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30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책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책들을 통해 지식과 지혜를 얻는다. 그런데 이 많은 책들 중에 유독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책이 성경책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이 성경책을 가장 많이 보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기독교를 신앙으로 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성경을 읽는다. 그런데 비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성경을 읽는다고 한다. 그들이 성경을 읽는 것은 이 성경이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해 알 필요를 느낀 때문일 것이다. 이는 교양 있는 자로서의 성경적 상식을 얻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같은 성경책을 읽지만 읽은 후의 소감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은혜를 얻는 자와 얻지 못하는 자가 그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은혜 받을 자들을 위해 그들이 온전히 그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게 하시려고 성경책을 그렇게 많이 읽히도록 하신 것이리라.
성경은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 답을 제시해주려고 의도된 책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책은 윤리책이 아니다. 물론 성경에도 선을 행하라고 가르침으로써 도덕적인 삶을 살 것을 교훈하고는 있다. 그러나 도덕적인 삶을 살 것을 교훈하는 이것만이 성경의 참된 기록 목적이라 할 수 없다.
(대하 24:16) 무리가 다윗 성 열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저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 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시 14: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34: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시 37: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시 37:27)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잠 31:12)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
(전 3:12)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전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렘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마 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막 3: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롬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롬 2: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 성경의 어떤 구절애서는 이스라엘에 대적하는 자들의 어린아이까지도 모조리 진멸할 것을 명하고 있어 매우 잔인하고 따라서 비윤리적인 모습까지도 드러내어 보이고 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읽는 자들 중에는 성경이 비인도적이라는 평을 하며 비난하는 자들도 있다.
(신 20:1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신 20:17)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성경을 읽은 자들이 이 성경을 통해 감동과 은혜를 얻는 자와 그 반면에 이 성경에 대해 반감과 비난을 퍼붓는 자로 나뉘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홍해바다가 갈라진 그 사건에 대해 이를 역사적으로 분명히 있었던 사실로 받아들이는 자와 그것이 과학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부정하는 자로 나뉘는 그 이유는 또 무엇일까?
예수께서 베푸신 오병이어의 이적을 기록한 그 이야기에 대해서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부정하는 사람들로 나뉘는 그 이유는 또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그 때에 모든 사람들에 대해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자와 그렇게 하지 않을 자로 구분하셨다. 이 일은 아직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의 일이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스스로 계신 자이시다. 원인을 원인으로 가지지 않으신 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미 계획하셨고 그 계획하심에 따라 그 모든 것이 있었다. 이를 ‘창조’하셨다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미 그 모든 것의 되어져갈 바를 현재로 아신다. 그러므로 사람인 아담의 범죄할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이미 지식하고 계셨다.
아담의 범죄함으로 그 후손된 자들은 모두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 죄인된 자들 중에서 하나님은 이미 구원하여 살리실 자를 지정하신 것이다. 이를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한다. 선택되지 않은 죄인들을 그 죄인된 자리에 그냥 두신 이것을 ‘유기’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을 ‘유기된 자’라고 하고, 선택을 입은 우리들을 ‘선택된 자’라고 한다. 이렇게 선택하고 유기하는 이 일을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라고 칭한다.
성경을 읽는 자들 중에서 그가 선택된 자에 해당하느냐와 유기된 자에 해당하느냐에 따라 그 반응이 달라지는 것이다. 선택된 자는 성경을 통해 은혜를 얻지만 유기된 자는 성경의 이런 기록에 대해 반감을 느끼고 비난을 가하는 그 자리에 선다.
유기된 자라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사업과정에서 그 족속들의 호흡이 있는 자는 모두 진멸하라는 그 명령에 대해서 인본주의 입장을 취하며, 그런 하나님을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비난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그러한가?
성경은 은밀한 비밀을 전달해주고 있는 책이다. 비밀이라는 것은 드러내어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아군만이 알아야 하는 암구호처럼 그렇게 비밀스런 말로 기록된 것이 성경책이다. 그래서 성경은 유독 많은 비유로 기록되어 있다. 예언서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런 비유로 채워져 있다. 성경은 왜 이런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인가?
