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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소리로 죽은 나사로를 불러내신 예수

by 영동장로교회 2023. 1. 8.

2023. 1. 8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큰 소리로 죽은 나사로를 불러내신 예수“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사랑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나사로가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예수에게 도착했다. 그렇지만 예수는 이 병이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하고 나서 그곳에서 이틀이나 시간을 더 보냈다.

(요 11: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

(요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요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 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요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요 11: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요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요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요 11: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사랑하는 사람이 위중하다고 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틀이나 더 시간을 끌었다. 예수의 이 행동은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사로를 사랑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이 사실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결국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으니 예수께서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일부러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한 것이었던가? 

(요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요 11: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왜 예수는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그렇게 죽은 나사로를 왜 또 다시 살리는 그 일을 한 것인가? 

 

자신이 능히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능력자라는 것을 드러낼 심산이었더라면 애초에 그 죽을병을 치료해서 그가 죽지 않게 함으로써도 자신의 능력자 됨을 과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상가에 와서 조문하던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이는 예수가 그때서야 온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소경의 눈도 뜨게 한 능력자인 예수가 나사로도 죽지 않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요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요 11: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병자를 죽지 않게 하는 것보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더 큰 능력을 드러내어 보이는 일이기에 더 큰 능력을 보여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하려고 한 것이었을까? 

예수의 의도는 정말 그런 것이었을까?

 

유대 족속들은 오래 전부터 메시야를 고대해 왔다. 그들이 이국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그 때에 그들은 자신을 구원할 메시야가 반드시 오시리라고 믿었다. 

 

예수가 탄생하던 때에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겠다고 했을 때 헤롯왕이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냐고 물었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모두 대답하기를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신다고 답하였다. 

 

그들은 이미 메시야가 오실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고대한 메시야는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줄 위대한 사람으로서의 이적을 행하는 메시야였다. 

(마 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마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 2: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마 2: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마 2: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마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요 7: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요 7:41)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요 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요 7:43)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들이 고대한 메시야는 그 옛날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와 에스겔 선지자와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그 성경에 기초하고 있었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 메시야를 다윗이라는 ‘사람’으로 말하였으니 그들은 그 메시야가 사람일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요 7:31)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사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사 9: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사 9:4)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사 9: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겔 34:22) 그러므로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않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겔 34: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단 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단 7: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렘 2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렘 23:2)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3:3) 내가 내 양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렘 23: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렘 23: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렘 23: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렘 23:8)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방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거하리라 하시니라

 

미가 선지자는 그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분명히 예언하였으니 이스라엘 족속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위대한 사람으로서의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믿음 때문에 그들은 그 메시야가 하나님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예수께서 사역하시던 당시의 이스라엘 족속들은 그때 당시 로마의 식민지 통치를 당하고 있었고, 그 이전에는 바벨론에서와 같은 이방인들의 포로 생활을 오랫동안 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자연스럽게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메시야를 대망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하나님의 성육신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예수께서 이적을 베푸실 때에 그들은 그들이 고대한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서의 메시야가 드디어 그 땅에 오셨다고 환호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던 날에는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했다. 

 

자신들이 고대했던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이 사람 예수가 드디어 왕으로 등극하려고 오신 것이구나, 이제는 우리가 로마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그 옛날 다윗왕의 그 찬란했던 시대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구나하고 생각하며 환호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바로 잡아주셔야만 했다. 그리하는 것이 그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였기 때문이었다.

(마 21: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마 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마 21: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註) 호산나 (hosanna) :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의 뜻을 가진,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믿고 있었던 대로 그 메시야가 초월적인 능력을 가졌을지라도 사람이라면 과연 그는 참 메시야가 될 수 있을까?

 

유대인들이 이처럼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인 메시야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는 그들의 유일신 개념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일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의 이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이를 믿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유일신 개념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주장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중한 죄라고 생각했다.

(마 26:63)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마 26:6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마 26: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마 26:66)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요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 10: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요 10: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요 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배척하고 그를 메시야로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들의 구속을 위해 세상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그 당시 예수께서는 이들의 이 사상을 바르게 잡아주는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메시야됨을 증거하는 그 일을 행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나사로를 죽음에 이르도록 버려두실 수밖에 없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하셔야 했다.

 

사람으로서는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없다. 죽음이라는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행위언약을 어김으로써 생겨난 것이기에 사람 편에서는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 일은 오직 그것을 죄로 여기시고 그 값을 정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롬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롬 6: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롬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따라서 죽음에서 다시 삶을 얻게 하는 그 일을 행하신 자는 분명히 하나님이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스스로 그 죽은 자를 살려내심으로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이시고, 그리하심으로 스스로 메시야 되심을 증명해보이시려고 하셨다. 그러므로 나사로는 반드시 죽어야만했고 그 죽은 자를 살리는 그 일을 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하셨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아는 그 메시야가 올 때 어디서 오는지를 아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사상은 중간기 시대에 나온 계시문학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런데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요 7: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그 땅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 땅에 오신 예수의 눈에는 그런 오해로 인해 구원에 이르지 못할 그들이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해 보였을까! 

