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25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에스겔의 마른 뼈의 환상에 관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사랑의 우교를 나누시려고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본원이시기에 사랑하셔야만 한다. 홀로 하나님으로 계신다면 이 사랑이 이루어지겠는가?
그러므로 사랑은 반드시 그 대상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람을 만드셨다. 사람을 만드시기 전의 육일간의 창조 사역은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지으신 일들이었다.
산모가 아기를 낳기 전에 미리 그 아기를 위해 온갖 것들을 준비하는 것은 그 아기를 사랑하기 때문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그러한 사역들은 모두 그 만드실 사람, 즉 아담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행하신 일들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아담을 사랑하셨다, 그러면 아담은 과연 그런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였을까?
아담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알지 못했고,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위한 그 선택을 했다. 하나님과 진실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그 일에 실패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사랑의 교재를 나누는 그 일이 실패하자 화가 나서 아담을 그 에덴동산에서 나가라 하셨을까? 아담이 미워져서 그리하신 것이었을까?
아담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아담일지라도 그를 한순간이라도 미워하신 적이 없으셨다. 만약 미워하셨다면 아담을 그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는 조치를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아담이 추방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분명히 생명나무 과실도 따 먹었을 것이다.
그 생명나무 과실을 먹었다는 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자가 됨을 의미한다. 죄인된 아담이 그 땅에서 죽지 않고 산다면 그가 지을 죄는 아마도 태산 보다도 높고, 오대양 바닷물보다 많아질 것이었다. 그리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저주가 아닌가!
하나님께서 그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그가 다시 에덴으로 돌아올 수 있는 그 길목을 지키게 하신 것은 그를 여전히 사랑하셔서 영원히 죄짓는 그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막으심이었다.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죄인인 아담을 끝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이 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그 땅의 한 족속 이스라엘을 통해 보이셨다. 그에 대한 기록 중의 하나가 바로 에스겔서이다.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것은 그들의 선행이나 무슨 공로 때문이 아니었다. 그 땅의 모든 족속들이 다 죄인이어서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요구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심으로써 당신의 그 사랑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그런 뜻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관계에 들어갔어야만 했다. 이치를 아는 자라면 그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시 이 땅에 있는 많은 죄인들 중의 한 족속일 뿐이었으니 죄인된 자로서야 어찌 그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이 그 사실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아신다.
그러므로 스스로 알 수 없는 그들을 위해 그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 즉 선지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보내어서 알려 주셨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능히 증명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그 사랑은 모세로 하여금 그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도록 보내심을 입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는 그들을 구해내시려고 모세를 보내시는 그 일을 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그 모세를 통해 나와 사랑을 나누자고 이스라엘에게 애원하셨다. 우리라면 그런 엄청난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출애굽 시켜주신 그 일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참되게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였노라고 말한 기록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때의 하나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그 심정이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거두어버리지 않으셨다. 더 끈질기게 그들을 붙드시고 돌아오라고 애원하셨다.
끝내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그 땅의 우상을 사랑하는 그 지경에 이른 때에는 급기야 이방 족속을 들어 매로 사용하셨다. 그러나 그리하실지라도 그 일을 느닷없이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었다. 충분히 그들에게 기회를 주셨다.
사랑하는 아들을 훈육하기 위해서 매를 드는 아비의 그 심정이 어떠할까? 어쩔 수 없는 그 순간에 유일한 수단으로서 드는 매이니 될 수 있으면 그 매를 드는 시간을 지연하고 싶은 것이 그때의 하나님 그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에서 드러난 조치가 남쪽 유다를 바벨론이라는 이방 나라를 매로 사용하시기 전에 에스겔 선지자를 보내심이었다. 에스겔 선지자는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외친 선지자였다.
(겔 2:1)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겔 2:2) 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겔 2: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겔 2:4)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겔 2:5)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
(겔 2:6)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지어다
(겔 2:7)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그들이 에스겔 선지자의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하나님의 그 간절한 마음을 읽었더라면 그들은 돌아왔을 것이고,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일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가 죄인이 아니던가!
그들은 죄인이었기에 하나님의 그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다. 죄인은 영적으로 죽어있음이니 그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능력이 없다.
성령의 은혜로 중생함을 입었을 때, 비로소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게 된다. 들을 능력이 없는 죄인 상태에 있었던 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신 것은 쓸데가 없는 그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무의미한 그 일을 하신 것일까?
