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25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죽지 않으려고 땅 끝까지 불로장생초를 찾으러 다녔고, 마시면 불로장생할 것이라 여기고 맹독인 그 수은조차도 물처럼 마신 진시황도 끝내는 그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이 땅의 누구도 이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누구나 죽음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과연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인가?
생명체는 예외 없이 모두 죽는다고 생각하는 이 상식적인 사실이 과연 진실일까?
여기 예외적인 놈들이 발견되었다. 곰벌레와 지중해 홍해파리와 플라나리아와 같은 것들이다. 펄펄 끓는 물에서도 곰벌레는 죽지 않는다. 액체질소에 담가도 죽지 않는다. 심지어 숨을 쉴 수 없는 우주공간에서조차도 죽지 않는다.
홍해파리는 또 어떠한가!
과학자들이 실험실 수조에 장기간 방치하여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확인한 홍해파리가 멀쩡히 살아있었다. 플라나리아도 둘로 자르면 죽기는커녕 다시 머리와 꼬리가 생겨나 두 마리로 되어 죽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죽지 않는 이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쩌면 애초에 생명체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영생하는 존재였다는 것에 대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생명체는 그 수명을 다하여 죽음이라는 것을 피하지 못할까?
그리고 우리 인간 역시 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여기에 대해 성경이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처음사람 아담을 만드셨다. 아담을 만드시기 전에 먼저 그 땅에 생명체를 창조해 두셨다. 그 일을 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소감을 밝히셨다. 전능자가 만드신 그것들이 전능자의 보시기에 좋았으니 유추컨대 그 생명체들은 영생할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영생하지 못한다는 것은 죽게 될 것들이란 의미가 된다.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그것을 죽여 멸절시키는 것은 고약한 하나님이 되게 하는 일이 될 것이기에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못하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 그것들은 분명히 영생할 생명체들이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 그 사람 또한 분명히 영생할 존재로 지으셨을 것임에는 의심할 바가 없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사랑스런 그 사람과 영원히 교제하시면서 기쁨을 누리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 아담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그 욕심을 품었고, 그래서 하나님과 맺은 그 행위언약을 깨트렸다. 하나님은 아담과 행위언약을 맺으실 때,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의 실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담이 그 약속을 위반함으로써 하나님과 맺은 행위언약을 파기하였고, 그래서 죽음이 그를 찾아왔다. 하나님은 먹으면 죽으리라 말씀하신 자신의 그 약속에 대해서는 변개치 않으시는 동시에 사람의 그 약속 위반에 대해서는 반드시 공의를 집행하셔야만 하는 자이시다.
아담이 죄를 범하였고,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됨과 동시에 그 땅의 모든 생물들이 함께 저주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을 포함한 그 땅의 모든 생명체들은 유한한 존재, 즉 죽음에 이르는 존재들이 되고 말았다.
늙고 쇠락하여 결국 죽음이 있게 되는 이런 모습들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지극한 선의 원천이시며, 또한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이 되신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 속한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이 아름답지 못한 모습들을 그대로 영원히 버려두실 수가 없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영원에서 이들의 회복을 계획하셨다. 인간들이 더럽혀놓은 그 모든 추악함을 제거하시고, 처음 창조하신 그 날의 그 아름다움으로 회복하실 것을 그렇게 영원한 그 때에 이미 작정하셨다.
그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었던 아담의 그 잘못을 제거함이 없이는 새롭게 하는 그 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둘째 아담을 계획하셨다. 그리하심은 그 모든 잘못이 하나님 당신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신 때문이었던 것일까!
그래서 자신이 직접 이 세상에 둘째 아담으로 오시기로 작정하셨다. 사람의 몸을 입어야할 그 사역을 전적으로 감당할 요량으로 하나님은 영원에서 스스로 그 사역을 감당할 존재를 발생시키셨다. 이는 성자하나님의 발생이다. 성경은 성자하나님의 발생하심을 ‘독생자’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막 1: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막 1: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막 1: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성자하나님은 성부하나님과 한 본체를 이루시되 다만 그 사역하심에서 구별되실 뿐이다. 다시 말해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다. 이를 요한복음에서는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표현하고 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성자하나님이 마지막 아담으로 이 땅에 오심이 곧 예수의 탄생이셨다.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아담의 그 죄를 없이하시기 위함이었다. 아담의 그 죄가 존속하는 한 이 땅의 죽음은 영원하고, 아름다움은 결코 회복될 수가 없기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아담의 그 죄는 후손들에게 유전되었고 그 결과는 참담하였다. 그의 첫아들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을 행하는 가장 추악한 짓을 범하게 되었고, 그에게서 난 후손들 또한 살인을 위한 무기를 만들어내었다. 결국에 그들은 전쟁이라는 끔찍한 참상을 그 땅에 드러내었다.
