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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에 대하여

by 영동장로교회 2022. 7. 31.

2022. 7. 31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원수에 대하여”

 

 

구약의 시편에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함으로 저희를 멸하소서”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시인이 하나님께 원수를 멸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음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쓴 시인이 누구이던가! 다윗이 아닌가!

(시 54:5)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심지어 다윗은 자신의 원수를 심히 미워한다고까지 고백하고 있다.

(시 139:19) 하나님이여 주께서 정녕히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시 139:20) 저희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헛되이 주의 이름을 칭하나이다

(시 139:2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한하지 아니하나이까

(시 139:22)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이 자신을 죽이려고 따라올 때 회개하는 마음으로 쓴 시가 있다. 자신이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은 지난 날 자신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죄 때문임을 시인하고 그 죄에 대한 회개를 담고 있다. 이 시에서도 그는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라고 쓰고 있다.

(시 143:9)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

(시 143:10)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시 143:11)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시 143:12)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우리가 아는 다윗은 믿음에서는 참으로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그런 위인이다. 이스라엘은 이 다윗을 얼마나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 여기며 존중하는가! 이 다윗의 별을 자신들의 나라 국기에 그려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삼을 정도이다.

 

그런 다윗이 원수를 멸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이 모습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 예수의 가르침에 완전히 위배된다.

(눅 6: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눅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결과적으로는 구약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치고, 신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셈이니 성경은 자기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는 구약은 구약이고 신약은 신약으로서 서로 다른 책이니 따로 분리해서 생각해야한다고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과연 성경은 이런 모순을 안고 있는 책일까?

 

예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이들의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여 깨닫지 못한 결과였다.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명하신적은 없다. 오직 이웃을 사랑하라고만 가르치셨다. 모세가 전하여준 그 율법에 분명히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만 가르치고 있다.

(레 19:16)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 19: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어쩌면 그들이 “원수를 멸하소서”라고 한 이 다윗의 기도에서 원수는 멸해달라고 할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고, 그래서 원수는 미워하라고 그렇게 가르쳤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던 간에 이스라엘은 그 공동체 안에서 원수를 미워하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지 못한 그들에게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바르고 정확하게 확실히 말씀해주셨다. 하나님은 “너희가 너희 원수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기를 원하신다”고 .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과연 예수께서는 원수조차 사랑하시는 그 모범을 직접 보이셨다. 그가 십자가의 그 모진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가는 그 순간에서도 원수를 위해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이 기도 속에는 비록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이 죄를 ‘저희’가 범하고 있지만 그런 저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예수는 성부하나님께 그들에 대한 사죄를 요청하는 그 기도를 하고 계셨다.

(눅 23: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눅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눅 23: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눅 23: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예수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죽이려고 십자가에 매다는 그 일을 하고 있는 자들은 분명히 원수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하는 그 일이 어떤 죄에 해당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행하고 있다 하신다. 여기서 주목하여 볼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저희”는 누구냐는 것이다.

 

같은 문장 속에서 발견되는 ‘저희’에 해당하는 자는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새”라고 한 것에서 보게 되는 예수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은 로마병사들이다. 그들은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를 전혀 모르는 자들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고대한 자들이지만 로마병사들은 그 메시아가 어떤 자인지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십자가에 매달고 있는 이 사람 예수는 단지 십자가형을 당할 정도로 죄를 지은 죄인이고 그래서 그들은 이 일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한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알지 못하고 범하는 이 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12: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눅 12: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고, 알고도 그 뜻대로 행하지 않은 종은 많이 맞을 것이라는 이 말씀에 따르면 이 로마 병사들은 적게 맞을 종에 해당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알지 못하고 행하는 로마병사들을 위해 성부하나님께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성부하나님이 성자하나님이신 예수의 그 기도에 응답하심이었을까?

로마병사들을 대표하는 백부장이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신앙고백인 것이다. 이 고백을 한 그 백부장을 하나님은 외면하셨을까?

 

그는 분명히 구원의 반열에 들어선 자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고 그것을 몸소 행하심으로 보여주신 예수의 그 모범이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원수는 하나님과 원수된 그 사단에 속함으로써 결코 구원 받은 자의 자리에 설 수 없는 그런 자를 말함이 아니다.

 

그런 자들은 분명히 멸망에 이를 것이다. 다만 예수께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그 원수는 세상적인 이해관계에서 원수사이가 된 그런 자를 지칭한다. 그런 원수된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로마의 그 백부장처럼 구원의 반열에 들어 설 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자를 미워하는 내가 천국에 이르는 그 일이 가능할까?

