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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의 축복기도

by 영동장로교회 2022. 11. 6.

2022. 11. 6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이삭의 축복기도”

 

흔히 구약을 그림자에 비유한다. 그만큼 구약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감추고 있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것이 아가서이다. 구약의 아가서는 그냥 진한 연애편지다. 더더군다나 그 속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 1:1) 솔로몬의 아가라

(아 1: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아 1:3)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아 1: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아 1:9)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아 1:10)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아 1: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아 1:12)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아 1: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아 1: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아 1: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아 1: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그런데 그것이 구약의 39권 중의 한 권으로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아가서가 성경으로서의 한 권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분명히 그 속에 하나님의 모습이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약은 바로 보아서는 쉽게 알기 어려운 은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창세기 27장에 등장하는 이삭의 가정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다. 얼핏 보면 아버지 이삭과 그 어머니 리브가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의 불화를 다룬 이 이야기는 그 가정의 어느 한 날의 이야기일 뿐이다. 흔히 있을법한 이런 사소한 이야기가 성경책에 기록되어있다. 이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될만한 그런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삭이 나이 많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의 장자에게 축복해주려는 것을 리브가가 알고 나서 차자인 야곱으로 하여금 그 형 에서를 대신하여 축복기도를 받게 해주려고 모의한 것이 이 사건이다. 믿음의 가정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일어날만한 그런 사건이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비록 리브가가 자신이 야곱의 번성에 대해 계시를 받았더라도 그 일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인간적인 사악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렇게 해석함으로써 그들은 이 사건의 기록이 단순히 도덕적 교훈을 의도한 정도에 머무르는 기록이라고만 해석하고 있다.

(창 25:21)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창 25: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주석가들이 이렇게 해석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결코 사악한 방법을 동원치 않으신다는 그 원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리브가와 야곱의 비열한 그 간계만을 도덕적 차원에서 지적하여 교훈하시기 위함이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된 것이 그런 정도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우리에게 단지 도덕적 교훈만을 해주시기 위해 그렇게 기록되었을까? 정말 또 다른 의도는 없는 것일까?

 

구약은 그림자라고 했다. 따라서 이삭의 가정에서 일어난 그 한날의 사건에도 분명히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구원에 관한 비밀이 담겨져 있다. 지금부터 이 사건의 기록을 따라 가보자.

 

이삭이 늙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 날에 그의 장자에게 축복기도를 해주려고 의도한 것으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일을 실행하려고 이삭은 그의 장자 에서를 불러 자신의 의도를 이야기했다. 그러면 그가 왜 에서에게만 축복기도를 하려고 했을까?

(창 27:1)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창 27:2)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창 27:3)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창 27:4)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복기도를 해주려고 하는 이 생각에 별다른 의미가 있을까 하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그림자처럼 들어있다.

하나님은 애초에 우리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려고 우리를 이 땅에 창조해내셨다.

 

우리 사회에서는 예전에 아들 선호사상이 강했다. 아들을 원했던 것은 나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그 생각 때문이었다. 대를 잇는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이 이어져나감을 의미한다. 이는 나의 소중한 그 모든 것을 물려주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아비는 그 자식을 위해 목숨을 다하여 좋은 것으로 채워주려고 한다. 어쩌면 이 본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고자 하시는 그 마음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심어주신 것일지도 모른다.

 

이삭도 하나님의 주시는 그 복이 자신의 대에서 끝이 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 복이 대를 이어 그의 장자 에서를 통해 이어져가기를 바란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실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게 하려 하심과 같은 의미이다.

 

만약 이삭의 대에서 하나님의 복 주심에 대한 그 기억이 멈추어 버리고 그 후대에는 그 기억이 없어진다면 그 후손들이 하나님을 기억이나 할 수 있을까?

 

이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일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겠다는 그 약속에 대한 기억이 끊임없이 대를 이어 내려가서 기억되어야한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어져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그러하신 뜻이 이삭이 하려는 축복기도 속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삭이 축복기도에서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한 것은 바로 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드러낸 것이다. 곡식은 곧 떡을 얻는 재료가 됨이니 이는 우리를 살리실 떡이신 그 주님에 대한 그림자이다.