(창 4: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창 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 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아담의 죄로 더럽혀진 그 땅을 회복하는 그 일을 사람들로 하여금 하게 하여 공로를 세울 수 있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회를 허락하셨다. 그것이 노아의 홍수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가 극에 달한 그때 홍수로 그들을 제하시고, 한 사람 노아로 하여금 그 땅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하셨다.
이 사실을 성경은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애초에 하나님이 그 땅에 아담을 지으시고 복을 주시면서 이르신 말씀이 이 말씀이 아니던가!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창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 9:8)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창 9: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창 9: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창 9: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창 9: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창 9: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더 이상 죄가 지배하지 않을 것 같은 그 순간의 모습을 성경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그의 장막에서 벌거벗고 누워 잠들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가 마신 포도주는 오실 주님의 그 보혈을 상징하고 있었다.
주님의 그 보혈로 정함을 입고 의롭다하심을 입은 노아였으니 그에게는 더 이상 그 죄로 인한 부끄러움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감출 필요가 있었던 그 부끄러움이 없어진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 벌거벗음이었으나 그의 아들 함이 그것을 업신여겼다. 이 행동은 그 아비 노아를 업신여김이 아니라 하나님을 업신여김이었다.
(창 9: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 9: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창 9: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아비는 곧 하나님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더더군다나 이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입은 자였으니 그런 아비를 업신여김은 곧 하나님을 업신여긴 행위가 되었다.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는 죄 없다 아니할 것이라 했다. 죄가 없을 것 같은 그 땅에 다시 죄가 들어오고 말았다.
(출 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함 때문에 또 다시 그 땅에 죄가 번성하기 시작했다. 사람으로 하여금 거룩해지는 그 일을 이루도록 하나님은 기회를 주셨지만 또 다시 사람은 그 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아담의 그 죄를 없이 하는 일이 불가능함에 대해 깨달아 알도록 해주려하신 일이었다.
그 사실을 바르게 깨달았더라면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에 의지하는 대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였으리라. 그러나 그 이후에도 사람들은 그 땅의 죄를 제하는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지 못했다. 인간은 죄인이었기에 그 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또다시 한 번의 기회를 더 허락하셨다. 그것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심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구원을 약속하셨다.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라고 말씀하심이 그 구원의 약속이었다. 이 약속의 말씀은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올라갔을 때 하셨다.
(출 19: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출 19:2)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출 19: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출 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두 돌판에 새겨 주신 그 율법이 바로 십계명이었다. 이스라엘이 이 열 가지 계명을 잘 지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하심이었다. 아담과 맺은 그 언약을 아담이 어김으로 죄가 그 땅에 들어온 것인데, 하나님은 이 순간 이스라엘에게 다시 율법을 주심으로 새로운 언약을 맺으신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죄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는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율법을 준수함이 곧 하나님께 순종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하랴!
사람으로서는 이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는 것을!
누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으며, 누가 온전히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요 7: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행 7: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으로는 오직 죄를 깨달을 뿐이었다. 죄인 된 자로서는 그 누구라도 율법을 완전히 준수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율법을 준수해보려고 달려들지만 결국은 그 율법을 온전해 지켜내지 못함 때문에 율법을 준수하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만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이 율법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는 거울이 되었다. 결국은 율법을 통해 구원 얻고자 하는 그 꿈은 좌절되고, 오히려 그 율법으로 인해 죄인의 자리에 선 채로 죽음에 이르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사람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그 일이다.
만약 율법이 없었더라면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그 사실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겠는가?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동물의 세계에서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남을 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고픈 사자는 임팔라를 죽이는 사냥을 할 수밖에 없다. 누가 이런 사자를 가리켜 생명을 해치는 죽일 놈이라 욕하는가?