천국은 서로 미워하는 사이에 있는 자 둘이 다 함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둘 중에 하나는 분명히 버림받은 자의 자리에 설 것이다.

 

내가 미워하는 원수가 천국에 이른다면 그것은 내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이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래서 주 예수께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마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막 15: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께서 성부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저희‘의 범주에 로마 병사들만 포함되어 있었을까?

 

그 당시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했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한 이스라엘 모두도 어쩌면 예수가 말씀하신 ‘저희‘에 포함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알고도 행한 그 죄를 범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세상적인 그 욕심을 위해 메시아이신 예수를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 알고도 행한 그 죄를 범한 자들이기에 성부하나님의 그 진노에서 그들은 결코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선동에 따랐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런 자들을 위해서 그 순간에도 기도하셨을 것이다.

 

사도바울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는 분명히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그 죄를 범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의 원수가 되는 그 자리에 있었던 자였다. 그러나 그가 고백한대로 그는 그것이 죄가 되는 일인지를 알지 못하고 행한 자였다. 예수의 십자가상에서의 그 기도로 그는 구원함을 입은 자의 자리에 선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그런데 왜 다윗은 예수의 그 기도와는 정 반대의 입장에 선 그 기도를 한 것인가?

정말로 구약의 그 가르침은 신약의 예수의 그 가르침과는 다른 그런 것인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죄인인 우리를 살리시려고 자신의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셨다. 이 사랑보다 더 위대한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

 

손양원목사님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좌익청년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은 것은 잘 알려진 유명한 실화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그 가르침을 따른 가장 위대한 믿음의 표본이 되셨다.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명을 얻은 이 사례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결단인가를 보여주는 예가 되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공의를 그 속성으로 지니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윗이 원수를 멸해달라는 것은 그가 죄인에 대한 심판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 맡겨드리는 그 일이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자이었다. 자신의 뜻에 따라 죄인을 멸할 수 있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직접 원수를 처벌하는 대신에 그 처분을 하나님께 맡겨드렸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 가르침을 직접 행하심으로 모범을 보이셨던 예수도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심판을 직접 언급하셨다.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33)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마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 12:37)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는 그 일이니 이는 분명히 알고 행하는 그 죄에 해당한다. 이런 죄를 범하는 자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심판을 피해갈 수 없다. 그는 분명히 멸망에 이르는 그 벌을 받을 것이니 이는 영원한 죽음에 해당하는 그 벌일 것이다.

 

예수께서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말한 이 일을 다윗은 “원수를 멸하소서”라는 말로 표현하였으니 과연 다윗은 오실 주님을 예표하는 대표적인 믿음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사울 왕으로부터 심한 핍박과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그 삶을 살았다. 그런 처지에서 사울 왕은 분명히 그에게 원수된 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는 두 번이나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찬스를 맞았으나 그 때마다 그 일을 하나님께 의뢰했다.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고 온 사울 왕에게 “혹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원수에게 베푼 그 사랑을 표현함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원수된 그 사울 왕을 진심으로 미워했더라면 그는 그 찬스를 놓치지 않고 사울 왕을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께서 사울 왕을 자신의 손에 붙이셨고 그와 함께한 자들은 사울 왕을 죽이라고 권하였지만 그는 그 사울 왕을 아꼈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어찌 원수된 자를 아낄 수 있겠는가?

(삼상 24: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혹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였나이다

(삼상 24:11)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삼상 24: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삼상 24:13)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삼상 24: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삼상 24: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삼상 24:16)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삼상 24: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삼상 24: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삼상 24:19)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삼상 24:20)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삼상 24: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라

(삼상 24:22)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다윗에게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찾아 왔다. 그러나 이때도 다윗은 사울 왕을 해하지 않았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자는 여호와이시기에 사울 왕을 죽이는 그 일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 된다. 사울 왕을 직접 죽여 원수 갚는 그 일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다윗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그 잘못을 피할 수 있었다.