 

포도주 또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을 상징하니 떡과 포도주가 있게 해달라는 이 기도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를 수 있게 해달라는 그 의미가 됨이다.

 

따라서 이삭의 그 축복기도는 “내가 주의 은혜로 구원에 이를 자의 자리에 선 그 복을 누렸듯이 이 내 아들에게도 그 복이 임하게 하옵소서”라는 그 기도였다.

 

구원하여 살리실 그 복이 후손에게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그 염원이 담긴 것이 이삭의 축복기도였다. 그러므로 이삭의 이 축복기도는 하나님의 바라시는 바를 그대로 투영한, 우리에게 구원의 그 복을 주시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그 뜻을 대신한 기도였다.

 

이삭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지만 그가 맏아들 에서에게만 축복기도를 해주려한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맏아들 에서가 사내다워서 특별히 이뻐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삭은 편애를 한 문제 있는 아비였을 것이다. 얼핏 보면 이삭의 가정에 일어난 형제간의 불화는 그 아비 이삭의 그 편애가 원인인 것처럼 보인다. 편애가 문제아를 만들었구나 하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주석가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여기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숨겨져 있다.

 

장자는 자기 소유에서 두 몫을 줄 만큼 비중 있게 여겨졌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땅을 다스리게 하실 때 그에게 복을 주시면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생육하고 번성하는 이 일의 시작이 바로 장자를 낳음으로 시작되니 자손이 번성할 그 복은 장자를 얻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 장자는 자손이 번성하는 그 복의 시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자란 바로 자기 기력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장자 되는 자에게는 특별히 두 몫을 챙겨주라고 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장자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이어져 가기를 바라셨다. 특별히 이스라엘을 장자의 나라로 세우심이 그런 의도하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신 21: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그래서 이삭은 자기 기력의 시작인 에서를 더 소중히 여겼고, 그 장자 된 에서를 불러서 그에게 축복기도를 해주려고 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그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야 할 참 장자가 누구일까?

 

사단의 권세 아래 사로잡혀 종노릇하는 그런 자들일까, 아니면 중생함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구원받은 믿음의 백성들일까?

 

하나님은 구원받을 백성들의 수가 충만할 때까지 이 땅의 심판을 미루고 계신다. 그러하니 이 장자는 구원 얻을 우리를 상징하고, 장자에게 그런 복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주실 복이 그러하다는 것을 암시함이었던 것이다.

(계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계 6: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계 6: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롬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이스라엘에서는 장자를 제사장권과 왕권을 물려받는 존재로 여겼다. 족장시대에는 가장이 그 가정의 제사장직을 수행하였고, 그 제사장직은 장자가 계승했다. 또한 가장이 그 가정의 모든 것을 다스렸으니 이는 왕의 그 권능과 같다. 전시에는 장자가 그 가정을 지휘할 수 있었으니 아비의 그 왕권이 장자에게로 계승되었다.

 

이삭이 장자 에서에게 축복기도를 해주겠다는 것은 그에게 이 제사장권과 왕권에 대한 복을 승계시켜준다는 그 뜻이 됨이다. 제사장권과 왕권의 이양은 구원의 결과를 통해 얻어지는 그 복을 넘겨줌이다.

 

따라서 제사장권과 왕권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담보가 되는 그 일이다. 그래서 구원 얻음이 이 땅을 사는 자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이 된다. 장자에게 이 복이 이양됨은 믿음 안에서 장자 된 믿음의 백성인 우리에게 이 위대한 복, 즉 구원을 얻는 그 복이 주어질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장자로 세우셨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이방인이었던 우리를 믿음 안에서 장자로 세우셨다.

(출 4: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시 89:20)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

(시 89:21) 내 손이 저와 함께 하여 견고히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이다

(시 89:22) 원수가 저에게서 강탈치 못하며 악한 자가 저를 곤고케 못하리로다

(시 89:23) 내가 저의 앞에서 그 대적을 박멸하며 저를 한하는 자를 치려니와

(시 89:24)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저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을 인하여 그 뿔이 높아지리로다

(시 89:25) 내가 또 그 손을 바다 위에 세우며 오른손을 강들 위에 세우리니

(시 89:26)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시 89:27)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

 

그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셨다. 장자에게 상속되었던 제사장권과 왕권이 우리에게로 돌려졌으니 우리를 장자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칭하신 것이다. 실제로 그 날이 되면 우리는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이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계 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계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계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히 12: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그런데 우리가 또 하나 주목하여야할 것은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니 야곱이 형 에서로 변장하여 그 아비 이삭을 속일 수 있었다.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을 감동시킬 정도로 믿음이 탁월했던 그 이삭인데, 단지 나이 많아 늙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의 시력을 그렇게까지 좋지 않게 하셨을까?

