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30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우리아의 아내’라는 표현이 지닌 의미에 관하여”
억울한 일이란 진정으로 아무 잘못이 없는데 피해를 입어 속상하고 답답한 상황을 말한다. 이럴 때의 그 답답함이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는 이런 억울한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러면 이런 억울한 일이 하나님이 지배하는 공간 속에서도 발생한다면 납득이 되겠는가?
성경에는 이런 억울한 일들이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어, 가인의 죽음이 그러하고, 형들에게 팔려 애굽에서 노예로 살게 된 요셉의 경우가 그러하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또한, 사무엘 선지자에 의해 사울 왕을 대신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사울 왕에게 여러 번 목숨을 위협받은 다윗의 경우도 대표적인 억울한 사례이다. 그러나 이 모든 억울한 일들보다 가장 기가 막힌 억울함을 당한 이는 바로 예수이시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릴 아무런 이유도 없었지만,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무참히 그 모진 십자가형을 당했으니, 이는 인류 최대의 억울한 죽음이 되었다.
하지만 성경적 지식이 있는 자라면 예수의 그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이유와 다윗이 처한 그 억울함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한다. 아벨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도 그 죽음이 오실 메시아의 그 죽음을 예표 함인 것을 능히 이해하고 동의한다.
그런데 여기, 잘 이해가 되지 않는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아의 죽음이다.
우리아는 다윗 왕의 충직한 부하 장수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기의 주군인 다윗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그 땅에 존재한다면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아의 억울한 죽음에 관한 기사는 사무엘하 11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대개는 이 사건의 기록에 대해서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인 다윗조차도 한순간의 욕망에 그 믿음이 무너질 수 있음을 교훈하는 말씀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간다.
믿음이 좋은 다윗조차도 방심하는 순간에 사단의 그 유혹에 사로잡힐 수 있었으니 우리 역시 늘 깨어 있는 믿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한 이야기이니, 그 주인공은 당연히 다윗이고 우리아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조연 정도로 등장하는 인물로만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과연 이 우리아를 그렇게 조연 정도로만 여겨도 괜찮은 인물이었을까?
사무엘하 11장을 유심히 살피면 그 생각이 너무나도 경솔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사무엘하 10장에 기록된 대로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 아들 하눈이 왕이 되면서 시작이 되었다.
하눈의 신하들이 다윗 왕이 보낸 조문 사절을 모함함으로써 시작되었고, 결국 이 일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까지 비화하였는데, 그 전투는 해를 넘겨서까지 이어졌다.
(삼하 10:1)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삼하 10:2) 다윗이 가로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그 신복들을 명하여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복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삼하 10:3)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그 주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삼하 10:4)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복들을 잡아 그 수염 절반을 깎고 그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그 땅은 겨울이 되면 우기가 겹쳐 전투를 치르기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겨울을 넘기고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는 봄에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앞선 전투에서는 다윗이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치렀다. 이방 족속과의 전투이니 다윗이 그 전투를 이끄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시작된 전투에서는 다윗이 그 전쟁을 이끄는 대신에 요압과 그 신복들이 그 전투를 맡아 치렀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렀다. 이는 믿음의 사람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직무유기였다.
이 사건은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믿음의 직무를 한순간 망각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었기에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대단하다. 그래서 이 사건의 주인공은 다윗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삼하 11:1)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다윗이 그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을 그가 감당하지 않음이고, 이를 달리 표현하면 그가 신앙의 잠을 잠이었다. 그가 대낮에 잠을 잤다는 사실은 그가 영적으로 신앙의 잠에 취해 있음을 상징한 표현이었다.
신앙의 잠을 자면 그 순간은 사단이 능히 그를 유혹할 수 있는 기회의 순간이 된다. 삼손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가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려고 했을 그때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했었다.
(삿 14:3)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 하니
(삿 14:4)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삿 14:5) 삼손이 그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서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어린 사자가 그를 맞아 소리 지르는지라
(삿 14:6)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그러나 그가 한순간 신앙의 잠에 깊이 빠졌을 때는 사단의 앞잡이였던 들릴라의 손에 붙잡혔고 그의 머리카락은 잘려 나갔다. 그의 힘은 상실되었고 블레셋인들의 손에 붙잡히고 두 눈이 뽑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가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잠을 잤다는 것은 그의 신앙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음을 그대로 상징하여 드러낸 표현이었다.