 

그래서 그 어리석음을 뚫고 나와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는 그 마음에서 죽은 나사로를 불러내심으로 자신이 메시야 됨을 보이셨다.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함으로써 믿어 구원에 이를 수 있게 하려하신 것이다. 이는 그들의 구원 얻음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도 이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며, 또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도록 준비된 일이라고 언급했다.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그렇다면 이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준비된 일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또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란 어떤 의미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함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그 고백과 함께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리는 그 일이다. 그러면 나사로의 이 죽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

 

죽는다는 것은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지는 그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종국에 우리 모두를 다시 살리실 것이니, 이는 곧 우리에게 참된 희망을 주시는 그 일이 됨이다. 참된 희망이란 우리가 다시 살되, 고통과 근심과 걱정 대신에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얻는 온전한 기쁨과 희락이 주어지는 삶에 대한 그 희망이다. 이는 천국에서의 그 삶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남은 참된 희망이 실현될 그 일이 참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바르게 깨달았을 때 어찌 그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함이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니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그 일은 정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일이 됨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는 그 일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하나님이 그 본체에서는 한분이신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부하나님이 영광 받으심은 곧 성자하나님이 영광 받으심이다.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은 서로 따로 존재하는, 즉 구분되심이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단지 그 사역에서만 구별되실 뿐이지 그 본질상 한 분이시다. 즉 한 본체이시기에 성부하나님이 영광 받으심은 곧 성자하나님이 영광 받으심이 됨이다. 

 

 

메시야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아담이 행위언약을 위반함으로써 도래한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사람이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그 일을 능히 하실 수 있으시다.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능히 이 일을 하실 수 있으신 자이심을 스스로 선포하셨으니 이것이 곧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였다. 

 

그러나 그 순간의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그래서 믿지 못했다. 예수를 믿고 따르던 마르다 조차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활의 주인 되시는 예수가 하나님이신 줄을 알지 못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심으로 부활의 주인 되심을 보이심으로 스스로 메시야이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어 보이셨다. 사랑하는 자들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온전히 드러나 보인 그 순간이었다.

(요 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요 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 11: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요 11: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요 11: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요 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요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요 11: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요 11: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요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요 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요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요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요 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요 11: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신앙이란 지식과 확신과 찬동을 그 요소로 하고 있다. 신앙, 곧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메시야임을 바르게 아는 그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고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됨을 그들에게 보이셔야만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죽은 그를 살리셔야만 했다. 이것을 제자들이 보고 예수야말로 자신들이 고대했던 그 메시야임을 보아 아는 그 일을 경험해야만했다. 눈으로 직접 본 그 일은 들어서 아는 그 지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은혜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베푸시려고 그리하신 일이었다. 

 

제자들은 그 일을 경험함으로써 자신들이 따르던 그 선생의 메시야됨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확신은 예수가 참된 메시야임에 대한 찬동으로 이어지게 했고, 그들의 신앙을 더욱 견고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제자들의 신앙은 자라갔다. 

 

신앙은 한 순간에 완성되는 일이 아니다. 성령의 은혜로 매 순간마다 자라가는 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신앙에는 반드시 ‘성화’라는 것이 동반한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성도는 반드시 이 성령이 주시는 은혜인 성화를 이루어감으로써 그의 신앙을 성숙시켜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메시야를 직접 경험함으로써 메시야를 아는 참된 지식에 이르러 구원하는 참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그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기까지 애끓는 그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참아내시며 기다리신 뒤에 드디어 그가 장사된 무덤 앞에서 큰 소리로 불러내신 이 일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크신 것인지를 직접 보여주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사복음서에서 오직 요한만이 이 사건을 그의 복음서에 언급하여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야말로 참된 메시야라는 것을 증언하고 싶은 그 의도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인성을 취하셨기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스스로 갇히셨다. 그래서 그때 그 시간 속에서 정해진 그 공간, 즉 유대 땅 그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놀라운 그 이적을 베푸심으로 스스로 메시야이심을 그들 앞에 직접 드러내어 보이셨던 것이다. 

 

그 죽은 나사로를 불러내신 그 순간에도 예수는 조용히 나사로를 불러내신 것이 아니라 큰 소리로 불러내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사로의 무덤 앞에 모인 그들의 귀가 어둡기 때문에 잘 들리게 하려고 그리하신 것이 아니었다. 죽은 나사로로 하여금 듣게 하여 살리시려고 큰 소리로 외치신 것도 아니었다. 메시야이심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 이스라엘이 안타까워 그들이 듣고 깨달아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려는 그 간절한 마음으로 외치신 그 소리가 그렇게도 컸던 것이다. 

그들을 살리시고자하는 그 사랑의 열망이 얼마나 컸으면 그같이 외치셨을까!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은 그는 이스라엘만의 메시야가 아니시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를 위한 메시야였다. 이스라엘의 메시야인 것처럼 보인 것은 모든 민족의 메시야 되실 것에 대한 실증적 예를 보이심이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 사랑에서 우러나온 주님의 그 안타까운 외침이 오늘 우리에게도 들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