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하나님의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에 관한 소고(2)”
네 번째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관리자로 세우려 하심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라는 주장에 대한 것이다. 이 목적에 대해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살필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창조 세계를 돌보고, 보존하며, 하나님의 뜻에 맞게 관리하는 그 일을 맡기고자 하심이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단지 부리실 일군으로만 쓰시려고 만든 것이 아닌가?“라고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지으셨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기업을 일구면 훗날에 그 기업을 이어 나갈 자로 자기의 아들을 생각한다. 이는 그 자리에 세워진 사람이 주인 되는 자리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자의 자리에 서라 하심은 우리를 주인 되는 그 자리에 두려 하심이다. 창조 세계를 다스린다는 것은 단지 그것을 지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른 다스림이란 그들을 가장 최적의 상태에 두는 일, 즉 그들을 아끼며 사랑하는 그 일을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는 바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그 백성들을 다스린 왕이었다. 그러면 세종대왕은 그의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억압하여 지배했던가! 오직 그 백성들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노력하지 않았던가! 얼마나 많은 애를 썼으면 눈이 상하고 몸에 병까지 생겼을까!
이는 그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참으로 위대한 왕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진심으로 그 백성들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스림은 하나님의 그 성품인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는 일이었다.
모세는 이 다스림에서 가장 모범적인 예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을 때, 모세는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서라도 그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했다. 얼마나 그 백성들을 그렇게 진심으로 사랑하였으면 자신의 이름이 그 귀한 생명책에 기록되는 그 일조차도 포기하며 살려달라 했을까!
(출 32:31)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출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그 일을 하나님 당신 외에 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 주인 된 우리들 뿐이다. 그 일은 오직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여 깨닫고 실천하여 행하는 자를 말함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관리할 자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이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 근저에서 작용하고 있음이었다.
다섯 번째는 자유 의지와 선택의 자유를 주시고 그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선택하게 하시려고 했다고 한다. 이 목적도 보여지는 그 겉모습에서는 독자적인 한 목적만으로 보여질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 지배되는 한 현상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굳이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고, 또 그것으로 선택할 자유도 허락하셨을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완벽하게 가져갈 수 있게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관계를 완전하게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그것을 우리의 본능 속에 심어 놓으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된다. 우리가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 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벽하게 가져갈 수 있게 우리의 본능에 그렇게 심어 놓으면 될 일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를 갖도록 처음부터 프로그램해놓으셨다면 아담이 선악을 아는 나무 열매를 먹는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참으로 사랑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일종의 로봇과 같은 존재일 뿐이니, 참된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고로 하나님과 참된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그 대상은 반드시 인격적인 존재이어야만 한다. 로봇과 같은 것을 인격적인 존재라고 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려고 창조하셨으니 당연히 우리에게는 자유 의지가 심겨 있어야만 한다. 그런고로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셨다는 것에 대한 그 증거가 된다.
여섯 번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써의 역할을 하게 하시려고 창조하셨다는 주장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없으셔서 우리를 당신을 도울 조력자로 만드셨다는 것일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자이시다. 따라서 모든 일을 누구의 방해를 받음이 없이도 능히 스스로 이루실 수 있는 자이시다. 원하셨다면, 모세 없이도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셨을 수도 있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널 때도 바람을 일으켜 그 홍해가 갈라지게 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왜 이때에도 굳이 모세에게 너의 지팡이를 들어 바다에게 명하라고 하셨을까?
(출 14: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출 14: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이는 그 선택하신 자에게 상급을 베풀어 주시려는 그 한마음에서 나온 결과이다. 모세를 선택하셨으니 그 모세로 하여금 공로를 세우도록 배려하심이다. 여호수아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모세는 기도했디.
(출 17:8)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출 17: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출 17: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출 17: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출 1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출 17: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모세의 손이 들려있으면 여호수아의 군대가 이겼고, 그의 손이 내려가면 졌다. 그러면 모세의 기도하는 그 손이 없으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셨을까!
이는 모세에게 상급을 주시려는,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드러난 그 순간이었다.
