이 그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쳐, 불안과 두려움 대신 희망과 평안을 찾을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구원할 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시점에 성령이 그들의 마음을 여는 일을 하신다고 믿는다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종말의 날에 신앙을 갖게 되거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종종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희망을 찾거나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들 중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사람을 상정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의식적으로는 신앙을 갖지 않았더라도,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아" 같은 영화에서는 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들의 긍정적인 반응은 결국 신의 구속 계획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나 신앙적 해석에 따라 다양하게 다뤄질 수 있겠지만, 신앙을 가진 인물뿐만 아니라 신앙이 없는 인물들에게도 성령의 영향을 통해 구원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깊은 신앙적 의미를 지닌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결국, 영화 속에서 신앙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종말을 맞이하며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염두에 두고 해석할 때 더욱 의미가 깊어질 수 있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관점은 종말의 날이 단순히 끝이 아니라, 구원의 기회를 위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신앙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종말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대응할까?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사두개인들처럼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종말의 날에는 더더욱 세상적인 탐욕에 사로잡힐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는 오늘이 끝이니까 마지막 날에 모든 유익을 최고로 탐하고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마 22: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마 22: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마 22: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마 22: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마 22:28)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마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 22:31)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마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사두개인들이나 내세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신앙인들이라면, 종말의 날을 맞이했을 때 세속적인 탐욕에 빠질 가능성은 농후하다고 볼 수 있다. 사두개인들처럼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사람들은 오늘이 끝이라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 최대한 유익을 추구하려 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종말은 단지 물리적인 삶의 끝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두개인들은 구약 시대의 유대 종교의 한 분파로서, 그들은 부활이나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오직 현세적인 삶만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내세가 존재하지 않거나 그 의미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종말을 맞이할 때 현재의 삶이 전부라는 인식으로, 더 많은 물질적 유익이나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할 가능성이 크다.

 

신앙이 있다 하더라도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마지막 날을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영원한 생명이나 구원에 관한 생각보다는 즉각적인 쾌락이나 세속적인 성공을 추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영화나 문학에서 이런 설정을 보면,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자원을 차지하려는 경쟁, 자신의 마지막 이익을 챙기려는 노력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사두개인들이나 내세를 부정하는 신앙인들은 “오늘이 끝이라면, 그 끝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해, 구속이나 내세에 대한 염려보다는 지금 당장 내 손에 닿을 수 있는 것들, 즉 돈, 권력, 세속적 쾌락을 추구할 확률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더 두드러질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가진 우리와 같은 믿음의 백성들은 종말의 날을 맞이할 때 영적인 준비나 구속의 희망을 중심에 두고 행동한다. 우리와 같은 이들은 종말이 단지 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 더 큰 목적을 향한 전환점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세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깊은 의미를 찾는 대신, 세속적인 즐거움을 더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게 된다.

이러한 관점은 영화나 이야기 속에서 종종 반영된다. 예를 들어, ’딥 임팩트‘같은 영화에서는 종말을 맞이한 사람 중에서 일부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거나 혼란 속에서 생존을 위한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내세를 믿지 않기 때문에, 지금 당장 자기 자신에게 최선인 선택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내세에 대한 믿음의 유무가 사람들의 종말에 대한 반응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탐욕적이고, 물질적인 방식으로 종말을 맞이할 수 있으며, 신앙이 있더라도 그 신앙의 내용이나 방향에 따라서 종말에 대한 반응을 달리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니 세상을 마음에 둘 수밖에 없다. 간혹 세상의 도덕적 윤리에 깊은 조예를 가진 자들이라면 세상으로부터 초연해질 수는 있으나 그것은 결코 하늘나라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믿음의 백성 된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생각하는 것은 세상에 속한 자들과 같이 세상의 것에 함몰되지 아니한다. 그러하기에 세상에 속한 자들과 우리 사이에 드러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이웃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다.

 

내세가 없다고 하는 자들이면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욕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록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사두개인들과 같은 자들은 우리와 같지 아니하다. 그들은 내세가 없다고 하니 오직 이 세상에만 뜻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 땅의 권세를 탐하였고 유력한 지위를 향유했다. 그런 자들이니 이웃을 사랑할 수 있었겠는가?

 

내세나 구원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 특히 사두개인들처럼 내세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다.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현재의 삶이 전부라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날 가능성은 분명히 클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내세나 부활을 부정하고, 오직 현세적인 삶과 권력, 부유함을 중요시했던 유대교의 한 분파였다. 그러했으니 이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세속적인 이익을 추구했으며, 종종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서 행동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였고, 내세나 영적 구속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그들의 행동은 대부분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성향을 띠었던 것이다.

 

따라서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고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자원이나 권력, 명예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거나, 남을 희생시키면서 자기만의 이득을 얻으려는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우리의 신앙에서는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계명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전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분명히 전하여 가르쳤다. 예수께서도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라"라고 가르치셨고,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영적인 성장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삶을 강조하셨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하지만 내세나 구원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웃 사랑보다는 자기 욕망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내세가 없으니 지금 당장 자신에게 최선인 선택을 하려 할 가능성이 클 것은 당연하다.