(삿 16:19) 들릴라가 삼손으로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본즉 그 힘이 없어졌더라
(삿 16:20)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삿 16:21)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신앙의 깊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한 다윗이었으니 사단의 그 유혹은 점점 더 강하게 다가왔다. 하루가 마무리되는 그 시간인 저녁이라면 하나님께 하루를 마감하는 그 기도를 열심히 하여야 믿음의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낮잠을 실컷 잔 다윗은 기도하는 대신에 왕궁 지붕 위를 거닐었다. 사단이 어찌 그 기회를 놓치겠는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그 열매를 바라보듯이 다윗이 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아담에게 선악과 그것이 지혜롭게 하여줄 것 같고 탐스럽게 보였던 것처럼 그 여인의 목욕하는 그 육신은 능히 그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삼하 11:2) 저녁 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삼하 11:3)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삼하 11:4)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삼하 11:5) 여인이 잉태하매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하니라
탐욕은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리라”고 말함으로써 이를 경계하고 있다. 다윗의 탐욕은 그렇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성경이 이렇게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잠을 자게 되면 이 경고가 아무 효험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약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그 옛날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함락시켰을 때, 아간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물건들을 보고 탐내어 훔쳤다. 그 순간 신앙의 눈이 감겼으니 그에게서는 영적 분별력이 상실되었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의 열매를 먹음과 같이 그도 하나님이 금하신 그 물건을 탐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알았기에 바울은 늘 자기 몸을 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에 게으르지 않았다. 이는 영적인 잠을 쫓으려는 사도 바울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영적으로 참으로 탁월했던 사도 바울도 그렇게 몸부림치며 노력했는데 어찌 우리가 영적인 잠을 쫓아내는 그 일에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다윗이 자신의 간통죄를 숨기려고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급히 소환했다. 그가 치르고 있던 그 전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전투가 아니던가!
그런 전투를 치르고 있는 우리아를 소환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일을 가로막는 일이니 이 순간의 다윗은 도무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그 일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신앙의 잠을 잔다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를 다윗을 통해 똑똑히 보여 주심으로 우리에게 경계를 삼게 하셨다.
(삼하 11:6) 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삼하 11:7)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의 어떠한 것을 묻고
(삼하 11:8) 저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삼하 11:9)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 주의 신복들로 더불어 잔지라
우리아가 보잘 것 없는 조연으로서 다윗의 이 부끄러운 사건에 등장한 것이 아님이 드디어 드러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가 다윗에게 고백한 그 대답 속에 숨겨져 있었다. 우리가 그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우리아의 대답이 나오기까지의 그 배경을 살펴보고 이해해야 한다.
비열한 다윗의 그 계략에 따라 우리아는 자기의 아내 밧세바에게 가서 하룻밤을 지내라는 다윗의 명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의 간통을 감추어 숨기려는 다윗의 그 음흉한 계략일 뿐이었다.
(삼하 11:10)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우리아가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우리아는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곳 족속들을 모두 쫓아내라 하셨는데 그중에 속한 족속의 하나가 헷 족속이었고, 우리아는 그 헷 족속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헷 족속의 후손인 우리아가 이스라엘에 들어왔다는 것은, 죄인이었던 우리가 믿음의 백성이 된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바로 그 우리아와 같은 자들이다
(출 23:28)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출 23:29) 그러나 그 땅이 황무하게 되어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출 23:30)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
(출 23:31) 너의 지경을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부터 하수까지 정하고 그 땅의 거민을 네 앞에서 쫓아낼지라
(출 23:32) 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과 언약하지 말라
(출 23:33)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로 내게 범죄케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
그런 우리아가 다윗에게 대답하기를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라고 했다.
(삼하 11:11)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언약궤가 영채 가운데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막사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 불편한 천막 안에 계시는데 내가 어찌 내 집에서 아내와 더불어 편히 쉬겠는가”라는 것은 우리아의 믿음의 고백이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이라면 우리아의 이 고백이 어찌 아름다운 노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아의 이 믿음의 고백은 능히 다윗의 믿음을 부끄럽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아의 이 믿음 있는 고백은 그 순간 다윗의 믿음 없는 행동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었다. 그래서 우리아의 등장은 단순한 조연 정도로의 등장이 아니었다.
