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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청년 이야기

by 영동장로교회 2024. 3. 24.

2024. 3. 24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부자 청년 이야기”

 

예수께서 한 부자 청년과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가 성경에 나온다. 이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가 그들의 복음서에 모두 기록하고 있다. 흔히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4 복음서라 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이 이야기에 대한 기록이 없다.

 

세 명의 성경 저자들이 이 이야기를 자신들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요한만은 이 이야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이며, 또 세 사람이 이 이야기에 주목한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및 누가복음을 흔히 공관복음이라 한다. 공관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의 사역에 대한 그 내용, 그리고 표현 방법 및 문체 등에서 서로 매우 유사한 점을 보이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가복음의 내용 가운데 93%가 다른 두 복음서와 중복되고 있고, 마태복음은 58%, 누가복음은 41%가 중복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단지 8%만 중복되고 있기에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세 사람과는 다른 관점에서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대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이 되었다. 어쩌면 마태와 누가가 이 마가복음을 참고로 하여 자신들의 복음서를 기록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가의 그 기록이 마태와 누가의 기록에 담겼을 것이니, 그래서 마가복음의 내용 중복률이 그렇게 높게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요한복음은 이 세 복음서가 기록되고 난 후에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기록되었다. 공관복음은 예수를 직접 목격했거나, 그 이야기를 직접 들은 자들이 살아 있을 때쯤의 사람들을 위해 기록한 것인 반면에, 요한복음은 그 사람들이 죽고 그 다음 세대인 독자들에게 들려줄 요량으로 기록된 책이었다.

 

그랬으니 공관복음과는 다른 관점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기록할 필요를 느껴서 기록한 책이 요한복음이었다. 그러니 그 내용에 대한 중복률이 그렇게 낮았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왜 이 부자 청년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이 예수의 메시아 됨을 증언하려는 의도에서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그의 기록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에 반해 공관복음은 주로 예수의 생애와 그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 때문에 요한의 기록에서는 이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빠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세 사람이 언급한 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언급되기 전에 공관 복음서들은 어린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있다. 세 사람은 이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언급하기 전에 어린아이가 예수께 나아온 것을 보고 한 가지 가르침을 베푸셨다고 다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어린아이의 이야기를 언급한 후에 부자 청년의 이야기와 그리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어렵다고 하는 이야기를 이어서 하고 있다. 이런 순서로 이야기를 이어간 것은 구원의 문제를 언급하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서의 순전함을 언급함이 더 근본적인 문제가 됨을 이야기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죄를 범한 자를 순전하다 할 수 있는가!

 

오직 중생한 자만이 이 순전함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니 순전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자리에 섰음을 드러내는 징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품으라 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라는 주님의 이 가르침은 결국에는 구원에 관한 가르침이셨다. 구원은 바로 이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어린아이는 단지 예수께 나아오려고 한 것뿐이었다. 그때의 그 어린아이는 강제로 끌려와 억지로 예수 앞으로 나아온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 가까이 온 것은 그의 부모들에 의한 일이었지만 그 아이가 예수를 보았을 때는 좋아서 예수께 달려와 품에 안기려 했던 것이다.

 

예수의 품에 안기는 것을 기뻐하며 나아온 순전한 그 아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안아주고 안수하여 축복해주셨다. 마가가 이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예수께 나아오는 그 일이 순전한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그 기쁨이 되는 자만이 구원의 은혜를 누린다는 것을 알게 해주려 함이었다.

(막 10: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막 10: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막 10: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과연 시편 100편의 저자도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이 기쁨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이 기쁨이 되지 않았다면 이런 가르침을 줄 수 있었겠는가!

(시 100: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사도 바울도 주를 섬김에서 오는 그 기쁨을 온전히 깨달은 자였다. 그랬으니 빌립보 교회에 글을 써서 보낼 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는 오직 구원받은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믿음 생활에서 이 기쁨이 항상 있지 않다면 그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예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가르치실 때, 바위 위에 뿌린 씨는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으나 시험이 오면 배반할 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언제나 기쁨이 없는 자는 구원에 이르지 못할 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주안에서 늘 기쁜 자는 그것만으로도 구원받은 증거가 된다.

(눅 8: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눅 8: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

 

이 어린아이의 이야기에 이어서 나오는 것이 바로 부자 청년의 이야기이다. 이 부자 청년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부러울 만큼 믿음이 좋은 대표적인 자였다. 그러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 부자 청년이야말로 분명히 구원에 이를 자였다.

 

그런데 주님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마지막에는 그 부자 청년이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마가의 의도가 드러난다. 구원을 얻은 신앙인의 표징이 바로 이 기쁨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마태는 근심하며 갔다고 기록하였고, 누가는 심히 근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막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눅 18:23)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마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깊은 고뇌를 한 사도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이 세리로서 자기 민족의 고혈을 짠 삶을 살았으니, 사도로서 변화된 삶을 살게 된 그때는 이 죄책감에 짓눌렸을 것이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 그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기록할 때, 마가의 그 기록을 참조하여 글을 썼을 썼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심정이 반영된 그 표현을 채택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기쁘냐 슬프냐의 감정보다는 죄에 대한 근심에 당연히 무게가 실린 표현을 하였을 것이다.