 

아브라함은 나이 많았을 때도 시력에 문제가 없었고, 모세도 죽는 그 순간까지도 시력에 문제가 있었다는 표현이 없다. 유독 이삭에게서만 시력이 좋지 못해 사람을 분간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분명히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이 행위언약을 어기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그 공의가 집행되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대면한 자는 바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삿 6:21)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삿 6: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삿 6: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는 바로 죽음을 당하지 않았고, 죄인 된 우리도 여전히 이 땅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 삶이 끝나는 그날에는 모두가 죽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죽음을 유예하신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로 하여금 이 땅을 살아가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심이다. 거듭남을 입어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영원한 살 길을 얻게 해주시려고 주신 기회의 시간이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이다. 그렇게 기회를 주신 것은 죄를 범함으로써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우리를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시므로 우리를 살리시려고 당신의 공의를 집행하실 것을 일부러 늦추신 것이다.

 

죄인 된 자의 그 죄를 일부러 모른척하시며 짐짓 눈을 지그시 감으신 채, 죄인 된 우리를 위해 그 모든 죄를 대신 지는 그 일을 성자하나님께 슬며시 맡기셨다. 당신의 독생자가 감당해야할 그 모진 고난을 성부하나님은 모르시고 그리하셨을까?

 

모른 척 하시면서 그 일을 맡기실 때 성부하나님의 그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그 짐을 맡아 고난의 길을 가야할 성자하나님은 또한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아셨지만 오로지 우리를 살리시려는 그 한 마음에 모른 척 눈을 감아주신 성부하나님이 아니신가!

 

이삭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우리 죄를 모른 척하시며 눈 감아 주신 하나님의 그 모습을 상징한다. 결국 이삭의 눈을 어둡게 하신 것은 바로 우리를 상징하는 그 야곱을 부르시기 위함이었다. 이삭이 눈이 밝았더라면 그가 변장한 야곱을 몰라볼 리가 있었겠는가?

 

그랬더라면 야곱이 에서를 대신해서 축복기도를 받아낼 수 있었을까?

야곱이 축복기도를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그 복을 얻지 못함을 뜻함이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는 그 복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가장 불행한 자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두고 보실 수 있었을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의 눈을 나이 많아서라는 이유로 어둡게 하셨다. 그렇게 하심은 “내가 너를 살리려고 나의 공의를 집행해야 하는 그 일을 잠시 모른척하고 눈을 감아 미루려함이다”라는 그 마음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그렇게 이삭의 눈을 어둡게 하셨을 것이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이삭이 그의 맏아들 에서를 불러놓고 말하는 그 때, 그 아내 리브가가 그 말을 들었다. 리브가는 두 아들 중에서 동생인 야곱을 끔찍이 아꼈다. 그래서 에서 대신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게 만들었다. 리브가가 왜 야곱을 그와 같이 소중히 여겨 챙겼을까?

(창 27:5) 이삭이 그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창 27:6) 리브가가 그 아들 야곱에게 일러 가로되 네 부친이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창 27:7)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창 27:8)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창 27:9) 염소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창 27:10) 네가 그것을 가져 네 부친께 드려서 그로 죽으시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리브가가 에서보다 야곱을 더 사랑하여 아낀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사내다운 면에서는 야곱보다는 에서가 더 탁월했다. 아들다운 아들을 선택한다면 에서를 선택해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더 아낀 것은 죄인된 자들 중에서 더 나을 것이 없는 우리를 주님께서 선택해주실 것에 대한 예표였다.

 

따라서 야곱에 대한 리브가의 그 사랑은 바로 우리에 대한 주님이신 예수의 그 사랑을 암시하고 있다. 주 예수께서 죄인인 우리를 살리시려고 이 땅에 오시고 그 모진 고난을 당하신 그 사랑이 이삭의 가정에서 있었던 야곱을 향한 그 어미 리브가의 그 사랑으로 표현되고 있다.