그 답을 예수께서 명쾌하게 밝히셨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 유형에 관한 말씀을 큰 무리의 사람들에게 전하실 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사용하셨다.
(마 13: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마 13: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마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이 때 제자들이 어찌하여 이같이 비유로 말씀하시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고, 오직 너희만 알도록 하려함이니라”고 답하셨다.
(마 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성경의 이야기는 천국의 비밀에 관한 것이니 이 비밀을 선택된 자들만 알아듣고 이 말씀대로 움직여야하지 유기된 자들까지 알아듣고 대응하게 된다면 낭패가 될 일이다. 구원을 받아야할 선택된 자들만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이 땅에서 성화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만약 구원받기로 정해지지 않은 자들까지 이 말씀을 알아듣고 움직인다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일이 어찌될까?
선택되지 못한 자들까지 구원에 동참하게 된다면 구원의 결과로 이루어질 그 천국은 난장판이 될 것이다. 여전히 죄인인 그 속성을 지닌 자들이 천국에 입성한다면 그 천국은 천국이 되지 못한다. 그곳은 오직 선함만이 존재해야하는 공간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에 악한 성품이 있는 죄인들에게는 결코 허용될 수 없는 공간이다. 따라서 선택되지 못한 죄인들에게는 그 복음의 효력이 미치지 못해야한다. 그래서 비유로 말씀하셔야만했다.
정말 그랬다. 주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실 그 당시에는 선택되지 못한 자들이 귀를 막고 눈을 감아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눈으로 보지 않으려고 했다. 이 모습에 대해 주님은 그들이 주님의 그 사역을 보고 들어서 돌이켜 주님에 의해 고침을 받게 될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표현하신 것이다.
구원받지 못할 죄인들의 습성이 그렇다. 그들 스스로 그 죄악한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하니 그들이 최후의 심판 날에 정죄 당함이 마땅한 것이다.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택하심을 입은 우리는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그 비유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바르게 알고 그 말씀에서 은혜를 받는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의존하여 우리의 삶이 성화하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애를 쓰게 된다.
주님께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하셨는데, 이 일들이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물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공감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아니 그러한가?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면 성경은 과연 어떤 식으로 이 비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가?
성경 이야기 속에 지팡이라는 물건이 자주 등장한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 지팡이에 별다른 뜻이 있을 수 없다. 단순히 길을 갈 때 힘이 들지 않도록 보조하는 물건정도로 생각하거나, 때로는 험한 산길 같은 곳을 지날 때 짐승들을 만나면 그것들을 퇴치할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택된 자의 눈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이 지팡이가 다르게 다가와야 한다.
야곱의 지팡이가 그렇다.
에서의 복을 가로채고 외삼촌 라반에게로 도망가는 그 길에 오직 그가 의지한 물건은 그의 지팡이였다. 그가 돌아올 때 하나님 앞에서 고백한 그의 기도에 이 지팡이가 언급되고 있다.
(창 32: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창 32: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창 32: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이 자신의 지팡이만 의지하여 나아갔다는 것은 곧 주님만을 의지하고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지팡이는 주님을 상징한다. 오직 주님만 의지한 채 홀로 떠난 그 나그네 길이 결국은 두 떼나 이루는 복을 얻고 돌아왔다. 이는 신실하게 주님만 의지한 믿음의 백성된 자에게 임할 그 복을 상징한다. 성경은 이렇게 우리의 구원에 대한 그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책이다.
출애굽기에서는 이 지팡이에 대한 비밀이 조금 더 그 정체를 드러낸다. 바로 모세와 아론의 지팡이이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지팡이를 들고 섰다. 하나님께서 그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 하셨다. 그랬더니 그것이 뱀으로 변했다.