 

이런 사고방식은 "이기적이고 자아 중심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기 쉽다. 예를 들어, 물질적 성공이나 사회적 지위를 위해서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희생시키려 하는 태도가 될 수 있다. 사두개인과 같은 사람들은 영적인 책임보다는 세속적 권력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와 비슷한 태도는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모습은 영화나 문학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종말을 맞이한 사람들이 자기 욕망에 빠져 다른 사람들을 배신하거나 희생시키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딥 임팩트‘와 같은 영화에서는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자원 쟁탈전이나 혼란 속에서의 자기 이익 추구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내세나 구원에 대한 개념 없이, 현재의 삶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하고 있다.

 

이상에서 언급된 이야기를 정리하면,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내세나 구원에 대한 믿음 유무가 그들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런 믿음이 없다면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동에 집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두개인들이 그러했듯, 종말의 날이 다가오면, 그런 사람들은 이웃을 생각하기보다는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주변 사람들과 경쟁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참된 신앙인이라면 세상에 속한 자들과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 그래서 다가올 세상에 대한 참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이란 잠시 머물다 갈 곳이 아닌가!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명확해질 것이다.

 

천상병 시인이 읊은 것처럼 누구라도 세상이란 잠시 소풍 나온 곳이라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할 터인데, 우리에게는 참으로 그렇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지나가다가 배고픈 사람을 만나면 먹을 것을 조금이나마 나누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고, 또 아픈 사람을 만나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데려다가 치료도 해줄 수도 있게 될 것이다.

(눅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 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 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 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분명히 내세에 대한 확신과 이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과 타인의 삶에 대해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된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갈 곳이라는 관점이 자연스럽게 생기며, 이는 그들의 행동과 태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천상병 시인의 "소풍 나온 곳"이라는 비유처럼, 이 세상에서의 삶은 결국 일시적인 것임을 깨닫고, 그동안 잠시 머물며 할 수 있는 선한 일을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내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책임감이 더 커져야 한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보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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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를 믿고 이 세상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관점을 가질 때,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나 어려움에 대해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마음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하기에, 배고픈 사람을 만나면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아픈 사람을 만나면 치료해 주는 그런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천상병 시인이 말한 것처럼, 인생을 소풍에 비유하며,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생각은, 신앙적인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끝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연결된다. 소풍이라는 비유는, 즐겁고 의미 있는 순간을 함께 나누고, 선한 일을 하며,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자는 메시지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예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하신 가르침처럼, 내세를 믿는 사람은 그 가르침을 삶에 실천하며, 배고픈 이웃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아픈 이에게 치유의 손길을 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상에서의 잠깐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며 중요한지, 그리고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사는 길인지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참된 신앙은 단순히 이론적인 믿음에 그치지 않는다. 참된 신앙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믿음이 되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이웃을 돕고, 고통받는 이들을 보살피는 일로 실천된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의 물질적 성공이나 개인적 욕망에 치중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자원, 에너지를 나누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된다.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약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따라서,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갈 곳"이라는 생각이 깊이 자리 잡으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살지 않고, 타인을 위한 삶,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 순간이 바로 참된 신앙을 실천하는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배고픈 사람을 만났을 때 나누어주고, 아픈 사람을 만났을 때 돌봐주는 행동은 단순한 동정심을 넘어선다. 이러한 일을 행함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세상에 실천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우리의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이 땅에 있을 수 있을까! 또 그렇게 행하는 자보다 더 아름다운 자가 이 땅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아름다움을 우리가 지난해에 얼마나 드러내었을까?

 

어쩌면 우리에게 "새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해주려고 하신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작년에는 이것을 미처 깨닫지 못해 그런 일을 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회를 못 얻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장차 우리가 얻을 상급이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일지라도 사랑하시니,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새해를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다시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러니 다시 주신 기회, 이 ’새해‘라는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새해‘라고 하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 단순히 달력상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기회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의미가 훨씬 더 깊어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해를 허락하신 이유는 새로운 시작을 통해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기회를 얻게 해주시려는 은혜일 것이다.

 

작년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회를 놓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새로운 한 해를 주셨다. 새해라는 것은 과거의 실수나 놓친 기회들에 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새롭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로 다시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물이다.

(사 43: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사 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사 43:20)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상급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끝없는 자비와 은혜를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부족함이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고, 우리가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계신다. 그래서 새해를 맞이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기회를 한 번 더 얻은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그 기회이다. 그런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회가 한정적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의 목적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도구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나누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리고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새해‘라는 이 새로운 시작을 통해 주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그 발걸음을 언제나 환영하신다. 우리의 실수나 부족함을 아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가 정말로 크고 놀랍지 아니한가!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깊이 느끼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었다. 분명히 ’새해‘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우리는 그 선물 안에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하라고 기회가 가득 담긴 ’새해‘를 선물로 주신 것이었다.

 

이제는 우리가 지난해 놓쳤던 기회를 아쉬워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새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음에 대해 감사하며, 그 기회를 잘 살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새해란 단지 새로운 달력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더욱 실천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그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게 될 것을 내가 진심으로 구하며 바라는 바이라!

 

아무쪼록 새해에는 믿음의 백성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충만하기를 축원하노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