그런데 그런 세계에 법이 생겨나서 생명을 해치는 것은 살생한 죄라고 정한다면 그때는 사자가 생명을 해한 범죄한 사자로 될 것이다. 피치 못할 이 경우에도 능히 죄로 정할 수 있거늘 사람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밀렵을 한다면 그것은 능히 죄로 정할 수 있다. 그래서 밀렵하는 것을 죄로 정했으니 그때부터는 밀렵한 자는 법의 심판을 받는 죄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죄인으로 여기지 아니하였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죄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물론 하나님 대신에 이집트의 우상을 섬겨도 죄가 되지 않았다.
(롬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런데 이 율법이 제정됨으로써 우상을 섬기는 자는 죄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열 가지 계명을 온전히 지켜내는 일은 원죄를 지닌 사람으로서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찌 한 순간도 하나님을 원망함이 없이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어느 누가 하나님을 한 순간도 망령되이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또 어찌 사람에 대해 미워하며 원망하는 일을 한 순간이라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이런 일들 모두는 원죄를 유전 받은 자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그 욕망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그런고로 누구도 이런 일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롬 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이스라엘은 신앙적으로 여전히 미숙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그 죄가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었고, 귀를 막고 있었으니 어찌 그들이 신앙적 지혜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전하여준 그 계명의 참의미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런고로 그들은 마땅히 그 계명을 죄인인 자신들의 능력으로 지켜낼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만 지켜낼 수 있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어야만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능히 그 계명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고 착각했다. 그것이 그들의 교만이었다.
아담의 그 죄는 인간의 능력으로 없이할 수 있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그 죄는 애초에 하나님과 맺은 그 언약의 파기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 죄를 사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어야만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계명을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온전히 지켜냄으로써 자신들이 그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그렇게 자신하고 나아갔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그 계명은 참 형상이 아니었다. 장차 하나님이 주실 좋은 일에 대한 그림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은 그것을 참된 형상, 즉 자신들의 죄를 온전히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알고 해마다 늘 드리는 그 제사에만 나아갔다.
어쩌면 그들의 이 모습이 죄 중에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그 한계를 상징적으로 그대로 보여줌이 아닐까?
(히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시 106:7)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며 주의 많은 인자를 기억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잠 4:19)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잠 28:5)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전 8:17)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율법을 통해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구원에 이르지 못함을 어렴풋이 깨달았을 때 그들은 메시야를 고대하게 되었다. 그때도 그들이 원하는 그 구원은 오직 그 땅에서의 구원, 즉 이방 족속들로부터의 해방을 이루어줄 그 메시야를 갈구한 것이었다.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자신들이 구원되기를 바랬다. 어리석은 그들의 기도일지라도 하나님은 그 기도를 외면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고레스를 통해 이스라엘이 그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기회를 얻게 하셨다. 그리하셨으니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풀려나던 그 날에 바사 왕 고레스를 메시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도 단지 오실 메시야에 대한 그림자일 뿐이었다.
(사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 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대하 36:22)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대하 36:23)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리시려고 모세를 통해 주신 그 언약의 말씀인 율법은 온전한 은혜언약이 주어지기까지 임시적인 언약이었다. 그래서 그 율법은 완전한 언약이 아니었다. 그 언약은 죄인의 그 죄를 도말하고 그 땅의 죄로 인해 더렵혀진 그 모든 것을 청산하여 다시 아름다움을 입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계획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못되었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은혜언약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완전함을 입기 전까지의 임시적인 것이 그 모세의 율법이었던 것이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마지막 카드를 내미셨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드디어 우리가 영원한 삶, 즉 죽음이 없는 그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길, 영생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그것은 성자하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심이었다. 율법은 이 완전한 것이 올 것에 대한 그림자였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 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영이 우리 속에 주인이었을 때에는 우리의 능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그 일을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 속에서 우리의 영이 주인이 아니고 성자하나님의 영, 즉 전능하신 성령이 주인이 되시기에 율법의 요구를 능히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주의 영이 내 속에 거하시므로 우리가 능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이 일어날 것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일이 소홀할 수 있겠는가?
참 이웃을 위해 사셨고, 그래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주님의 영이 내 속에 참주인 되시니 어찌 이웃 사랑하는 그 일이 완전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때의 나는 율법에 대해 자유한 자가 된다. 기쁜 마음으로 그 율법에 능동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지는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그래서 주님은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마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사도바울도 이 진리를 깨달았기에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다.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모세에 의해 주어진 그 율법 아래에 있을 때는 그 율법의 종노릇했다. 종은 타율적인 삶을 사는 것이 그 특징이다. 율법 아래에 있을 때는 수동적으로 그 율법에 맞추어내려고 근근이 그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런 삶이 복되고 아름답다할 수 있겠는가?