바로의 왕관에는 자신을 상징하는 그 문양이 뱀이다. 이 순간 하나님이 지팡이를 뱀으로 변환시키시고 모세로 하여금 그 뱀의 꼬리를 잡게 하신 것은 장차 모세가 그 바로를 장악하게 될 것을 상징한다.
뱀을 잡을 때 그 목을 잡아야 물리지 않고 안전하게 뱀을 잡을 수 있는데, 하나님은 위험하게도 뱀의 꼬리를 잡으라 하셨다. 이는 잘못하면 뱀에게 물릴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으니 두려운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모세는 그의 손을 내밀었고 그것이 다시 지팡이, 즉 안전한 의지할 물건으로 다시 돌아 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의지할 지팡이이신 그 주님을 보내주셨다. 주를 의지하는 그 믿음만 있으면 우리 앞에는 우리를 두렵게 할 그 어떤 존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모세의 이 지팡이를 통해 하나님은 모세에게 열 가지 이적을 바로 앞에 보이셨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보이셨던 그 많은 이적이 이미 이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 예표되고 있었던 것이다.
믿지 않는 자라면 이와 같은 장면들에서 모세의 그 지팡이를 무엇으로 생각했을까?
모세에게서의 그 지팡이를 마술사가 사용하는 그런 정도의 지팡이로만 생각하지 않았을까?
(출 4: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출 4: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출 4: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출 4:5)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
(출 4: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모세가 애굽을 향해 떠났을 때 그가 의지한 그의 손에 잡힌 그 지팡이를 성경은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이는 우리에게 구원의 큰 능력을 베푸실 그 주님을 예표하는 지팡이임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다.
(출 4:20)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여 애굽 술사들의 그 뱀들을 삼키게 했다. 이는 바로를 상징하는 그 뱀을 삼킴이니 하나님의 권능이 바로를 압제할 것에 대한 예표였고, 이는 장차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님이 사단을 이기시고 승리하실 것에 대한 암시였다.
(출 7:10)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된지라
(출 7:11)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
(출 7:12)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모세의 10가지 재앙에서는 모두 모세가 그 지팡이를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성부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은 성자하나님이신 주 예수의 사역이 성부하나님에 대한 순종, 즉 성부하나님의 도구와 같은 순종의 사역이었음을 드러내고 있음이다. 모세의 지팡이를 이용한 이적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한 순종의 그 사역이었다.
(출 7:17)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인하여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하수를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출 7:1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하수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펴라 하라 그것들이 피가 되리니 애굽 온 땅에와 나무 그릇에와 돌 그릇에 모두 피가 있으리라
(출 7:20)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하수를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출 8: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강들과 운하들과 못 위에 펴서 개구리로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라 할지니라
(출 8: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하기를 네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치라 하라 그것이 애굽 온 땅에서 이가 되리라
(출 8:17) 그들이 그대로 행할새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 손을 들어 땅의 티끌을 치매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생축에게 오르니
(출 9:23)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뇌성과 우박을 보내시고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우박을 애굽 땅에 내리시매
(출 10:13) 모세가 애굽 땅 위에 그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동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시니 아침에 미쳐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 들인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던 날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이 지팡이였다. 이는 그들이 지팡이에 의존하여 먼 길을 떠남이었다. 그들이 그 지팡이를 멋으로 들고 갔을까?
그들이 노예와 같은 죽음의 삶에서 참 삶의 길을 찾아 떠날 때 의지한 것이 이 지팡이였으니 이 지팡이는 진실로 우리를 살리실 그 주님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지팡이를 잡은 것은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그 광야 길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출 12: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홍해 바닷가에 다다른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의 앞에는 사단의 군대를 상징하는 애굽의 그 두려운 군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이스라엘을 위해 모세는 그 지팡이를 들어 홍해가 갈라지게 했다. 살길이 열린 것이다.
이는 사단의 권세 아래에 놓여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된 우리에게 살길을 열어주신 주님의 그 사역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었다.
