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모세의 얼굴을 두른 수건”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을 얻어가지고 내려오던 모세가 그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이를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하나님이라 하여 받들며 그 앞에서 춤추는 것을 목격하였다.
(출 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출 32: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출 32: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그의 거룩한 분노는 급기야 그 돌판을 던져 부셔버리게 했다. 그의 분노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그 분노를 대신한 것이었다. 그날에 그 죄를 범한 자들은 이스라엘 중에서 구별되었고, 레위지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 일은 내재하여 이스라엘의 성화를 방해하는 그 죄악을 제거함이었다.
(출 32:17) 여호수아가 백성의 떠듦을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 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출 32:18) 모세가 가로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나의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출 32: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출 32:26)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출 32: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출 32: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그리고 모세는 그 남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다시 은혜를 구했고, 하나님은 그런 모세의 간구를 들으시고 다시 계명을 주실 마음을 품으셨다.
(출 32:31)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출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
두 번째 돌판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어 내려오던 날 모세의 모습에 변화가 생겨났다. 산으로 올라갈 때까지는 없었던 광채가 산에서 내려온 그의 얼굴에 드러난 것이다.
왜 그의 얼굴에 이 같은 광채가 났으며, 이 현상은 또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을까?
(출 34: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얼굴에서 광채가 나고 있는 그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했다.
왜 이들은 두려워했을까?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막연한 두려움을 본능처럼 느낀다. 그 옛날 원시시대에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리는 것에 대해 그 당시 사람들은 공포스러워했을 것이다. 지금도 어린 아이들은 여름날에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리면 겁을 먹는다.
이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다. 벼락은 정전기의 한 현상이며, 천둥은 그 벼락에 의한 공기층에서의 갑작스런 고온팽창에 따른 폭발현상이라는 것을 지식한 자들은 비록 그 벼락은 피할지라도 결코 그 벼락이나 천둥소리에 놀라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모세를 두려워한 것은 그 모세의 얼굴꺼풀에서 광채가 난 그 이유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함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그 의도를 여전히 깨닫지 못한 신앙적으로 어린 자들이었다. 그래서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난 것은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했다.
에녹이 그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더니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을 받았다.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음을 말함이다. 그가 그와 같은 은혜를 입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이었으되, 그 은혜로 인하여 그는 그 땅을 살 때에 이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셨다’고 했고, 신약 히브리서에서는 ‘옮기웠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70인역에 따른 번역의 상이일 뿐이다. '옮기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테데켄'은 '변화하다'라는 뜻을 갖는 동사 '메타티데미'의 단순 과거 수동형으로서 '바뀌다', '변화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표현은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몸이 변화되어 하늘로 올리움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사건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그 비밀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음이다.
에녹은 그 땅을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그 섭리를 성령의 은혜로 바르게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참으로 죄인된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도무지 구원받을 길이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한 자의 자리에 섰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고, 그런 그를 의롭다하셨을 것이다.
이런 그의 삶은 하나님의 데려가심을 얻어 영생을 결과하는 삶을 이룬 것이다. 이보다 더 크고 귀한 선물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에녹의 신앙적 삶이 우리에게는 귀한 모범이 되는 것을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에게도 매우 귀중한 신앙적 교훈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 이야기를 창세기에 기록토록 하셨을 것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그 백성들에게 전하여 주었을 때 에녹의 이 이야기도 분명히 들려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심은 이 백성들이 참된 믿음에 대해 눈을 뜨고, 그래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온전한 신앙적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백성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그 마음을 품으심이었을 것이다.
에녹이 참된 믿음의 삶을 살았고, 그래서 그 몸이 변형되어 하나님께 들림을 받는 그 구원을 이룬 것에 대해 이스라엘백성들은 단지 옛날이야기의 하나정도로 여기고 흘려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들은 신앙이 아니라 본 신앙이 되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이 견고해지게 하시려고 모세의 얼굴을 변형하사 광채가 나게 하셨을 것이다.
욥이 그의 믿음이 견고해지던 그날에 “내가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주를 눈으로 직접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욥의 그 고백처럼 이스라엘 또한 그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그때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 그 순간은 그들의 신앙적 어리석음이 빗어낸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온전하게 구원의 그 비밀을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그들의 믿음의 수준에 맞추려하심이었다.