들을 능력이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신 이유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막 숨을 거둔 그 순간, “아, 이미 죽었구나!” 하고 바로 묻어버리겠는가?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애를 쓰며 매달리지 않는가? 하나님의 심정도 그러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만약 하나님께서 그리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이 훗날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어찌 그런 우리를 버려두고 바라만 보셨나이까? 그리하시고도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실 수가 있습니까?“하고 따지며 변명할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돌아올 기회를 주셨으니 어찌 이스라엘이 그렇게 핑계를 댈 수가 있겠는가!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던 그 날에도 에스겔 선지자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외면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구원 얻지 못할 자들의 삶은 모두 그와 같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한 번 정하신 것을 결코 변개치 않으시는 속성을 지니고 계시니, 그 사랑도 그 속성에 위배 될 리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사랑은 떠나간 이스라엘에게도 여전히 유효했다. 사로잡혀간 그들을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도록 해서 그 사랑을 이루시겠다는 그 의지를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밝히시니, 그것이 마른 뼈들에 관한 환상 이야기였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마른 뼈들을 보여주셨다. 그 뼈들이 골짜기에 가득했다. 뼈들이 골짜기에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챙겨 봐주지 않는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정상적인 죽음이라면 후손들이 무덤을 만들고 그곳에 넣어둔다. 그래서 외부에 노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런데 에스겔 선지자가 본 뼈들은 골짜기에 버려진 것과 같은 상태이니 이는 누구에게도 관심받을 수 없는 가장 불쌍한 죽음에 놓여 있음이다. 이 뼈들은 우상을 섬김으로써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있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니, 우상 숭배야말로 가장 불쌍한 일인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비록 육신이 살아있다 할지라도 죽어있는 존재일 뿐이다. 그 이스라엘이 그랬으니 그들이 뼈들로 에스겔 선지자의 환상에 보여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 뼈들이 아주 말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주 말랐다는 것은 도무지 어찌해 볼 수가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이 땅의 어떤 수단이나 방법으로는 도무지 살릴 수 없는 그 지경에 이른 상태를 말한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심령을 살리는 그 일은 세상에서 사람의 재주로는 불가능하다. 그 불가능한 일이 에스겔 선지자의 눈앞에서 일어났으니, 결국 그는 이 마른 뼈가 살아서 극히 큰 군대가 되는 환상을 보게 된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중생하시는 은혜가 임하는 것 외에는 있을 수가 없다. 사람이 아무리 고행을 하고, 득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이 중생함을 이루지는 못한다. 중생함이 없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그 일은 불가능하다.
(겔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 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에스겔 선지자가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라는 하나님의 물으심에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은 중생하는 그 일이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그 고백이었다.
(겔 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과연 그 뼈들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게 될 때 그것들이 살아났다.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지으신 후에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그가 산 자가 된 것처럼 심령이 죽어있는 죄인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게 하는 것은 성령에 의한 제 2의 창조행위이다. 이로써 죄인이 새 심령을 지닌 자로 새롭게 태어나니 이것이 중생함이다. 중생함을 입었을 때 비로소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진실한 회개에 이름으로써 하나님의 양자된 자리에 설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게 된다.
(겔 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 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이렇게 될 때 하나님과의 사랑을 이룰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와 사랑을 나누시기를 원하시기에 우리에게 중생하는 은혜를 입혀주신다. 이렇게 중생한 자는 드디어 하나님을 아는 그 자리에 설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는 그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셨다. 훗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남을 입었고, 그래서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자리에 섰다.
(라 3:4)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라 3:5)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즐거이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라 3:6) 칠월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 때에 여호와의 전 지대는 오히려 놓지 못한지라
(라 3:7)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조서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수운하게 하였더라
(라 3:8)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이른지 이년 이월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시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역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전 역사를 감독하게 하매
(라 3:9) 이에 예수아와 그 아들들과 그 형제들과 갓미엘과 그 아들들과 유다 자손과 헤나닷 자손과 그 형제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전 공장을 감독하니라
(라 3:10) 건축자가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라 3:11)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라 3: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라 3:13)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선지자들의 그 말씀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게 된 그때 그 이스라엘은 또다시 그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이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도 늘 말씀과 함께하는 그 삶을 게을리하면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경종을 울리려고 이스라엘의 이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한 것이리라.
뼈들이 생기를 얻어 산 자가 되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직접 하지 않으시고 에스겔 선지자에게 맡기셨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귀찮거나 하기 싫어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맡기신 것일까?
(겔 37: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 37: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겔 37: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겔 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겔 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마른 뼈가 생기를 얻어 산 자가 되는 이 일은 참으로 엄청난 일이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이 일을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감당하게 하신 것은 그에게 공로를 세울 기회를 주심이었고,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상급을 베푸시고자 하심이었다.
(겔 3:16) 칠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3: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겔 3: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겔 3: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겔 3:20)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겔 3:21)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상급을 베푸시기를 애를 쓰시는 것은 당신께서 그를 끔찍이 사랑하고 계심의 온전한 드러남이다.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된 자를 부르시는 그 일을 바로 우리에게 맡기셨으니, 이로써 하나님의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이 분명히 드러났다.
구원 얻기로 선택된 자는 어찌하든지 결국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된다. 그렇게 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굳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에게 상급을 주실 구실을 만들고자 하심이었다. 에스겔 선지자에게 영혼을 보존케 할 그 상을 베푸시려 하신 것은 우리에게 상급을 베푸실 그것에 대한 예표였다.
사나 죽으니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애를 쓰는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노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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