(출 14: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투를 치를 때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꼭대기에서 기도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든 손을 들고 있으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패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 장면을 읽었다면 그냥 어이없다고 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음의 백성들이 이 글을 읽으면 그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서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분명히 깨닫는다. 오직 믿는 자는 하나님의 지팡이인 주를 의지하여 기도하면 그가 능히 사단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할 것에 대한 그 암시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은혜를 얻는다.
우리에게 이 같은 은혜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출 17: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이 지팡이는 민수기에 이르러 그 비밀을 더욱 아름답게 드러낸다. 모세의 지팡이에서 순이 나고 꽃이 피더니 결국 살구나무 열매가 열린 것이다. 분명히 아론의 그 지팡이는 죽은 나무였다. 아론이 오랫동안 짚고 다닌 것이니 그것이 살아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 죽은 나무에서 열매가 맺히다니!
구원에 이르지 못할 유기된 자라면 이것이 성경이 거짓이라는 증거라고 박수를 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랴!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그 비밀이 숨겨진 책이라는 것을!
죽은 나무에서 순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가 맺혔다는 것은 죄로 인해 죽어있는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살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징표인 것을 !
(민 17:8)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 안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여기서 등장하는 '살구나무'(솨케드)란 '깨어 있다', '지키다'는 뜻의 히브리어 '사카드'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의미 속에는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살리실 것에 대한 약속이 분명히 담겨있음이다. 우리말로는 ‘살구나무’라고 번역되어있지만 실제로는 ‘아몬드나무’이다. 이 아몬드나무는 이른 봄에 피는 것이니 우리를 빨리 살리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그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나무라 할 것이다.
지팡이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져간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기록된 스가랴 선지자의 글에서 다시 지팡이 이야기가 등장한다.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그 땅의 백성들이 장수하는 복을 누리는 그 날에 늙은이들이 각기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믿지 않는 자가 이글을 본다면 그 땅에 장수하는 자가 많아지게 되어 늙었으니 힘이 없어 지팡이를 짚는 자가 많아진다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장면에서 아무런 감동도 은혜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믿는 믿음의 백성들은 이 말씀에서 은혜를 얻는다. 그 땅이 장수의 복을 누림은 주께서 베푸시는 은혜인데, 그 날에 그들이 지팡이를 잡는다는 것은 그제야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주를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그 장면이다.
그 옛날 교만하여 이방신들을 섬기며 주를 떠났던 그들이 이방나라의 포로로 살았던 그 불행한 삶을 마감하고 주와 함께하는 복된 삶을 살게 되는 이 장면이야말로 가장 복된 삶이라 할 것이다. 이 복이 믿는 믿음의 백성들에게 임할 것이라는 것이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니 이 어찌 기쁜 소식이 아닌가!
(슥 8:4)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가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 많으므로 각기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젊었을 때는 힘이 있으니 자연히 그 사람은 자신의 그 힘을 의지한다. 그래서 그 때는 지팡이가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그 힘이 사라지면 그때는 의지할 것을 찾으니 그것이 지팡이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능력 있다 할 때, 즉 교만한 그때는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힘이 약하여지고 그래서 겸손을 알게 되면 그 때서야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긴다. 나이 들어 지팡이를 잡는 것은 그때에서야 바르게 깨닫고 하나님을 의뢰할 것에 대한 상징이다. 이런 삶은 후회뿐인 어리석은 삶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선지자들의 이러한 가르침을 이스라엘은 외면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셔서 다시 직접 말씀하셨을까!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신 것은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겠다는 하나님의 그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래도 그때의 이스라엘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눈을 뜨고 귀를 열어 말씀을 듣고 깨달아라는 것이 주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 듣게 하신 그 이적들의 행하심이었다. 우리가 그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눈이 멀고 귀가 막힌 채로 산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크게 상심하시고 가슴 아파하실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전도여행을 떠날 때 주머니나 두 벌 옷뿐만 아니라 지팡이조차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세상적인 그 어떤 것도 의지할 것이 못되니 금하라 하심이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그 이전까지는 주님을 상징하는 그 지팡이를 의지하고 나아갔으나 이제는 그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이 실현되었기에 그림자인 그 지팡이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마 10: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눅 9: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마가복음에서는 그 모든 것을 가지지 말되 지팡이는 가져가라하신다. 왜 이렇게 상반되는 다른 표현을 하고 있을까? 정말 성경이 잘못 기록된 것일까?