 

누가는 분명히 마태와는 다른 입장에 있었다. 그는 의사로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그런 삶은 그의 글에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의사로서의 그의 직업 특성상 이성적인 냉철한 평가를 바탕으로 글을 쓰려는 그 의도가 분명했을 것이다. 그러한 결과로 누가는 그 부자 청년의 그 심정을 보다 분명하고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평가를 하려 했을 것이니, 그것이 ‘심히’라는 말이 부가된 그 표현이었던 것이리라.

 

이렇게 이 부자 청년에 대해 세 명의 사도들이 각자의 의도에 따라 언급하고 있는 것은 구원에 대한 다각적이면서, 더욱 분명하고, 명확한 개념을 정립하여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전해주고자 한 그 목적을 이루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구원은 무엇이었을까?

 

유대인들은 모세가 전하여준 그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모세는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그 계명을 지키면 그로 인해 살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그 율법을 지키는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움으로 인정받는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레 18:4)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18: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신 6:25)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유대인들이 모세의 그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했다면 그들은 최소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는 그 삶은 살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모세가 그렇게 가르친 것은 그 백성들이 최소한 성령을 훼방하는 그 죄를 막으려고 의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만약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짓는다면 그들은 도저히 구원을 얻지 못할 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하기에 최소한 이것만 막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모세는 믿었을 것이다. 그러했으니 그 백성들에게 이 계명만은 잘 지키라고 신신당부한 것이리라.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막 3: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막 3: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막 3:30)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그런데 모세의 그 의도와는 다르게 그 백성들은 오해하고, 점점 모세의 그 의도와는 다르게 모세가 가르친 그 율법의 외형에만 집착하는 형태로 그들의 신앙을 고착시켰다. 결국 율법을 잘 지켜 행함으로써 선을 이루어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 구원’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사역하시던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모두 그렇게 믿었다. 이 잘못된 구원관을 바로 잡아주어야만 한다는 그 사명으로 마가가 이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기록했고, 이어서 마태와 누가도 그들의 복음서에 이를 기록했을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사람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구원이다. 이 사실에 대해 사도 바울은 분명한 어조로 밝혔으니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라고 한 것이다.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또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 하리라"라고 하여, 구원이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했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행위 구원을 굳게 믿고 있던 유대인들의 잘못된 구원관을 바로 잡아주려는 그 의도에서 이 이야기가 기록되었다는 것은 예수님과 부자 청년 간의 대화에서 더 잘 드러난다. 부자 청년이 예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다.

(막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 18: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물음 속에는 자신이 선하다는 것에 대한 암시가 담겨있다. 만약 자신이 선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예수를 보았을 때 그 예수를 선한 자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선한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에 생각한 대로 선을 행하여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은 그 믿음에 답을 얻고 싶어 했다. 그 부자 청년도 모든 사람이 생각했던 대로 예수는 단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이었을 뿐이었다.

 

구원은 결코 선을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서는 선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에게 구원을 요구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기를 사람으로서 구원을 요구할 선을 행할 자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인간은 이미 죄 중에서 탄생하였기로 그 하는 일마다 악함뿐이다. 어쩌면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고, 그 선을 이루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교만의 일종이다.

(시 53:2)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 53:3) 각기 물러나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교만이야말로 가장 큰 악이다. 결국 이 부자 청년의 그 모습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 구원하실 자의 모습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유대인들의 눈높이에서는 그 부자 청년이야말로 마땅히 구원 얻을 자였다. 그래서 마가는 이를 교정할 목적으로 부자 청년의 이 이야기를 언급한 것이다.

(잠 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주님께서 부자 청년의 그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신 그 말씀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이다. 얼핏 이 말씀을 대하면 “예수는 선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한 오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 부자 청년의 잘못된 견해 몇 가지를 지적하여 바로잡아주시려는 그 의도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 첫 번째가 ”사람으로서는 구원받을 만한 선을 행할 자가 아무도 없는데, 어찌해서 너는 선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그리 말하느냐“였다.

 

두 번째는 ”그 구원을 베푸실 메시야가 바로 나인데, 너는 어찌 나를 알아보지 못하느냐“라는 질책이시다. 그 부자 청년은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믿고 고대하되 정치적으로 자신들을 구원해줄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고대해왔다.

 

그러니 초라한 행색의 이 예수를 메시야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를 단지 선지자 중의 한 사람 정도로만 생각했다.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오신 성자 하나님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마 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그랬으니 당연히 이 부자 청년도 예수를 랍비 중에 뛰어난 자로서 자신의 문제에 대해 답해줄 수 있는 정도로 선함에 대해 능통한 한 사람으로만 본 것이었다. 그래서 선한 선생이라 호칭한 것이다.