 

야곱에게는 그 아비 이삭으로부터 축복기도를 받을 만한 공로가 있던가!

 

그는 장자도 아니었기에 축복기도를 받을 자리에 있지 못했다. 더더군다나 그의 삶에서 어디 흠모할만한 그런 아름다운 모습이 보였던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형의 그 자리를 탐하여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온 자가 아니던가!

 

그것도 모자라 형의 장자 명분을 팥죽 한 그릇으로 빼앗은 사기꾼 같은 자가 야곱이었다. 이 모습은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그 삶을 살았고, 그래서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그 기도도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그 복을 달라고 떼를 쓴 우리들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야곱이었다.

 

애초에 하나님이 선택하신 장자는 이스라엘이었다. 따라서 장자 되지 못한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장자에게 주어질 그 복을 얻게 하시려고 우리를 장자 된 이스라엘 대신 구원할 자로 불러주신 것이다.

 

야곱을 사랑한 리브가의 그 사랑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던지신 주님의 그 사랑을 예표한 것이다. 리브가의 사랑이 주님의 그 사랑을 예표한다 할 수 근거가 야곱을 향한 그녀의 말에서 드러난다.

 

야곱에게 에서로 변장하게 하여 아비를 속이는 그 일에 대한 그 책임을 전적으로 자신에게 돌리라는 그 말은 우리의 그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져주신 주님의 그 모습과 같다. 그래서 리브가의 그 모습에서 오실 주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창 27:11) 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창 27:12)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창 27:13)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리브가는 야곱에게 염소의 좋은 새끼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삭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겠다고 했다. 이는 이삭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그가 기쁜 마음으로 축복기도를 해줄 수 있게 하려함이었다.

 

염소의 좋은 새끼가 무엇이던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을 때, 그 죄에 대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자신의 그 죄를 대신할 속죄물로 양이나 염소의 어린 새끼를 취하여 그것에 안수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전가시키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게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죄에 대하여 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

 

리브가가 야곱에게 염소의 좋은 새끼를 선택해서 가져오라 한 것은 바로 이 죄 사함을 위한 그 제사에 대한 상징이었다. 야곱이 자원하여 염소의 좋은 새끼를 잡아서 드린 그것으로 이삭을 기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진정한 회개를 담은 어린 양이나 염소를 드린 그 제사를 상징한다.

 

이 제사는 분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가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기쁘신 마음으로 그 죄인의 죄를 사하실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삭은 기쁜 마음을 담아 야곱에게 축복기도를 한 것이었다.

(창 27:9) 염소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야곱이 그 아비 이삭으로부터 축복기도를 받는 그 일에서 그의 공로가 있었던가?

 

이삭이 축복기도를 해줄 것을 미리알고 야곱이 그 준비를 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그때 그 어미 리브가가 그를 불렀고, 그 어미가 시키는 대로 좋은 염소새끼 한 마리를 가져왔을 뿐이다.

 

형 에서는 들판에 나가 힘들여서 사냥을 하여 준비한 것을 그는 자기 집 울타리 안에 있는 염소 떼에 가서 손쉽게 한 마리를 가져왔을 뿐이다. 요리도 그 어미 리브가가 했다. 그의 손목에 털을 씌워준 것도 그 어미였고, 에서의 옷을 찾아 입혀준 것도 그 어미였다.

 

그에게는 에서에 비하면 공로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그 어미가 준비한 것으로 그 아비 이삭이 주는 축복을 모두 가져왔다. 장자에게 주는 복이 그의 것이 되었고, 그 가정의 왕권이 그에게로 넘어 왔다.

 

이는 우리가 구원 얻는 그것에 우리의 공로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은 모두 주 예수의 공로가 아니던가!

 

우리는 주님의 그 공로를 우리의 것으로 하여 그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이다. 야곱이 아비 이삭의 축복을 얻기 위해 드린 모든 것이 그 어미 리브가가 이룬 공로였듯이...