죄인 된 자의 능력으로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이루어내기가 버거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성령을 힘입을 때에는 더 이상 우리의 능력으로 그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이 일에 모범을 보였으니 그는 하나님의 힘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일을 감당하였노라고 고백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으로서 참된 사랑을 이룬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롬 15: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하나님의 아들의 이 땅에 오심은 진정한 회복의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의 오심은 죄로 인한 어둠이 지배하는 이 땅을 참 빛으로 밝히심이었다.
죄로 인해 오염된 이 땅을 정화하여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복시키려하심이 하나님의 작정에 내재되어있었고, 때가 이르매 실행에 옮겨졌던 것이었다. 피조물들도 이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롬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결국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청산되니 모든 것이 새로운 날을 맞이할 것이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계 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계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계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이러한 위대하고 영광스런 회복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당신의 사역을 하셔야만 하셨을까?
그의 사역은 아담의 그 죄를 온전히 씻어내는 작업이었다. 애초에 아담의 그 죄는 그의 불순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죄를 범한 아담은 사람이었다. 그런고로 그 죄를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사람에게 시행되어져야한다.
그 죄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람에게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공의에 대한 심판을 당할 그 자리에 서실 수가 없다. 그와 동시에 아담의 후손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담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설 수도 없다.
같은 죄를 진 죄인이기에 아담의 그 죄를 대신할 수 없음이다. 죄 값의 전가는 죄 없는 자에게만 가능하기에 아담의 죄를 대신 질 자는 죄 없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성자하나님은 부득불 인성을 취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셔야만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던 것이다.
불순종으로 인한 그 죄에 대한 당사자는 아담과 하나님이시다. 아담과 하나님은 공통적으로 인격을 지닌 이성적 존재이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에서 죄인의 죄를 대신할 대속물로서의 짐승은 이성을 지닌 인격적 존재가 아니므로 진정한 의미에서는 대속물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라하신 하나님의 그 처사는 오로지 그 죄인들을 배려하신 그 사랑 때문이었다. 만약 대속물로서의 조건이 반드시 사람이라야만 했다면 그 땅의 누가 그 죄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구약의 그 대속물은 오직 오실 참 대속물에 대한 그림자였다. 그런고로 구약의 그 제사를 허락하심은 죄인들에게 그 제사를 통해 영원한 죄사함을 허락하실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고 바라는 그 믿음에 대한 소망이 끊어지지 않게 해주시려는 하나님의 참사랑에서 나온 배려하심이었다.
그래서 그 구약의 제사는 죄를 참으로 사하실 하나님과 죄인을 연결해주는 끈이 되게 하셨던 것이었다. 그 사랑의 끈이 끊어지지 아니하였기에 결국은 구세주이신 예수가 이 땅에 오실 수 있었다.
죄인의 죄를 대신할 존재가 반드시 이성적인 인격적 존재여야 한다면 굳이 성자하나님이 아니라 천사로 하여금 대신하도록 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천사도 분명히 인격을 가진 이성적 존재이다. 하지만 천사는 하나님의 명을 전달하는 그 일을 주된 임무로 하도록 지음을 입은 존재였다. 그런 천사를 아담의 그 죄를 대신할 대속물로 세우는 것은 부자 아버지가 돈으로 아들의 죄를 대신하여 처벌을 받을 자를 고용함과 같을 것이다.
옛날에는 죄를 지은 자가 관에 가서 형벌의 매를 맞을 그 일을 대신해줄 자를 돈으로 사서 대신 가서 매를 맞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천사를 대속물로 한다면 그와 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과연 성부하나님께서 그 사죄에 대해 만족해하실까?
이때의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그때의 천사는 과연 죄인인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대속물의 자리에 설 수 있을까?
천사는 사람에 대해 어떤 직접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 천사가 사람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같이 살아서 동료애를 가진 존재도 아니다. 그런 천사가 얼마나 깊은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성자하나님은 곧 인간을 창조해내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 가지는 그 마음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 심지어 부모의 자식을 향한 그 사랑도 바로 여기에서 기원하였으니, 부모의 그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이 사랑이 그 무엇과 비교될 수 있을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 지극한 사랑이 끝내는 자신이 아담의 그 죄를 대신할 대속물로 되어질 것을 결심하셨으니, 이것은 죄를 지은 자식을 대신하여 자신이 그 죄를 감당하겠다고 죄인인 아들이 갇힌 감옥 근처에서 아들의 그 죄를 대신 씻으려고 한 어머니의 그 모습에 대한 원형이라 할 것이다.