과연 우리라면 그 순간에 우리아와 같은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아의 이 믿음의 고백은 그 옛날 아벨이 하나님 앞에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린 그 믿음의 고백과도 같았다.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하지만 다윗의 그 태도는 가인의 그 뻔뻔한 변명과도 같았다.
(삼하 11:12)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오늘도 여기 있으라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 우리아가 그 날에 예루살렘에 유하니라 이튿날
(삼하 11:13) 다윗이 저를 불러서 저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 때에 저가 나가서 그 주의 신복으로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
(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다윗은 요압에게 우리아를 죽게 만들라고 지시하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우리아가 직접 들고 갔다. 어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이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메시아를 죽이라고 악을 쓰던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하니 어쩌면 우리아는 그들의 손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가신 메시아였던 주님을 예표하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삼하 11:14)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삼하 11:15)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삼하 11:16)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의 있는 줄을 아는 그곳에 우리아를 두니
(삼하 11:17)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신복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삼하 11:18) 요압이 보내어 전쟁의 모든 일을 다윗에게 고할새
(삼하 11:19) 그 사자에게 명하여 가로되 전쟁의 모든 일을 네가 왕께 고하기를 마친 후에
(삼하 11:20) 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저희가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삼하 11:21)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 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윗짝을 그 위에 던지매 저가 데벳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
(삼하 11:22) 사자가 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요압의 모든 보낸 일을 고하여
(삼하 11:23) 가로되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승하여 우리를 향하여 들로 나온고로 우리가 저희를 쳐서 성문 어귀까지 미쳤더니
(삼하 11:24) 활 쏘는 자들이 성 위에서 왕의 신복들을 향하여 쏘매 왕의 신복 중 몇사람이 죽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삼하 11:25) 다윗이 사자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그 성을 향하어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저를 담대케 하라 하니라
그런데 성경은 남편인 우리아가 죽자 그의 아내가 호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호곡은 목놓아 슬피 운다는 뜻인데 과연 밧세바가 진정으로 슬피 울었을까?
어쩌면 슬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밧세바가 온전한 슬픔에 잠겼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아의 처’라는 말에 ‘밧세바’라는 이름을 분명히 첨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밧세바’라는 이름 대신에 ‘우리아’라는 이름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녀가 진정으로 자기 남편 우리아만을 사랑했다면 다윗이 유혹했을 때 한 번쯤은 반항하는 흔적이라도 보여야 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밧세바가 다윗의 유혹에 저항했다는 기록이 없다. 더더군다나, 임신했을 때 다윗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아로부터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 일도 남이 한 것이 아닌 바로 밧세바 자신이었다.
그 당시 율법에서는 간통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으니 우리아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 여기고, 배신당한 우리아의 입장보다는 자신의 목숨에 대한 안위를 먼저 챙긴 밧세바였다. 다윗에게는 이미 왕후가 있었음에도 훗날 솔로몬이 왕이 되도록 다윗에게 압력을 행사하기도 한 밧세바였으니 적어도 그녀는 그러한 야심을 가진 여자였다.
(삼하 11:26) 우리아의 처가 그 남편 우리아의 죽었음을 듣고 호곡하니라
(삼하 11:27)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 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우리아의 등장이 다윗의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한 조연으로서의 등장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이름이 이곳에만 등장하고 사라지지 않은 점에 있다. 그의 이름은 놀랍게도 너무나도 소중한 주님의 족보 속에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주님의 족보 이야기인 마태복음 1장에서 발견된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마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 1: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 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마 1: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마 1: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마 1: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마 1: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마 1: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마 1: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마 1: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마 1: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여기서 마태는 솔로몬의 탄생을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솔로몬은 분명히 밧세바의 아들이다. 그러면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기록해야 한다. 그러나 마태는 우리아의 그 믿음의 고백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고백해야 하는 그 순간에 이 우리아의 믿음의 고백을 본받으라고 권면하려고 굳이 ‘우리아’라는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예수의 족보에는 예수의 모친인 마리아를 제외하면 모두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이다.
다말과 라합과 룻은 나름대로 믿음의 본을 보인 여인들이다. 그러나 밧세바에게서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마태는 밧세바라는 이름보다는 굳이 우리아라는 이름을 채택해서 그녀의 자리에 ‘우리아의 아내’라는 말을 넣은 것이다.
우리아의 진실하고 용기 있는 그 믿음의 고백이 우리에게서도 온전히 드러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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