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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행복 자에 관하여

by 영동장로교회 2024. 6. 16.

2024. 6. 16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참된 행복 자에 관하여”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분명히 깨닫는 일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참으로 중요한 숙제일 것이다. 오랜 옛날부터 이 주제는 지각 있는 자들에게 늘 중요한 화두로 다가왔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자 중에서 하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주제에 대해서는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숙고한 후에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행복을 단순한 쾌락이나 기쁨으로 정의하지 않고, 인간의 영적이고 윤리적인 발전의 결과로서의 완전한 인간성의 실현으로 이해했다. 행복은 우리가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이며, 우리의 모든 행위와 선택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본 것이다.

 

그는 내세를 부정하고 오직 현세에서의 삶에만 집중했으니 행복 추구가 당연하게 최고 목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이 지닌 한계를 분명히 드러내어 보임이었다.

 

만약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자가 이 문제에 답을 한다면 그 답은 분명히 내세를 생각하지 않고 현세에서만 그 답을 찾으려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답과는 거리가 있을 것임에는 분명하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들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그렇게 지음을 입은 우리가 우리의 시조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그 언약을 어김으로써 죄인 된 신분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롬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롬 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렇게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난 우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죽을 자의 자리에서 살 자의 자리에 서는 복을 얻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 은혜에 빚진 자이니 마땅히 그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만 한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는 우리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이 숙고한 사도 바울은 인생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답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 일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빌 1:19)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일은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그것이 무엇일까?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신 그 존재, 바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후의 그 기쁨은 무엇과도 비길 수가 없었다. 그때의 그 소감을 성경에서는 사람을 만드신 그 여섯째 날에 ‘심히’ 좋았더라고 표현함으로써 드러내셨다. 다른 날에는 그냥 보시기에 좋았더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이 사실이 참이라는 것이 주님의 그 가르침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것은 주님께서는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하신 바로 그 말씀에서 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보다도 구원하여 살리신 우리의 그 생명보다도 귀한 것이 없다고 선언하신 말씀하심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그 위대함을 증명하셨으니, 우리가 어찌 그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할 수 있으리오! 그러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마땅한 일이요, 당연히 할 바이다. 사랑한다면 어찌 그 사랑하는 이를 기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막 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막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만 하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일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의 핵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사람, 즉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실천하는 그 일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던 것이다. 그런데 내게 원수 된 그자를 하나님께서 살리시려고 구원하실 자로 택하셨다면 그런 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사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자에게 내가 사랑을 베푸는 그 일이다. 그러하니 비록 내게는 원수 된 자라 할지라도 그를 하나님이 택하셨다면 내가 그를 미워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 일을 기꺼이 해야만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하나님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은혜의 빚을 진 우리이기에 우리가 이 땅을 사는 것은 오직 부르심을 입어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사랑하는 그 삶을 살게 될 천국에서의 그 백성 될 자로서의 마땅한 훈련을 받음이다. 천국에서의 그 삶이란 오직 사랑을 나누는 그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그 삶일 것이다.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날 동안에는 이 삶을 연습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화 과정의 그 삶이다. 그 삶을 통상적으로 칭하기를 ‘선을 행함이라 한다. 이 사실에 대해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여 가르치기를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니 이 선한 일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여 우리로 걸어가게 하신 것이라.”라고 표현했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하나님의 이 사랑에 대해 바르게 깨달은 자라면 그 이웃을 사랑함이 진실할 것이다. 이웃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 위에 군림함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섬기는 자리에 섬이다.

하루는 주의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탐하여 서로 시기하며 다투는 일이 벌어졌다.

(마 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마 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 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 20: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 20: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의 자리에 설 것을 가르치는 교훈을 하셨다. 예수의 제자라면 그 이웃을 진실로 사랑하는 자여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아직 그 사랑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마 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하나님이시니 그의 제자 된 자라면 사람이 누구이며 그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누구보다도 분명한 깨달음에 도달하여야 하는 그 삶을 살아가야 할 책임이 주어진 자들이었다.

 

훗날 그들은 주님을 대신하여 그 땅의 많은 구원받을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구원의 지도자로서 준비되어야 할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명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기에 오직 세상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채 서로 높은 자리를 탐하는 그 일에만 바쁜 자들이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역시 주님의 제자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순간의 주님의 제자들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이 땅에 사는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우리의 사는 모습이 그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 세상을 탐하는 것은 아담이 선악을 아는 열매를 탐하는 그것과 매일반이다.

 

주님의 그 가르침대로 섬김을 받는 자리에 서기를 탐하지 말고, 오히려 섬기는 자의 자리에 서려고 노력하는 자의 자리에 서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다스리는 자의 자리에 세워주신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섬기는 자의 모습만을 드러내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이 땅의 많은 지도자들은 섬기기보다는 군림하는 자세를 취하기에 너무 바쁘다. 그래서 그들 중에는 아무도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믿는 자로서 지도자의 자리에 선 자 중에서도 이런 섬김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참으로 이 시대에 우리가 당하는 비극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누구이며 이 세상을 왜 사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자라면 그는 분명히 자신에게 맡겨진 자들을 진실로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섬기는 자의 자리에 서는 그것을 기쁨으로 받을 것이다.

 

이 기쁨을 누리는 자는 진실로 복되고 행복한 자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상 지식을 통해 깨달은 그 행복이 하나님의 주시는 이 깨달음에서 얻는 그 행복과 비교가 될 수 있을까?

 

주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깨닫게 된 이 삶에 대한 깨달음은 인간이 고안해낸 철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얻어지는 그 답과는 분명히 다르다. 인간은 단순한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적인 존재이기에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야만 한다. 이 사실에 대해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그 뜻에 따라 우리가 서로를 돌보고, 선을 행하며,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그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바른 가르침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이 깨달음을 통해 얻는 그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