초등학생에게 ‘1-2‘의 문제를 내는 것은 그들의 수준을 넘는 일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잘못 출제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면 이 문제는 그 답이 ‘–1’로서 합당한 수준의 문제가 되어 알맞은 출제로 된다.
자연수가 정수의 부분집합임과 마찬가지로 율법은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신 주님의 그 가르침의 부분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율법언약은 은혜언약의 최소한이다.
신앙적으로 미숙한 그 이스라엘을 가르치시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최소한인 그 율법을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얻어온 그 모세는 성령하나님을 통한 말씀의 깨달음을 얻은 자라 할 것이다. 구원에 관한 그 비밀을 성령하나님을 통해 깨달은 자로서 모세는 자신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어찌 그 순간의 자신을 의로운 자라 할 수 있었을까! 또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했던 그 옛날 그 일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도 능히 깨달았을 것이다.
(출 2: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출 2:12)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출 2: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출 2:14)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 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무지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자신에 대한 깨달음도 얻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당연히 죄인으로써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함을 고백하는 그 회개를 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였기에 에녹을 기뻐하신 하나님이 모세 또한 기뻐하셨을 것이다. 에녹이 변화된 몸으로 하나님의 데려가심을 입었던 것처럼 그 순간에 모세도 변화를 입었으니, 그것이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남이었다.
자신의 죄인임에 대한 철저한 그 깨달음과 그로 인한 진실한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는 열쇠가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자라면 참된 겸손과 순종을 이루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모세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참된 순종을 이룸으로써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다. 그는 참되게 그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한 자의 자리에 섰다. 그가 두 번째 십계명이 새겨진 두 번째 돌판을 들고 내려와 그 백성 앞에 섬이 그의 그 백성을 향한 사랑이 온전하게 드러난 그 순간이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순종이 드러나고 그 백성을 향한 그 사랑이 온전하여진 그때는 하나님이 에녹을 부르실 때의 그 순간과도 같은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하였기에 에녹이 변화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과 같이 모세도 변형되었으니 그 얼굴에 광채가 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출 34: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출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그러나 에녹과는 달리 그 순간의 모세는 아직 그 백성을 위해 봉사할 일,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과업이 여전히 남아 있으므로 그 땅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세의 그 변형은 주님이 변화산에서 그 형체가 변형되시는 그 일의 예표가 되었다.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눅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눅 9: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눅 9: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눅 9: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눅 9: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눅 9: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그 날에는 우리의 형상이 그렇게 거룩하여질 것을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변형된 얼굴에서의 광채로 살짝 보이시더니 종국에는 주님의 변화산에서의 그 변형된 모습으로 확정적으로 보이셨다.
죄인임에 대한 인식과 회개가 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모세는 능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죄인임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고 그 계명을 전하였으리라.
그래서 그들은 그 계명을 통해 자신들이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했어야만했다. 본래 계명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완전하게 지켜낼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 이르게 하고 그 결과로써 끝내는 죽이는 것이 된다고 했다.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계명을 자신들의 능력으로 지켜내어 의에 이를 수 있다고 착각했다. 지켜낼 수 없는 그 계명을 지켜내어 의를 이룸으로써 그들은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믿은 것은 그들의 교만이요 착각이었다.
(갈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한 부자청년이 주님께 찾아와 자신은 그 계명을 다 지켰노라고, 그래서 자신이 의인이라는 것을 은근히 암시했다. 모세가 계명을 전하여주었고, 그리고 수백 년이 흐른 그때까지도 이스라엘이 그 계명을 통해 자신들이 어쩔 수 없는 죄인임에 대한 깨달음은 전혀 얻지 못했던 것이다. 그 부자청년은 그런 이스라엘을 전적으로 대표하여준 인물이었다.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자신의 백성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려고 십계명의 두 돌판을 전하여준 그 순간의 모세에게는 어찌하던지 그 백성들을 구원하여 살리려는 그 사랑이 가득하였다. 하나님 앞에 순종을 이루었고, 자신의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한 그 순간의 모세는 그 스스로 십계명을 준수한 자였기에 계명을 온전히 지켜내심으로 그 계명을 완성한 주님을 예표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십계명을 준수하여냄은 곧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이룸이었다.
