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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기쁨

by 영동장로교회 2022. 11. 20.

2022. 11. 20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참된 기쁨”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기뻐하라고 했다.

(빌 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모든 형편이 넉넉하고, 하는 일마다 모두 형통하다면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고 있는 바울의 형편은 어떠한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쓴 글이 이 빌립보서이다. 그리고 또 빌립보 교회는 어떠한가?

그들 역시 여러 가지로 고난을 당하고 있으니 마음이 넉넉할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바울은 기뻐하라고 당부한다. 왜 일까?

 

세상에 속한 자라면 그런 형편에서 기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믿음의 백성에게서 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우리가 기뻐하는 그 일이 단순히 그 순간에 마음을 쾌활하게 하는 무엇이 생겼을 때만 하는 것이라면 그 기쁨은 진정한 기쁨이라 할 수 없다. 단순히 욕망을 채워주는 그 무엇이 족하게 있을 때 느끼는 감정으로서의 기쁨이라면 그 기쁨은 진정한 기쁨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진실로 만족을 느끼고 그것으로부터 진정한 기쁨을 얻는 것은 삶의 참된 가치를 발견할 때 가능해진다. 삶에 대한 참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면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족할지라도 공허함을 갖게 되고, 따라서 참된 기쁨은 누리지 못한다.

 

믿음의 백성된 자는 바로 이 점에서 복을 받은 자들일 것이다. 이 믿는 자들은 그들이 이 땅을 사는 명확한 이유를 깨달은 자들이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왜 이 땅을 살아가야하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삶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어 그 삶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그 삶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는다. 이런 삶이 어찌 기쁜 삶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믿음의 백성된 자는 자신이 도무지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된 자의 자리에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 삶은 희망 없는 삶이기에 아무리 부유하다 할지라도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삶이 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지 못할 세상에 속한 자는 이 땅의 최대 불행자인 것이다. 그런 희망 없는 자의 삶을 살았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원의 빛이 비춰졌음이다.

 

주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지상 최대의 희망이라는 선물을 안겨다주었다. 주님이 흘리신 그 보혈로 우리의 그 더러운 죄는 씻김을 받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 같은 복이 주어졌으니 우리는 이 땅에서 최고 행복자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지상 최대의 행복자의 자리에 선 자가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완전한 모순이다.

 

지상 최대 행복자의 자리에 서게 된 우리에게는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불행이 닥칠 수 있다. 그런데 그 불행이라는 것은 세상에 속한 자들의 관점에서의 불행일 뿐이다. 그 어려운 일들이 닥치는 것은 지상 최대 행복자의 자리에 선 우리의 그 행복이 완전해지도록하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훈련으로 주어진 것들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허락하신 그 훈련들이다. 이 일들은 통상적으로 우리의 성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적당하게 예비하신 것들일 뿐이다. 따라서 이 일들이 우리를 두렵게 하거나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지 못한다.

 

만약에 이 일들이 그런 것들이라면 하나님께서 굳이 그런 일들을 예비하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하므로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우리는 오직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그 일들을 통해 우리가 더욱 거룩한 자의 자리로 나아가기만하면 된다.

 

이와 같이,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서로 다른 것이 택하심을 입기로 예비된 자와 유기되기로 처음부터 확정된 자간에 나타나는 뚜렷한 특징일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 같은 깨달음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있다고 믿었기에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권한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없는 자에게 기뻐하라고 하면 그것을 온당하게 받아들일까?

비록 빌립보 성도들이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많이 당하고 있었지만 이 일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훈련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고난 중에서도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주님의 그 구속의 사랑을 깨닫지 않고서는 불가하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주 안에서”라는 전제를 달고 기뻐하라고 한 것이다.

과연 우리는 사도바울의 이 권면대로 늘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가?