마가복음에서는 지팡이만 예외로 허락하신 것은 주님의 그 말씀만 의지하고 나아가라는 의미에서의 주님의 말씀만을 상징하는 그 지팡이이다. 이제 우리가 의지할 것은 주님의 그 말씀뿐이다. 말씀의 지팡이를 굳게 붙잡고 나아가라.
(막 6: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물으셨다. 네가 보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보이신 것은 살구나무가지였다. 이 살구나무가지가 무엇이던가!
그 옛날 그들의 조상이 광야를 지나던 날에 아론에게 의지할 지팡이로 삼으라고 주셨고, 그것에서 살구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던 그 살구나무가지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살리시겠다는 그 약속을 이 순간에 예레미야에게 다시 한 번 말씀하신 것이다. 이 족속들을 구원하여 살리겠다는 그 말씀이 허언이 아니고 반드시 이루어 지키실 것을 확정하여 말씀하심이다.
가까운 시일에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는 선지자들의 그 예언의 말씀대로 성취하심으로 “내 말을 지키실”것을 의지하심이었고, 멀게는 훗날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심으로 당신의 말씀을 지키실 것에 대한 그 의지를 표명하심이었다.
결국은 이스라엘이 이방 족속들에 의해 고난당하는 그것은 그들을 구원하여 살리시는 그 과정일 뿐이므로 결국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그 약속을 지키실 것에 대한 확언이시다. 이 약속은 또한 우리를 반드시 구원하여 살리실 것에 대한 또 다른 약속을 암시하고 있는 말이다.
(렘 1: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렘 1: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아론의 싹 난 이 지팡이의 의미가 성막의 등대에 고스란히 옮겨졌다. 성막을 허락하신 그때에는 아론의 이 지팡이는 이미 법궤 속에 안치되었고 그 역할은 등대로 옮겨졌다. 등대는 아론의 그 지팡이에서 피어난 그 꽃의 문양이 새겨져있었다.
(출 25:31)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출 25:32) 가지 여섯을 등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그 세 가지는 이편으로 나오고 그 세 가지는 저편으로 나오게 하며
(출 25:33) 이편 가지에 살구 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편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같게 할지며
(출 25:34) 등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출 25:35)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고
(출 25:36)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하게 하여 전부를 정금으로 쳐 만들고
(출 25:37)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출 25:38) 그 불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들지니
(출 25:39) 등대와 이 모든 기구를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출 25:40)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
등대는 성전에서 어둠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성전 안에 들어감은 거룩하게 됨을 상징하니, 이 등대는 거룩한 자를 빛으로 인도하신 주 예수를 암시하는 성물이 되었다.
그래서 이 등대는 주님의 공로로 거룩하게 된 믿음의 백성들을 인도하신 그 주님이신 예수를 상징한다.
아론의 그 지팡이에서 좌우로 가지가 셋씩 벋어 나와 모두 일곱 개의 열매가 맺듯이 그렇게 일곱 개의 등불이 켜질 수 있게 하셨다. 셋씩 벋어 나온 그 가지 하나하나마다 세 개씩의 꽃받침과 꽃이 있게 했다. 등대는 성막에서 어둠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되는 물건이었으니, 이는 어둠에서 구원받을 자들을 위해 주님이신 예수께서 빛으로 오실 것을 예표하고 있었다.
특히 등대가 살구꽃 모양의 형상을 가진 것은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맺힌 그 살구꽃에서 옮겨온 것이다. 따라서 살구꽃 형상으로 등대를 꾸민 것은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는 예수를 모형화한 것이고, 그 빛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성령하나님의 그 사역을 상징한 것이다.