누가 우리의 이 죄를 씻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어주시려는 성자하나님의 이 완전한 사랑을 따라할 수 있을까!
우리를 향한 이 위대하고 숭고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대속물이 되어 드려진 이 제물을 어찌 성부하나님이 외면하실 수 있었겠는가!
이 제물만이 하나님의 그 진노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제물이었다. 이런 완전한 제물이 되시려고 성자하나님은 스스로 그 높고 존귀한 자리를 내어놓으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이다. 이때 그가 입으신 몸은 진짜 인간의 육신이었다.
그 육신은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그 육신과 동일했다.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 아담을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다. 자신의 모습을 닮았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아기를 낳은 부모는 그 아기를 보고 그렇게 좋아한다. 만약 그 아기가 자기와 전혀 닮지 않았다면 그렇게 좋아할 수 있을까?
내가 낳은 아기가 나와 같은 동양인이 아니라 지구 반대편의 아프리카의 원주민과 같은 모습이라면 좋아하기 보다는 너무나도 놀라 충격을 받을 것이다. 까만 피부 때문이 아니라 나와 다름 때문이다.
반대로 아프리카 원주민 부부가 낳은 아기가 우리와 같은 동양인 모습이라면 그들도 그 다름 때문에 놀라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자신을 닮았기에 심히 좋아하셨으니 그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분명 죄가 없는 몸이었고, 지극히 순수하고 순결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닮음이다.
마찬가지로 오신 주님도 그런 육신을 입고 오셨다. 그는 아담 이후로 죄인 된 우리의 몸과는 온전히 구별되는 그 육신을 입으셨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한 가지가 그런 주님의 육신도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육신과 같기에 아담처럼 능히 유혹에 놓여질 수 있는 그런 인성이셨다는 것이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주님은 인성과 함께 성자하나님으로서의 신성을 지니셨으니 응당 그 신성의 영향 아래에서 활동할 육신이니 우리와는 다르게 유혹에 절대 넘어가지 않을 성질을 처음부터 지니셨다고 한다면 그는 속제물로서의 자격이 처음부터 없었다고 해야 한다.
대속물로서의 자격은 인간 아담과 동일한 인성을 지니되 아담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범한 그것을 스스로 이겨냄으로써 완전한 순종의 성취를 이룬 자라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그 많은 고난을 겪으신 것이었고, 그는 그 모든 고난을 오직 순종하심으로 이겨내셨던 것이다. 그런고로 그는 처음부터 죄가 없으셨고 또 그 후로도 죄와 함께하지 않으셨다.
그가 능히 신성을 발휘하실 수도 있었을 터인데, 빌라도 앞에서 그런 수모를 견디신 것은 그가 그 인성에 대한 유혹을 인내하심이었고, 결국은 순종을 이루어내신 일이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건장한 모습의 성인으로 오시는 대신 우리와 같이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도 바로 이 순종을 온전히 이루려 하심이었다.
아담이 비록 건장한 모습으로 이 땅에 등장하였을지라도 그는 신앙적으로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런 그는 그의 신앙이 점점 자라가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완전한 신앙수준에 도달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명자로서 그 땅을 다스리는 일을 했어야만 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했더라면 그는 영생할 자로서의 지위를 누렸을 것이고, 이 땅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도 아름다움을 영원토록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로 이 모든 꿈이 사라졌고,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불행한 존재로 전락했다. 오신 주님은 이 모든 불행을 청산해야하는 그 무거운 짐을 지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담이 못 이룬 것을 이루기 위해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서 출발을 한 것이다.
그는 분명히 만왕의 왕이시다. 그런 그가 이 땅에 오신 그때, 그는 그 더럽고 추한 말 먹이통에 누우셨다. 이는 성부하나님 앞에 자신을 가장 낮은 자리에 두어 순종을 준비하려하심이었다. 그러나 그는 구세주이신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을 사단이 모를 리가 있었을까?