모세를 사랑하셨으니 그가 장차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상급을 베풀어 주실 그 구실로 참으신 것들이 모세의 그 행적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이루실 그 도구로 사용하시려고 사람을 만드셨다는 그 주장도 결국은 그 근저에 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사랑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 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인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해주기 위해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 원하셨기에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란다. 창세기에 에덴동산에 생명 나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애초부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 일에서 실패했다. 실패한 아담이 만약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뿐만 아니라 생명 나무의 열매도 따 먹었더라면 그는 영원히 죽지 않으면서 그 긴 세월 동안 무수히 많은 죄만 짓고 사는 인생이 되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죄를 지으면서 사는 인생만큼 불행한 인생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생명 나무 열매를 따 먹지 못하도록 그 낙원에서 추방하신 것이다. 성경에는 그 길목에 두루 도는 화염검을 배치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담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셨으면 그리하셨을까!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결국 우리는 예수를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인간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열쇠가 되게 하셨다. 이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시겠다는 그 의지의 드러남이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면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처음 질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였다. ”하나님의 우리를 만드신 목적“을 살핌에서 그 궁극적 목적이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시기 위함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검토 결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는 목적“도 이 원리에 합당한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하니 우리의 사는 목적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이 사랑에 마땅히 답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그 계명을 전할 때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 6: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신 6: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하지만 그 백성들은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했으니 그 이스라엘의 삶은 항상 하나님과 엇박자를 내고 말았다.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심으로 그 뜻을 일깨워주려 하셨지만 어리석은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하고 세월만 흘려보냈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 안타까운 세월이 흐르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직접 이 땅에 오셨고, 그 이스라엘을 대면하셔서 직접 가르치셨다. 그래도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이런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은 저들을 향한 그 사랑을 결코 거두어들이지는 아니하셨다.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래서 이방인들이 먼저 깨달아 저들을 시기 나게 만듦으로써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로 정하셨으니 그 기회가 우리에게로 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롬 11: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롬 11: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롬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롬 11: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이 기가 막힌 기회를 놓쳐서야 되겠는가? 만약 그리한다면 우리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자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베푸시려는 그 사랑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그 길을 선택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일이다. 이는 모세가 그처럼 간곡히 당부한 그것이었고, 이스라엘이 깨닫지 못하였을 때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다시 말씀하여 가르치신“하나님을 사랑하라”하신 그 가르침,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일이 드러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그 일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면 흔히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하는 사랑처럼, 대상이 된 하나님을 직접 사랑하여야 하는 그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사랑을 나눌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아주 절친인 친구 집을 방문할 때 사람들은 그 친구의 자녀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해서 간다. 왜냐하면 친구의 자녀에게 하는 것이 곧 그 친구에게 하는 일인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의 자녀인 이 땅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그 일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라고 첫 번째 답에서 언급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며,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중요한 방법이 된다고 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무엇이던가?
하나님은 이 땅을 사는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기를 그렇게도 원하셨다. 그러니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리가 이 땅의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기에 예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렇게 외치신 것이었다. 모세도 이미 그 백성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두 번째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는 삶이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그 사랑에 화답하는 일이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에 대해 우리가 감사하지 아니하고 사랑을 돌려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해 나아가겠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어찌 그런 어리석은 길을 선택해서 걸어갈 수 있겠는가!
마땅히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참된 도리일 것이니 우리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선택해서 나아가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란 열매를 맺는 삶이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가 내 제자가 된 것을 이로써 나타내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함, 믿음,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이다. 이러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이웃을 향한 그 사랑으로 이루는 그 열매를 맺음이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는 그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장 핵심이 되는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네 번째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의 또 다른 형태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드러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삶을 말한다. 이것 역시, 바로 이웃 사랑이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다섯 번째로 언급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란 정직하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 했다.
성경에서는 거짓과 부정적인 행동을 경고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윤리적으로 바르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삶을 산다는 것은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음이니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실천이 되지 않는 일이다. 따라서 정직하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 일도 결국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라 했다. 고난이란 것은 대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다닐 때 참으로 많은 고난을 당했다.
(삼상 23:15) 다윗이 사울의 자기 생명을 찾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황무지 수풀에 있었더니
(삼상 23: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삼상 23: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그런 고난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향한 그 신뢰를 버리지 아니했다.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온 사울왕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다윗에게 주어졌지만, 다윗은 결코 그를 해치지 않았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면 가능했을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계획을 믿는 삶이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중요한 부분이 됨은 분명하다.
이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펴보았는데, 보여진 바대로 다양한 모습이 그려졌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그 모습들도 그 본질에서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의 사는 목적이 하나님의 베푸신 그 위대한 사랑에 대한 빚 갚음이었다. 그 빚 갚음은 결국 이웃 사랑이라는 형태로 드러났다. 그러하기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베풂이 그 베푼 자의 공로가 되지 아니하고, 그가 마땅히 행할 도리에 해당하는 일이 되고 있다.
(눅 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 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 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목적“은 내가 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베푸신 그 사랑의 빚에 대한 그 ”빚 갚음의 삶“이었다. 그리고 이 빚 갚음의 삶은 이웃 사랑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주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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