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10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화평케 하는 자”
주님께서 팔 복의 말씀에서 일곱 번째로 하신 말씀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였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는데, 그 복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 복이라는 말씀이다.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해주는 그 일은 화평케 하는 그 일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과연 여기서 말하는 ‘화평’이란 무엇일까?
삶에서 생겨나는 근심과 걱정의 그 본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있음에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여러 가지 염려가 생겨난다. 따라서 이러한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 즉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는 그것 외에는 다른 길이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인의 자리에 선 우리일지라도 여전히 사랑하시기에 이 화해를 이루는 그 일에서도 먼저 손을 내미셨다.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심이 그러했고, 우리에게 있는 그 죄를 멸하시려고 그 독생자를 참혹한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그 일도 그러했다.
그 결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룰 수 있는 길을 얻었으니, 그래서 사도바울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화평’이라는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평화’라는 말의 의미부터 살펴야 한다. 평화는 주로 평온하고, 화목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타인과의 전쟁이나 분쟁 등 일체의 갈등이 없는 상태여야만 평화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화평이란 평화를 향한 움직임이나 활동에 방점을 두는 경우가 많으니, 즉 “화평을 청하다”나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와 같이 사용된다. 또 ‘평안’이라는 말은 내적인 안정으로서 마음의 평화를 의미하니, 개인의 심리적인 상태와 관련된 표현으로 쓰인다.
이 경우의 대표적인 예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인데, 이는 내면의 평화를 가리킴이다. 이 평안은 세상의 것과는 다른 차원의 평안임은 물론이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러한 의미의 차이를 이해해야 주님께서 하신 팔 복의 말씀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화평이라는 말이 평화를 향한 움직임이나 활동에 방점을 둔다고 했으니, 주님의 이 말씀도 과연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는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그들의 마음에 평화를 심어주는 일을 한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에 평화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자들은 왜 복음을 전해야 하며, 그들에게 전해진 그 복음이 어떻게 그들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게 되는 것일까?
제자들이 복음을 전한 것은 그들이 주님에게 빚진 자 됨에 대한 바른 인식과 그 깨달음에 따른 결과로서의 행함이었다. 사도바울은 이 빚에 대한 깊은 깨달음에 이른 자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전도해야 할 그 모든 자들에 대해 빚을 진 자라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우리가 구원에 이른 것이, 어디 우리가 구원 얻을 만한 공로가 있어서 얻은 것이던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가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이 우리에게서의 빚이다. 죄인된 자는 그 영혼이 죄로 인해 죽어있었고, 그래서 자력으로는 도무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그 자리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그때 이미 죄인 중에 있을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리고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할 당신의 독생자를 하나님의 본체 안에서 출생하셨다. 이는 영원에서 하신 일이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스스로 삼위 되신 것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살리시려는 당신의 그 크신 사랑을 드러내심이셨다. 우리를 위해 스스로 삼위 되어주신 하나님의 이 놀랍고 위대한 사랑을 우리가 감히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삼위 되신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사는 은혜를 입게 되니, 그것은 삼위 중의 하나이신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영혼이 중생한 그 일이었다. 중생함을 입었기에 비로소 우리가 죄인됨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죄를 고백하는 회개를 이룰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런고로 회개하는 이 일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일뿐이다. 우리가 회개했다고 해서 회개한 그 일이 결코 우리가 구원을 얻는 그 일에 대한 공로가 될 수는 없다. 회개한 그 자체도 하나님 앞에 우리가 빚을 지는 일이 될 뿐이다.
이것 자체로도 빚인데, 그 회개를 근거로 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시는 그 ‘칭의’를 선고하시는 은혜까지 더하셨다. 그런데 이 일도 오직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을 담보로 한 칭의였으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입은 이 일도 오로지 주님에게 빚지는 그 일이 될 뿐이다.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 그 일도 황송한 일이겠거늘 그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시는 ‘수양’의 은혜를 입히신 것은 죄인으로서야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런데도 그 감사를 깊이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 새사람이라 말할 수가 있겠는가!
모세와 사도바울은 이와 같은 큰 은혜에 대해 깊이 깨달은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빚을 갚으려고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주께서 사랑하시는 이 선택된 백성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고, 또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도 목숨을 걸 수 있었다.
주님의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순교를 당하는 비참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 은혜의 그 빚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더라면 과연 그들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사도 요한만이 순교 당하는 그 일을 면했지만 그가 복음을 위해 당한 그 고난은 순교의 그 고통보다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그 땅에서 살면서 주님의 그 사랑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그 일에 매달렸으니 어쩌면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요한에게 맡기신 사명이 바로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롬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롬 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제자들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는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이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자신이 죄인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이에서 점점 나아가 마음이 청결한 자의 상태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때는 드디어 외부로 드러나는 ‘행동함’의 단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 일이 바로 화평케 하는 그 일이다. 화평케 하는 이 일은 복음을 전하는 그 일로 구체화되어 드러난다.
화평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런고로 사랑이 없으면 화평케 하는 그 일은 불가하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새사람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였으니, 그 속에는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이 온전히 자리하고 있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사랑이 생겼으니 어찌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미루겠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화평’은 단순히 물리적인 싸움이나 대립이 없는 상태를 넘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어 진정한 평화를 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세상에서 말하는 화평과는 다르다.