그런 모세를 어찌 하나님이 사랑하여 기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능히 구원에 이를 자였으니 에녹처럼 그 몸이 변하여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남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그 이유를 이처럼 능히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했으니 그들은 그 모세를 보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자신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모세는 알지 못했다. 산에서는 하나님 앞에 모세 자신뿐이었으니 아무도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알려줄 수 없었다. 산에서 내려왔을 때 사람들이 말할 때 비로소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만약 모세가 아닌 누군가가 자신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어떠했을까?
만약 우리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면 우리는 광채가 나는 그것을 자랑했을지도 모른다. 명예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그것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은 것은 죄인된 자의 본능일 것이다. 원죄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은 명예와 부귀와 같은 세상적인 욕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자라면 아예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일도 없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을 수건으로 가렸다. 이미 그는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로 선 자이다. 구원하심의 그 큰 은혜 앞에 세상의 부귀와 명예는 부질없는 것임을 깨달은 자이다. 사도바울도 이런 깨달음을 얻었기에 그가 누렸던 부와 명예를 배설물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과감하게 버린 자가 아니던가!
(빌 3: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모세가 광채가 나는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것은 그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채가 나는 자신의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 대신 모세 자신을 섬기는 자의 자리에 둘지도 모른다는 그 염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모세가 염려한 그 일을 한다면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자신이 그처럼 사랑하는 그 백성들이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그때 모세의 그 마음은 어떠할까?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제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백성들을 구원해달라고 할 정도로 자신의 백성들을 사랑한 모세가 아니던가!
두 번째 돌판을 들고 올라간 그 날에도 모세는 그 산에서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자신의 백성들의 죄를 사하여달라고 중보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는 자신의 조카 롯을 사랑하였기에 그를 위해 구원해달라고 중보기도를 했던 아브라함의 그 기도와 같았다.
(출 34: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깍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 바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 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출 34: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출 34: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새
(출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출 34: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녀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 34:8)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리어 경배하며
(출 34:9) 가로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창 18: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창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창 18: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창 18: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창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창 18: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창 18:28)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29)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런 모세였기에 당연히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의 그 말씀만 주목하여보라고 광채가 나는 자신의 얼굴을 가려버린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 지극한 겸손을 드러낸 일이면서 또한 그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모세의 행동이었다. 어찌 하나님께서 이런 모세를 사랑하고 기뻐하지 않을 수 있으시겠는가!
(출 34: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출 34: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출 34:33)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는 그 두른 수건을 벗었다. 이는 가장 겸손한 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꾸미지 않고 드러냄이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의 모습이 이러해야 한다. 거짓과 위선의 가면을 쓰고 하나님 앞에 선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모르실까?
(출 34: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출 34: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그럼에도 우리는 때때로 그런 어리석은 잘못을 범한다. 이스라엘이 그랬다. 그들은 번듯한 제물을 드렸다. 누가 봐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그들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의 가면을 쓰고 그 제사에 임했었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속으로는 그 땅의 우상을 섬겼고 그 땅의 재물만 탐하고 있었다. 모세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깨닫기를 그토록 원했던 그 바램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만 것이었다. 모세에 의해 계명이 그들에게 주어졌지만,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의 자리에 나아가 구원에 이르기를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모세의 꿈은 사라져갔다.
이는 그들만의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우리 역시 어리석은 그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죄인의 자리에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그 일보다는 자신들의 거룩함만을 주장하는 그 자리에 서곤 한다.
모든 것이 자신의 죄로 인한 그 잘못으로 비롯되었다고 하기 보다는 “오직 모든 잘못의 원인은 바로 너에게 있다”고 정죄하며, 자신의 의를 주장하기에 바쁘다. 이런 우리를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
비로소 주님이 오심과 함께 모세가 전한 그 계명의 불완전함이 완전함을 입게 되었다. 모세의 그 계명은 죄인된 자가 죄인임을 자각하는 거울로서의 역할을 해왔으나, 주님의 오심과 그 가르침을 통해 그 불완전함이 완전함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불완전했던 율법언약이 은혜언약으로 완전하게 되어진 것이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죄인된 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나아가야 그의 구원이 완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할 때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세우신다.