(삼상 26: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혔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삼상 26: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 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삼상 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삼상 26:10)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삼상 26: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삼상 26: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삼상 26:13) 이에 다윗이 건너편으로 가서 멀리 산꼭대기에 서니 상거가 멀더라

(삼상 26:14) 다윗이 백성과 넬의 아들 아브넬을 대하여 외쳐 가로되 아브넬아 너는 대답지 아니하느냐 아브넬이 대답하여 가로되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삼상 26:15) 다윗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중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중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삼상 26:16) 네 행한 이 일이 선치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삼상 26:17)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다윗이 가로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삼상 26:18) 또 가로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삼상 26:19) 청컨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인자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날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삼상 26:20) 그런즉 청컨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곳에서 이제 나의 피로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삼상 26:21)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 되었도다

(삼상 26:22) 다윗이 대답하여 가로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삼상 26:23)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삼상 26:24) 오늘날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삼상 26:25)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니 자신이 그를 해칠 수 없다고 한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를 심판할 권이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니 자신은 그 하나님의 권에 순종하겠다는 믿음의 고백이었다.

 

이 다윗의 믿음의 고백대로 이 땅의 누구라도 개인으로서 스스로 원수를 징계할 권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심판을 하실 수 있으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토기장이의 비유를 언급하여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개인으로서 원수를 갚는 그 일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 되고, 결과적으로 이 일은 하나님 앞에 또 다른 범죄함이 되어진다.

(사 30:14) 그가 이 나라를 훼파하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훼파함 같이 아낌이 없이 파쇄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취하거나 물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사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사 64: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렘 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렘 18: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다윗은 하나님의 그 뜻에 대적하는 원수된 자의 심판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리라는 것을 믿었고, 그래서 그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집행될 것을 말하였으니 그것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였다.

 

다윗의 이 말대로 사울 왕은 전쟁터에서 비참한 죽음으로 그의 삶을 마감한다. 사울은 알고도 그릇행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자의 표본이었다. 사울 왕의 그 죽음은 다윗 대신 하나님께서 공의를 집행하신 것이었다. 사울 왕의 그 비참한 최후는 원수에게 갚으시는 하나님의 진노였다.

(삼상 31:1)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삼상 31:2)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쫓아 미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삼상 31:3)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삼상 31:4)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삼상 31:5)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삼상 31:6)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삼상 31:7) 골짜기 저편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편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삼상 31:8)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삼상 31:9)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땅 사방에 보내고

(삼상 31:10) 그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삼상 31:11)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삼상 31:12) 모든 장사가 일어나 밤새도록 가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취하여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와서 거기서 불사르고

(삼상 31:13) 그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나무 아래 장사하고 칠 일을 금식하였더라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고 자신의 원수에 대한 심판을 자신이 직접행하는 대신 하나님께 맡겼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그러하기에 다윗이 그의 시에서 말하고 있는 “내 원수를 멸하소서”라는 것은 개인적인 원수에 대한 복수심에서 나온 저주라고 해석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에 대한 공의의 심판하심이고, 그리하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위엄을 나타내셔서 고난당하는 믿음의 백성들에게 믿음의 희망을 갖게 해달라는 그 기도였을 것이다.

 

이 시는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그때 십 광야에 숨어서 거하는 것을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일러바쳤고 이에 사울 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올 때 그 심정을 기록한 글이었다.

 

그때의 사울 왕은 이미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서 떠났고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신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반면에 다윗은 하나님의 신이 늘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사울 왕은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원수인 사단에게 속한 자였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이 무리들을 반드시 멸하셔야만 한다. 그래서 다윗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원수를 멸하여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공의가 행하여질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삼상 16:13)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삼상 16:14)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의 문구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을 되돌아가게 하실 것이다”로 번역된다. 결국은 다윗의 이 기도는 원수들이 저지른 자신들의 악한 행위 그 이상으로 보응을 받게 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드러낸 표현인 것이다. 다윗의 그 확신은 현실로 드러났고 사울 왕은 전장에서 비참한 죽음으로 보응을 받았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께서도 하나님께 대적하는 원수들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마 23: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마 23: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마 23: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마 23: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마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마 23: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마 23: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다윗이 언급한 원수는 그에게 사사로이 원수된 그런 자를 말하는 대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사단에 속한 그런 자들로써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선 자들을 의미한다. 사울 왕은 그 대표 격인 인물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개입하실 것이라는 것이니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그 공의가 실현될 것을 구함이었다. 분명히 할 것은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권한과 권위를 확실히 인식함으로써 많은 수욕과 고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보복하지 않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다.

(벧전 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나의 억울함에 대한 보복과 원수를 갚으려는 생각 대신 다윗처럼 예수님처럼 그렇게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두 내어 맡기는 것이 바른 믿음의 자세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