 

예수님을 사람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결단코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메시야를 만나지 못한다. 누구라도 예수를 만남이 없이는 결단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예수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본체를 지니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부자 청년이 구원을 사모하는데, 그 길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그래서 이 심정을 드러내신 것이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였다. 마가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록함으로써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주님의 그 심정을 잘 드러내었다. 주님의 이 마음이 우리를 향한 그 마음이라는 것을 마가는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를 단지 랍비 중의 한 사람으로만 본 부자 청년의 그 잘못된 이해와 사람으로서 선을 행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그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예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라는 것은 “네가 나를 단지 랍비 중의 한 사람으로만 보는구나, 나는 너를 구속하여 살릴 메시야다”라는 의미였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선이라는 선언이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이셨으니 자신이 바로 선이셨다. 그 선은 결국 우리를 살리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드러났다.

 

사람으로서는 그 선을 이룰 수가 없고, 그래서 구원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선을 입혀주시기에 가능할 뿐이다. 그 선을 입혀주시는 것이 ‘칭의’이다. 이 칭의에는 사람의 공로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주님의 그 십자가 공로로 대속의 은혜를 입혀주심일 뿐이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롬 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사람이 선을 행하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입혀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대한 마땅한 도리로서 책임과 의무에 해당하는 일일 뿐이다. 그러니 그 선을 행함이 결코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공로가 될 수가 없다.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래서 마태는 부자 청년이 예수께 물었을 때, 예수께서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라고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 부자 청년은 어려서부터 이 모든 것을 지켰다고 대답했다. 그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 부자 청년은 유대인이었으니, 그에게서의 율법을 준수하는 그 일은 일상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일종의 습관과 같은 일들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아무런 생각이 없이 몸에 밴 그 습관대로 사는 신앙인의 삶은 결코 구원받을 자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지금도 많은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주일이면 교회를 찾는다. 이는 지극히 신앙적 습관에 따른 행동일 뿐이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성경에 언급된 것은 이것을 경계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이 모습은 결코 구원 얻은 자의 모습이 될 수 없다. 매 순간 주님을 인식하고 주님의 그 뜻에 따르는 삶을 살려는 몸부림침이 있는지를 점검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마가의 기록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이 말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어쩌면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된 자신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소원한 마태의 그 깨달음이 마가의 기록과는 다르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이 말씀을 추가함으로써 드러난 것은 아니었을까!

 

이 말씀의 기록은 주님의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오직 이웃을 사랑하는 그 길밖에 없음에 대한 깊은 깨달을 얻은 한 사도로서의 고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이웃을 위해 복음 전하는 그 일에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마 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세상의 욕심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구원이라는 선물이 주어질 수는 없다. 천국에서 재물이라는 것이 필요하던가! 또 부자 청년에게 있던 그 권세가 천국에서 필요한 것이던가!

그러나 그 부자 청년은 이 재물의 욕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에게는 기쁨이 없었다.

 

오직 천국에서 필요한 것은 사랑하려는 그 마음이다. 사랑할 수 없는 자는 천국을 소유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주님은 그 부자 청년에게 그가 가진 재물을 모두 팔아서 그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 하신 것이다. 재물을 나누어줄 수 있는 그 마음이 이웃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다.

 

이로 보건대 주님은 분명히 그 부자 청년이 구원받아 천국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라셨음에는 틀림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순간에서는 그 부자 청년은 참된 구원에 이르는 그 길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부자 청년의 이 이야기가 바른 구원관을 갖게 해주려는 의도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은 이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주님의 가르침에서 분명해진다. 주님께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심히 어렵다고 하신 그 말씀에서이다.

(막 10: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그때 예수님과 같이 있던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부자 청년과 같이 모세의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 또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관원으로서 사회적으로 유력한 자리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었다.

 

그러니 그들의 관점에서는 그런 부자 청년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는 그런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말씀하시니 너무나도 놀라웠을 것이다.

 

이런 놀라운 사실을 어찌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과연 그때의 그 놀라움을 성경에는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막 10: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막 10: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자신들이 알고 믿었던 구원관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었으니 어찌 혼란스럽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물었다. 누가 구원을 얻겠느냐고.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했다. 사람으로서는 구원에 이를 능력이 없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 구원이라고. 이것이 ‘은혜 구원’이다.

(막 10: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막 10: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을 얻기 위해 율법 준수와 같은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담보로 하여 의롭다 함을 입어 이르게 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하기에 구원의 은혜를 입은 빚진 자로서의 당연히 할 바로써 율법의 근본정신인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선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롬 3: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롬 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이웃을 위해 선을 행하는 일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그 일은 곧 복음을 전하는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