어둠에 갇힌 우리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어주시려고 오신 그 주님을 상징하는 이 등대가 각 가지마다 꽃이 셋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오로지 성자 예수님만의 일은 아니었음을 드러냄이다. 실제로 우리의 구원은 성부하나님의 그 계획하심과 성자하나님이신 예수의 그 구속사역의 실행하심과 성령하나님의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 견인의 사역이 모두 함께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인데, 등대의 좌우 가지마다 꽃이 셋이 있다는 것은 이를 암시한다.
우리를 구원하심은 삼위일체의 사역이지만 그 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성자하나님이신 예수의 그 지상 사역이시다. 등대의 역할이 어둠을 밝히는 그것에 있음에서 성자하나님의 그 사역이 부각되고 있다. 특히 이 등대를 만들 때 그 재료가 정금이니 이는 주 예수의 그 사역하심의 고귀함이 그 정금으로 특징되고 있음이다.
등대를 왜 쳐서 만들라 하셨을까?
이 등대를 정금으로 만들라 하심은 주님의 죄 없으심과 그의 순수하심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다. 그런데 이 등대를 금을 녹여 부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금 한 달란트를 두드려서 만들었다 한다. 망치로 수없이 두들겨 패서 만든다는 것은 장차 오실 주님의 지상 사역에서의 그 고난당하실 것에 대한 예표였다.
(사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사 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사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두드림은 고난 받는 그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신 주님의 그 모든 사역이 바로 그 고난의 사역이 아니었던가!
형제들에게까지 조롱받고,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시고,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으시더니 끝내는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그 무거운 십자가를 끌고 가셔서 그 모진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고난이 등대를 쳐서 만드는 그것으로 예표되고 있었다.
등잔이 일곱 개의 빛을 발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주님의 그 지상 사역이 완전하실 것에 대한 암시였다.
이 약속은 주님의 지상 사역을 통해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고, 그 최종적인 완성이 장래에 정한 날에 이루어질 것이 약속되었다. 그 약속의 기록이 요한계시록에 등장한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등잔 일곱을 가진 등대가 요한계시록에 일곱 등불 켠 것으로 다시 등장한다. 이는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그 약속하심이 한결같음을 각기 다른 성경의 기자들에 의해, 각기 다른 시대에 동일하게 기록된 이것으로 증명해 보이고 계심이다.
(출 25:35)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고
(출 25:36)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하게 하여 전부를 정금으로 쳐 만들고
(출 25:37)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계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명하신 금 촛대, 즉 성소에 사용되는 등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예표했다. 이 사역은 특별히 오실 주님의 그 구속사역에 보다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제 주님의 지상 사역이 끝나고 재림 하실 때까지는 그 사역이 성령하나님의 사역으로 승계되었고, 교회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그 역할을 대신하여야하는 책임 하에 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금 촛대는 주님의 구속사역을 대신 수행하여야하는 그 교회를 상징한다. 교회는 주님을 대신해서 이 땅에 창세전에 하나님이 이미 선택하셔서 구원하시기로 정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게 하는 그 사역을 감당하여야 한다.
그래서 일곱 금 촛대는 그 사명을 감당할 교회로서의 우리들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 그 금 촛대 사이에 예수께서 서 계심은 이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와 늘 함께 하심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주께서 늘 함께하실 것이다.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선택된 자를 구원에 이르도록 부르는 일이기에, 이 일을 함에 있어서는 사단과의 영적 전투는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싸움은 교회가 홀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영적 전투이기에 반드시 승리한다.
결국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난 사건은 단순히 그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한정된 사건이 아니라, 구속사 전체에 걸친 우리를 살리실 것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으로서의 사건이었고, 그 이야기는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에까지 연결되어 하나님의 구원 언약에 대한 성취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에 대한 그 약속을 예표한 사건이었다.
(계 1: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계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 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실 그것에 대해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노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를 확정하셨다. 이 같은 놀라운 은혜의 비밀을 간직한 책이 바로 성경이다.
(요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그러하니 우리에게는 이 성경책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이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노라,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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