세상에서 말하는 화평은 주로 사람들 사이의 조화로운 상태나 전쟁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가리키니, 이는 종종 일시적이고 외적인 조건에 의존할 뿐이니 주님이 주시는 영속적인 화평과는 다르게 영속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
성경적 화평은 하나님의 성품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하나님과의 화평’, ‘나에게서의 화평’, '이웃과의 화평’의 세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님과의 화평은 가장 본원적인 화평이다. 우리가 소망하는 그 궁극적인 화평이 바로 이 화평이다. 훗날 천국에서 누릴 우리의 삶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회개함을 통해 의롭다고 칭의함을 받은 자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화평은 성령의 열매이기에 화평한 자라면 그는 이미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순간의 그는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이 세상 욕심에서 행하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그 영광만을 위하는 그 일이다. 하나님의 그 영광만을 구하는 그가 자신의 구원에만 욕심을 가질 수 있을까?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모세는 비록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하는 그 모습을 보였다. 사도바울도 모세와 같은 그 심정으로 자기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다.
이는 오직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참된 화평을 선물로 얻은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기도였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은혜를 입었다면 당연히 모세와 같이, 바울같이 그렇게 이웃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롬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롬 9:2) [1절과 같음]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화평은 나에게서의 화평이다. 이 화평은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음에서 얻어지는 그 화평이다. 내 마음에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그것으로 이루어진다.
(요 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주님이 붙잡히시던 그 날에 제자들이 모두 달아난 것은, 그들 속에 참된 평화가 없음 때문이었다. 참된 평화가 없었기에 그들은 모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달아난 것이었다. 주님은 분명히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 속에는 세상 욕심만이 가득했을 뿐 주님을 그 마음에 모시고자 하는 의지는 없었다. 주님을 자기 마음 안에 모시는 그 일은 그들의 능력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훗날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졌을 때 그들은 담대해졌고, 그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가 있었다. 내 안에 평안을 누리는 이 일도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일 뿐이다. 우리는 다만 그리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뿐이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딤후 2: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벧전 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마지막으로 생각할 화평은 이웃과의 화평이다. 이는 주님의 은혜로 그 마음에 화평을 이룬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롬 14: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히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약 3: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이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니, 이를 바르게 알도록 알리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이다. 우리의 사명이 이웃으로 하여금 이 복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의 내면에 항구적인 평안이 자리 잡도록 하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도 화평을 추구하는 일이 이루어지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는 모두 복음으로 인한 효과들이다.
이에 비해, 세상의 화평은 대체로 사회적, 정치적, 혹은 경제적 안정과 같은 외적인 요소에 초점을 맞추며, 이는 때때로 변할 수 있는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 따라서 이러한 화평은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불안함을 항상 지니고 있어 성경적 화평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참 평화란 오직 복음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니 더 깊은 차원에서 변하지 않는 평화를 추구하는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인 그 복음만을 통해서 완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은혜받은 자라면 주님의 제자들처럼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당연히 감당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복음 전하는 이 일을 감당하려면 내가 먼저 화평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남도 화평케 할 수 있다. 그것이 참인 것은 주님의 하신 그 일로써 증명된다. 주님은 능히 스스로 화평케 하는 힘을 지니셨기에 제자들을 화평케 하는 자의 자리에 세우실 수 있었고, 또 그리하셨다.
제자들 또한 화평케 하는 자가 되었기에 그 화평을 전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한 결과로써 우리 역시 화평케 하는 자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이 당연하기에 우리 또한 이 화평케 함을 이웃에 전하여야 한다.
복음을 전해 받았고, 그 복음의 의미를 깨달아 평화를 누리는 자가 되었으니 복음에 빚진 자로서 이웃을 위해 그들에게 화평케 할 그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것이 그래서 우리의 사명이 되었다.
(엡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만약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어찌 될까?
거저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빚이라 생각해야 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주님께서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명령하셨다. 우리는 분명히 은혜를 입은 자이기에 의로운 자이다. 의로운 자라면 당연히 받은 은혜에 대한 빚 갚음을 해야만 한다. 이것이 복음을 빚진 자로서의 당연한 도리이다.
(마 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집행에 대한 결과물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공의로우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공의롭다고 할 수 없다. 공의롭지 않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니, 그는 공의로우시고 따라서 악을 반드시 심판하셔야만 한다. 그래서 죄를 벌하셔야 하기에 그는 죄인인 우리의 죄를 간과하실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심판하시되 우리 죄를 대신 질 대속자로서의 한 인물을 지명하시니 그가 성자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이신 예수였다.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공의는 실현되었고, 그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져 화평케 됨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화평케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온전히 이루어질 그 평화에 대한 근원이 된다.
그래서 복음이란 우리의 마음에 참된 평화를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이 주시는 그 평화를 이루게 하는 일로서 이 복음만이 진실로 이 땅을 화평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된다.
(사 32:17)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사 60:17) 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이와 같은 일이 이루어질 것에 대해서는 구약에 이미 암시가 되고 있었으니 그것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그 뜻이 드러난 바로 그것들이었다.
(겔 34:25)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겔 37:26)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나훔 1: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슥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말 2:6)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그런데 우리가 복음 전하는 이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에게 있는 그 평화가 거짓이라는 증거의 드러남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진실한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은 반드시 외형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반대로 그 사랑이 거짓이라면 분명히 사랑하지 않는 그 모습이 드러난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참사랑이 회복되었다면 우리에게는 참되게 화평케 하는 그 일을 함이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화평케 하는 그 일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그 사랑은 거짓일 것이고, 그 사랑이 거짓이라면 우리가 구원 얻은 자의 반열에 선 그 일 자체도 거짓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참되게 “복 있는 자”가 될 수 있겠는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그 복을 얻음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화평케 하는 그 일, 즉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그는 참되게 구원받은 자의 자리에 서지 못한 자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자에게서는 애초에 참된 회개란 것도 있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칭의됨도 아예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은 영원한 죽음에 이를 자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니, 세상에서 이런 자보다 불행한 자가 또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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