그 땅의 지배자, 사단의 앞잡이인 헤롯을 움직여 이 메시야를 제거하려고 했다. 그 일은 사단의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조치였다.
그 옛날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심을 입은 모세, 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사역할 것을 사단이 몰랐을까?
그래서 그 날에도 사단은 바로를 움직여 태어나는 이스라엘의 남자아기는 모두 죽이라고 명했다. 모세의 이 고난은 장차 오실 주님이 당하실 그 고난의 예표였다.
(출 1: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출 1:16)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출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출 1: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남자를 살렸느냐
(출 1: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출 1: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
(출 1:21)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
(출 1:22)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아담의 신앙이 자람으로써 자원하여 순종이 이르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그 기대는 무너졌다. 그때 그 상실감은 얼마나 크셨을까!
아담의 불순종으로 생겨난 그 죄를 없이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예수께서도 그의 인성은 순종을 이루기 위한 길로 나아가셔야만 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공생애의 시대로 나아가기 전의 그의 삶에 대해서는 대체로 침묵하고 있다. 유년시절에 대한 암시는 예수의 인자되심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누가복음과 그의 탄생에 대해 언급한 마태복음 정도에서 일부 발견된다.
마가와 요한의 복음은 그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유년시절에 관한 이런 기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 일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한 요약본이라고 보아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이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기록한 것처럼 성경을 그와 같은 기록 형태를 취하게 했다면 지금의 이 성경과 같은 정도의 부피가 아니라 서고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랄 정도의 방대한 분량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성경은 신학자들만의 성경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을 고르게 사랑하시기에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성경을 주시려고 그리하셨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그토록 섬세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하심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비화를 언급할 때에 동정녀 탄생을 언급하고 있다. 동정녀 탄생이 그에게 필요한 이유는 아담이 범죄하기 전과 같은 인성을 입으시기 위함이었다. 만약 그가 남자와 여자 사이에 태어났다면 그는 온전한 제물이 될 자격을 처음부터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담의 죄는 유전이 되었다. 그래서 부부 사이에 태어나는 그 생식의 방법을 입으면 아담의 원죄가 유전되어 제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사람의 몸을 입되 생식의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태어나야만 죄가 없는 참된 제물이 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성자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기 위해서는 남자가 아닌 여자의 몸을 빌어야만했고, 생식의 방법을 피하기 위해서는 남자와 관계하지 않은 동정녀를 통한 탄생을 하셔야만했다. 그래서 동정녀인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셨다.
오신 성자하나님은 그 인성이 완전한 순종의 그 기초를 놓으시기 위해 아기 탄생을 취하셨다. 그런데 그 아기로서의 인성은 신성을 발현하기에는 최적의 상태가 되지 못한다. 완전한 순종을 이룰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신성은 그 능력을 드러내실 수 있으시다.
그래서 그가 성전을 방문한 그때에는 그의 신성이 드러나지 않으셨다. 광야에서 사단에 시험을 받으시고 그 시험을 이겨내신 그때 비로소 그의 인성은 신성의 발현을 도우실 수 있는 경지에 이르신 것이다.
사단의 그 시험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열매를 먹으라는 유혹을 받는 그 순간과 같은 순간이었다. 아담은 그 유혹의 순간에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불순종하는 것을 결과함으로써 죄인의 자리에 떨어졌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주님은 사단이 유혹하는 그 유혹을 모두 물리침으로써 승리하셨다. 그 결과로 아담이 이루지 못한 그 순종을 이루셨다. 사단이 세 가지 유혹을 해왔고 그 세 가지를 이겨내신 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 한 그 승리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통상적으로 성경에서 셋은 하나님의 숫자이니 그러하다.
광야에서의 이 순종의 승리를 이루기까지 예수께서는 자신의 인성에 대해 신앙적 성숙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셨을 것이다. 이 사실은 그가 열두 살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고 그때 그곳에서 선생들과 대화하는 모습에서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 그 선생들에게 물으셨다는 것은 그의 인성이 순종이 필요한 신앙적 지식을 능동적으로 쌓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 선생들의 물음에 답을 하였는데 그 답이 선생들이 기대한 그 이상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신성을 지니셨으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그는 그의 신성에 의지하지 않으셨다. 오직 그 순간에 그의 인성이 그만큼 노력하였음을 보인 것으로 해석하는 편이 합당하다.