(창 27:14) 그가 가서 취하여 어미에게로 가져왔더니 그 어미가 그 아비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창 27:15) 리브가가 집 안 자기 처소에 있는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창 27:16) 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미고

(창 27:17) 그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매

 

자기 앞에 선 자가 누구인지를 이삭이 확인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기로 선택된 자인지 아닌지를 볼 것이다. 그리고 이삭처럼 그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라고.

 

이는 우리가 죄인으로서 구원받을 자리에 설 공로가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능히 구원받을 공로가 있는 자로다 하고 인정하심이다. 우리가 구원받을 공로를 세운 일이 전혀 없는 자라는 것을 하나님이 모르실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예수의 그 공로에 의지하사 우리의 그 공로 없음에 대해서는 눈감아주시는 것이다.

 

이삭이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라고 한 것은 우리가 장자인 이스라엘은 아니지만 이제는 장자로 삼으시겠다는 그 뜻을 암시한다. 장자가 받을 복인 천국의 백성으로 왕 노릇하는 그 자리에 앉히실 것을 암시한다.

(창 27:21)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

(창 27:22)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이삭이 능히 분별치 못하고 야곱에게 축복했다. 정말로 하나님이 무능하셔서 알지 못하고 축복하실까!

 

이는 우리가 죄인임을 다 아시지만 그 죄를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로 하여금 대신 지시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이제부터는 너는 죄가 없다”고 칭의를 선언해주시는 그 일에 대한 암시이다. 죄 없다고 해주심으로써 우리는 의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천국 백성으로 구원에 이르는 그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고 표현하고 있다.

(창 27:23)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네가 에서냐?”라고 묻는 이삭의 물음에 야곱이 “그러하니이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장자 된 그 자리에 있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은혜로 당당히 장자 된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네가 내 장자냐?”라고 물으실지라도 우리는 당당히 “우리가 그러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이 감당치 못할 사랑을 베풀어주신 주의 은혜를 어찌할꼬!

(창 27:24)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에서는 들판에 나가서 짐승을 사냥했다. 들판에 뛰노는 짐승들이니 집에서 키운 염소새끼처럼 깨끗했을까?

 

그의 제물은 하나님 앞에 정결한 제물이 될 수 없었다. 더더군다나 그는 아비 이삭으로부터 주어질 그 축복을 탐하는 사냥을 하고 있었다. 구원을 바라고 선을 행하는 그 선이 참된 선이 될 수 있을까?

 

에서의 그 별미는 진정한 의미에서는 결코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할 별미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는 것은 에서의 그 별미를 준비함일 것이다. 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며, 따라서 구원을 결과하지 못한다. 주 예수의 공로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별미가 된다.

 

그가 야곱 다음으로 아비 이삭에게 자신이 만든 별미를 가져갔으나 축복을 얻지 못한 그것이 이를 상징한다. 주 예수의 공로가 아니고서는 이 땅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그 무엇은 있을 수 없다. 이 사실이 축복을 받기 위해서 쫓아다닌 에서의 그 행위 속에 숨겨져 있었다.

(창 27:30)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창 27:31)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비에게로 가지고 가서 가로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창 27:32)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창 27:33)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사태를 파악한 에서가 방성대곡하며 울었다. 그가 운 것은 구원의 복을 얻지 못하여 하나님과 함께하는 천국의 백성된 자리에 서서 영원토록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그 삶을 사는 기회를 놓쳐서였을까?

(창 27:34)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 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창 27:35)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창 27:36)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창 27:37)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창 27:38)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그에게는 처음부터 그런 마음이 없었다. 그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것도 그 증거이다. 그는 단지 그 땅에서 세상을 추구하는 그 복을 구한 자였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는 모두 그런 삶을 추구한다.

 

이것이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를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이 된다. 선택된 자는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는다. 반면에 유기된 자는 부활을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오직 이 땅에만 그 소망을 두고 살며, 단지 바라는 것은 모두 이 땅에서 누리는 그 복이다. 그래서 소망 없는 그들은 세상의 염려로 가득한 삶을 살아간다. 에서는 그랬다.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마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빌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 4: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이삭의 이 가정사 속에 숨겨져 있었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비밀!

이렇게 하심은 오직 택하신 족속에게만 그 은혜가 주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마음 때문이었다.

 

우리가 무엇이관데 이 같은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