이 비밀이 주님의 오심으로 드디어 그 땅에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심이었으니 그것은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를 통한 구원의 비밀을 담은 말씀을 선포하심이었다. 훗날의 사도바울은 이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어 전한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고후 3: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고후 3:2)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후 3: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주 예수께서 이 비밀을 밝히실 때 모세가 전하여준 그 계명에 의해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의해 하셨다. 이 뜻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을 우리는 ‘복음’이라 한다. 이제 이 복음의 전달은 우리의 입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옛날 사도시대에는 사도들의 입을 통해 이 복음이 전하여졌다. 그러나 그때 복음이 사도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지만 그 순간의 그 전달은 성령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는 전하여짐이었다. 따라서 그 복음은 능력이 있었고, 그래서 능히 죽을 자들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의 말씀이 되어진 것이다.
만약 그 순간에 성령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고 단지 사도들의 그 입을 통해 나오는 말로만 전달되었다면 그것은 사도들의 언변술에 의한 그 능력의 드러남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순간에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런 이적이 벌어졌을까?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행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복음이 단지 우리의 입을 통해 나오는 그것이라면 우리의 언변술의 능력으로 인함이니 그 복음이 얼마나 능력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복음은 단지 우리의 입을 빌릴 뿐이지 그 능력은 성령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는 오직 성령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함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이 복음을 ‘하나님의 영’이라하였고, 전도자가 되는 그 일에 대해 “새언약의 일꾼이 되게 하였으니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복음을 ‘살리는 영‘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바울은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의문인 그 계명은 죄인된 자가 죄인됨을 깨닫게 하는 거울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니 이스라엘은 구원의 그 비밀을 깨닫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였다. 결국 그들은 죽음에 이르는 자들이 될 뿐이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의 이 복음은 구원의 비밀을 깨닫게 하는 길을 열어주니 이로써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영생, 즉 영원히 살리는 것이 되었다.
(註) 여기서 ’의문’은 돌판에 새긴 그 계명을 말한다. 히브리어 원전에 기록된 ‘의문’에 해당하는 말은 ‘그람마’로서 이는 원래 문자라는 말인데 점차 ‘기록된 것’, 즉 책이나 문서를 뜻하는 말로 자리 잡았으니 모세가 전하여준 그 계명들을 뜻한다.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의문(儀文)이다.
의문은 의식(儀式)의 표(標)라는 말인데, 모세의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그 두 돌판을 가리킴이다.
(우리 성경의 이 ‘의문’이라는 용어는 현대인들이 잘 쓰지 않는 단어이어서 쉬운 말로 바꿈이 좋을 듯하다)
이어서 사도바울은 모세의 얼굴을 두른 그 수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모세가 그의 얼굴에 수건을 두른 것은 광채가 나는 자신의 얼굴을 그 백성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함이었다고 밝힌다.
(고후 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고후 3: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고후 3: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고후 3: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고후 3: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고후 3: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고후 3: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구원사의 그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채가 나는 그 모세를 보고 그것에 주목함으로써 정작 중요한 일, 즉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그것을 깨닫게 하는 그 계명에는 주목치 못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을 염려함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 이스라엘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여 모세의 계명에 대한 그 본질은 보지 못하였다. 사도바울은 겉만 보는 그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에 대해 지적하고 있었다. 모세가 그 백성들이 본질을 놓치는 그 일을 범하지 않게 하려고 자신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는데, 오히려 그 백성들은 어리석게도 모세의 그 수건으로 자신들의 눈을 가려버렸다.
(고후 3: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래서 구원의 본질을 바라보아야할 그 눈이 가려져서 어두워져있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수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무지와 오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불신앙, 사랑이 상실된 편견과 엄격한 율법주의적 편견 등을 상징한다.
주님이 복음을 주신 것은 이 수건을 벗겨서 참된 진리를 볼 수 있게 해주려하심이었다.
오늘 우리도 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렇게 우리의 얼굴을 그 수건으로 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수건이 우리의 얼굴을 덮고 있는 한 우리의 구원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제 우리도 모세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의 띠를 두르고, 순종하는 자로서 그 백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함과 같은 그런 겸손함과 순종함과 사랑을 온전히 이루자.
신앙적 지식을 얻지 못하게 하여 불신앙으로 이끄려고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영적 수건과 사랑이 상실된 채 엄격한 신앙적 규칙만 고수하려는 율법적 편견을 야기하는 편견의 수건을 벗어버리자. 그래서 복음의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그 책임과 의무를 온전히 감당하자!
이 한해 주의 주시는 은혜가 차고 넘치시기를 축원하노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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