만약 그가 그때 그 순간에 신성을 이용하였다면 그는 권력남용의 죄를 범하였을지도 모른다. 그 일은 곧 교만이요 불순종의 죄가 될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때가 이를 때까지 자신의 인성이 감당하여야할 그 직무를 충실히 감당해 나가셨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리아와 요셉이 성전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갔을 때 예수는 여전히 그 성전에 머물렀다. 열두 살 아이가 호기심이 가득해서 부모님이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남았을까?
그의 신앙적 지식에 대한 욕구가 그를 성전에 머물게 한 것이다. 완전한 순종은 결코 신앙적 지식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신앙이 초보적이었을 때 참으로 순종적이었던가?
모처럼 휴일에 쉬면서 여가를 즐기고 싶은데 굳이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려야하나 하고 망설이던 때가 많았을 것이다. 예배하는 삶이 복되고, 그래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하기 까지는 우리의 신앙적 지식이 쌓이는 것이 정말로 필요했음을 능히 공감할 것이다.
주님도 이 기쁜 순종을 이루시려고 그처럼 열심히 신앙적 지식을 쌓아갔던 그 모습이 그의 어린 시절의 예루살렘 성전 방문 기사로 남은 것이다.
(눅 2:42)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눅 2: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눅 2: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눅 2: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눅 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눅 2: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마리아와 요셉이 아이 예수의 없어짐을 발견하고 찾으러 갔을 때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모르셨나이까?”라고 답하셨다. 예수의 이 모습에서 그가 신앙적 성숙을 이루어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그 뜻을 알고 온전히 순종하려고 얼마나 준비를 깊이 하셨는지 알 수 있다.
(눅 2: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눅 2: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눅 2:50)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그의 인성이 순종의 준비를 그토록 간절하게 이루어 가셨음을 드디어 성경은 짧은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증언의 말씀,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에서 그의 순종을 향한 그 준비하심이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있었음을 증언하니 그는 참으로 진실되게 완전한 제물이 되어 가셨던 것이다.
(눅 2: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눅 2: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렇게 예수께서는 아담의 그 원죄를 없이하기 위한 그 제물로서의 자격을 오직 그의 인성으로 스스로 준비해 가셨다. 이는 아담의 그 원죄로 마땅히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가련한 신세에 놓인 우리를 살리시려는 애끓는 그 위대한 사랑 때문이셨다.
오직 인성만으로 이루어 가신 그 일이 쉬운 일이었을까!
우리와 같은 그 인성으로 행하는 이 일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외롭고 고독한 그 길이었지만 예수께서는 묵묵히 그 길을 그렇게 걸어가셨다. 이사야 선지자의 그 예언의 말씀대로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자신을 위한 어떤 변명의 말씀 한 마디도 없이 그렇게 무거운 십자가의 길을 홀로 걸어가셨다. 오로지 우리를 살리시려는 그 간절함 때문에...!
(사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사 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사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의 순종은 구체적으로 그의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드러나셨다. 그가 태어난 지 팔일 만에 그가 율례대로 할례를 행하였고,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간 그 일들은 모두 율법에 복종함이었다. 물론 이 일들은 모두 자신의 인생부모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그는 분명히 율법에 순종한 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눅 2:21)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눅 2:22)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눅 2: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눅 2: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예수 그 자신의 인성이 능히 율법에 복종할만한 그때가 되었을 때, 예수는 스스로 자원하여 그 모든 율법에 복종하셨다. 율법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이다. 따라서 이 율법을 지킨다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다.
예수는 그의 신성의 도움 없이 인성으로써 이 순종을 이루심으로 흠 없는 제물이 되시는 그 준비를 온전히 이루어 가신 것이었다.
(눅 2:39)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예수께서 이 율법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키셨으니 그로 말미암아 이 율법의 완성을 이루신 것이다. 율법의 요구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예수 그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통해 완전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현하셨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바울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예수는 진실로 율법을 완성하신 자가 되셨다. 그가 이루신 이 공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모두 전가되니, 이로써 이전에 율법 아래에 놓여서 죄인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이제는 모두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예수로 인한 이 자유함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여 종국에는 복되게 하니 우리는 실로 이 땅에서 가장 복된 자의 자리에 선 것이다. 이는 예수의 참 사랑이 이루신 결과물이요, 참된 승리의 은사(恩賜)물인 것이다.
이런 사랑의 은혜를 베푸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 예수께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모두에게 기쁜 성탄이 될지어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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