 

 

특별히 사도바울은 유대주의 행악자들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당시에 교회 성도로 입교한 자들에게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행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은 주님의 은혜보다는 그들의 전통인 율법을 맹목적으로 지켜내는 그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주님의 그 가르침에 대한 깨달음에는 무관심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형식에 얽매여 본질을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함이다. 사도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형식에 얽매여 본질을 외면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한 그 유대주의 자들을 ‘개‘라고 표현한 것이다. 물론 이 개는 집에서 키우는 온순하고 순종적인 애완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공격하는 야생화된 그 들개들을 말한다.

 

야생의 들개들이 사람을 헤치듯이 형식에 맹목적인 그 유대주의 자들이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훼손시키는 그 일을 하기에 이처럼 과격한 표현으로 그들을 징계한 것이다. 주님도 그런 자들을 ’개‘라고 표현하셨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빌 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어쩌면 우리 중에서도 이와 같은 나무람을 들을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성에 젖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저절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님은 늘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잠자고 있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말씀을 늘 가까이 하고 그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깨어 기도하는 신앙인이 될 것이다.

(마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마 24: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 24:41)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마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마 24: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마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말씀에 대한 참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할례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 옛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 백성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

 

그때의 이스라엘은 신앙적으로는 미숙한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에 대한 그 비밀을 신약에서와 같이 직접 말씀하셨다면 그들이 과연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기에 그때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그들에게 맞는 수준의 가르침을 주셨다. 그것이 율법이었다. 그 율법에 대해 하나님은 그 이후에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조금씩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가르치셨다.

 

그런데 그들은 그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여 깨닫기에 힘쓰기보다는 문자적으로 형식에 얽매이는 신앙생활에 익숙해져갔다. 그 가르침의 본질에서는 너무나도 멀어져버린 이스라엘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많은 선지자들을 다시 계속하여 보내시는 대신에 직접 오셔서 구원에 대한 그 비밀을 밝히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그 옛날의 습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삶을 고수했다.

 

그래서 형식에 얽매인 할례를 주장한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손‘이라는 보이는 행위를 강조한 표현으로 ’손할례당‘이라는 말로 그들을 나무란 것이다.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달은 자들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할례당‘이라고 바울이 그렇게 칭했다.

과연 우리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할례당‘일까?

(빌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예수로 자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 은혜로 소망이 생겨나고 희망과 기쁨이 우러나는 그것을 온 땅에 전하는 그 일, 즉 복음을 전하는 그것을 예수로 자랑한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육체를 신뢰한다는 것은 율법에 따라 할례를 행하는 등의 행위로 거룩해진다고 믿는 그 형식적인 신앙에 얽매이는 그것을 말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바울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정통 유대가문 출신이며, 유명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수학한 자였다.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빌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빌 3: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그때까지 자신이 자랑으로 여기던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과감히 버려버렸다. 그가 이전의 그 삶에서 느꼈던 그 기쁨이 참된 기쁨이었을까?

 

남들보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고, 누구보다도 많은 학문을 연마한 엘리트로서 그가 느꼈을 만한 그 기쁨이 참된 기쁨이었다면 그가 그것을 그렇게 헌신짝 버리듯이 그렇게 버릴 수가 있었을까?

 

세상에 속한 자들은 그것이 기쁨이라고 굳게 믿고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그런 깨달음이 없음이기 때문이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바울은 참된 기쁨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달았다. 바로 주님을 아는 그 지식이 주는 고상함을 통한 그 기쁨이다.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우리는 희망 없는 삶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영원한 복을 누림을 바라보는 그 기쁨으로 살아간다. 우리가 누리는 이 기쁨이 참된 기쁨인 것이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런 희망을 가지고 사는 바울은 그 땅에서 가장 행복한 자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비록 로마 감옥이라 할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참된 기쁨을 깨달았기에 그는 진실로 용기있고 담대한 자였다. 우리도 세상을 담대히 이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기쁨 때문이다.

(요 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오늘도 우리에게 바른 깨달음을 허락하셔서 참된 기쁨을 누리는 자의 자리에 서게 하신 주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를 찬양하노라,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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