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12.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에 대한 그 비밀에 관하여(4)”
- 아브라함의 믿음과 제사장적 역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 행동을 멈추게 하시고, 대신 어린 양을 제물로 미리 준비하셨다 .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창 22: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창 22: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창 22: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 22: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 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창 22: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창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창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창 22: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 사건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과 신뢰를 강조하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한 구속을 준비하셨음을 예표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며 중보자의 역할을 행하셨다.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제물이었으며, 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사건과 많은 상징적 유사성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서,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완전한 제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이 사건과 예수의 십자가 사건 사이에는 유사성이 매우 높다. 과연 어떤 유사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먼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 면에서의 유사성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둘째는 제물의 제공이라는 측면에서의 유사성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서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이었다. 예수도 성부 하나님에게 있어서 오직 유일한 아들로서의 성자 하나님이셨다. 아브라함은 목숨보다 귀한 아들을 제물로 내어놓았고, 성부 하나님도 우리를 위해 성자 하나님을 십자가 위에 제물로 내어놓으셨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대신 어린 양을 제공하셨다. 예수는 인류를 위한 최고의 제물로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세 번째는 중보자의 역할 면에서의 유사성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려 했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예표한다는 점에서의 유사성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대속의 역할을 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는 그 사건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상징적으로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구약에서는 죄인이 죄사함을 얻는 것은 반드시 중보자 역할을 하는 제사장을 통해 제물을 바침으로써 가능했다. 그 시대에는 제물을 바치는 그 제사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아직 제사 규례가 전하여지지 않았던 그때에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을까?
아브라함도 분명히 이 제사이 방식을 통해 구원을 얻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중보자 역할을 누가 어떻게 했으며, 제물은 어떠했을까?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린 것으로 볼 수 있는 예가 몇 가지 존재한다.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일이나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친 일이 대표적이다.
모리아산에서의 번제에서 아브라함이 제사장 역할을 한 것에 대해 해석한다면, 이삭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아브라함이 제사장의 역할을 맡았다고 보는 해석이 가능하다. 구약에서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간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 했던 사건은 제사장처럼 중보적 역할을 한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거느린 식솔들의 숫자가 한 부족을 이룰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이삭이었으니 이삭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그 모두를 대신하는 제물이 되기에 족했다. 그래서 그 순간의 이삭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서 중보자가 되실 예수를 예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로서의 역할을 예표하며, 이는 중보자로서의 예수의 구속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음이다.
보통 구약에서 제사를 드릴 때 사용되었던 제물은 양의 첫 새끼와 같이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들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그에게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던 이삭을 제물로 드린 그 일을 직접 수행했다는 것은 제사장이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린 그것을 예표하여 드러낸 일이 되었다. 그러하기에 아브라함은 제사장직을 예표하여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제사장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 사건이 존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으로 오실 그것에 대한 예표적이면서 대표적인 그림자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아브라함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그의 믿음이 핵심이 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여김을 받았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속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다고 보아야 한다.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았고,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었다고 성경은 명확히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구원은 단지 하나님을 믿는 그런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그 믿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임에 대해 고백함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그 약속을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른 것임에 분명하다. 아브라함의 그 제사 속에는 이러한 것들이 모두 담겨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아브라함은 중보자로서 제사장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수행하였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구속의 그림자도 보여주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의미를 지니며, 아브라함의 구원은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것이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설명하고 있었다.
제사장 직분을 수행한 레위 족속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의 하나가 레위였으니, 결국 레위는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던 자 중의 하나이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제사드린 그 순간에는 자신의 허리에 있는 그 레위 제사장의 역할을 스스로 감당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자신이 죄를 고백해야 하는 죄인의 입장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죄를 하나님께 고하는 중보자로서의 제사장 역할도 함께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서는 구원을 얻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죄의 고백을 하면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를 통해 그것이 성부 하나님께 전달된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자신의 죄 고백이 중보자를 통해 하나님께 전달되었을 것인데, 이때 그는 제사장직을 감당하였기에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전달한 셈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그 제사는 오실 주님을 그대로 예표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는다면,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관련된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몇 가지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아브라함의 죄에 대한 그 고백의 증거가 될만한 성경적 근거는 많지 않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인정하는 간구와 기도를 드린 것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창세기 18장에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장면이 있다.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창 18: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창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창 18: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창 18: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창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창 18: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창 18:28)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29)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여기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을 먼지와 재인 티끌과 같은 자로 비유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겸손히 고백하고 있다. 이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죄인됨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보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레위 지파의 조상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행한 제사나 제사장적인 역할을 한 것은 훗날 레위 지파가 맡을 그 제사장 직분을 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레위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다. 그러하기에 그의 자손 중에는 이미 제사장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은 멜기세덱과 만나는 장면에서 중요한 제사적 행위를 수행한 것을 보여준다.
(창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 14: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창 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여기서 멜기세덱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역할을 수행하여 중보자 역할을 했다고 해석할 수 있기에 이 일은 분명히 제사드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이 일에서 자기가 얻은 것 중에서 제일 귀한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림에 있어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드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회개함으로써 사하심을 입고, 의롭다 함을 얻는 것에 대한 믿음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어짐으로써 아브라함은 능히 구원을 받을 절차를 온전히 따랐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그 행위는 훗날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그 제사 제도에 대한 그림자였다. 또한, 그것은 장차 궁극적인 구원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그림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점은, 특히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앞두고 하나님과 간구하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로서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들을 살려 달라고 간구하는데, 이는 제사장처럼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창 18: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창 18: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창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창 18: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창 18:28)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29)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들을 구해달라고 간구하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제사장적 역할을 한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의미는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신뢰만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됨을 인식하고, 동시에 중보자로서 제사장적 역할을 수행한 깊은 신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이는 확실히 참된 중보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였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자신이 제사장이 되는 것을 통해 훗날 레위 지파와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맡아 수행할 것을 미리 나타내고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아브라함의 제사적 행위가 단순히 그의 개인적인 예배나 행위에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 제사 제도의 뿌리가 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그 행동은 레위 지파 제사장의 직무를 예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성경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
아브라함 자신이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모습은 바로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수행할 것을 예표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은 멜기세덱과 만나 십일조를 바치고 축복을 받는데, 이 장면은 아브라함이 제사장직을 직접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이 제사장 역할을 하는 가운데,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바친 중요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나타나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그가 그의 조카 롯을 구하려고 갈 때 그의 사병들을 데리고 갔는데, 그가 드린 십일조의 재원은 그의 사병들이 얻은 수확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십일조를 드린 것은 그의 사병들을 대신해서 드린 일이었으니,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순간의 아브라함은 분명히 제사장직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이는 장차 이스라엘이 드릴 제사에서 제사장이 한 그 일을 예표하는 역할을 했다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제사장적 역할을 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건이 되었다. 따라서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만남은 후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으로도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전 생애를 통해 드러난 그 일들은 구약 시대에는 제사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밝힌 것으로, 이는 분명히 오실 주님을 통해 구속하심과 결과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될 그 일에 대한 그림자였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림자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께서는 반드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다. 만약 오시지 않는다면 그 그림자를 믿음으로 쫓아갔던 구약 시대의 그 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그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그 믿음도 헛것이 되고 말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음 주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에 대한 그 비밀에 관하여(5)”라는 제목 하에서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신 후에 옥으로 내려가신 이유”에 대해 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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