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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by 영동장로교회 2022. 8. 7.

2022. 8. 7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성경 말씀에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교훈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의 구원을 그 목적으로 하는 책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선을 행하라는 이 가르침 역시 우리를 구원하는 그 일에 중요한 대목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교훈하고 있을 것이다.

 

사회 규범에 따른 도덕에서도 선은 강조된다. 그래서 도덕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선한 행실이 필수적이다. 도덕적인 사람은 선을 행하려고 노력한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착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명심보감에 공자가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으로써 갚아주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으로써 갚는다.”고 말한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선한 일을 함으로써 하늘의 복을 얻을 것이란다.

 

그러면 세상의 도덕적 관점에서 선이라고 하는 그것을 행하는 것만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착하게 살기만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세상적으로 선을 행하는 그것과 성경에서 가르치는 선을 행하는 그것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세상에서 말하는 선을 행하는 그것은 구원과 상관이 없다. 아무리 선을 행할지라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다면 그 선은 결코 구원과 관계되지 않는다.

 

심청이가 아무리 지극한 효를 다하고 임당수에 자신을 던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 선을 행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지 못한 고로 그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믿음의 백성들이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은 결과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으므로 우리는 새롭게 거듭나는 은혜를 입었다. 하나님의 선택을 입기 전에는 우리 모두는 죄인이었던 고로 자력으로는 도무지 선을 행할 능력이 없었다.

(시 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 14: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전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죄 아래 종노릇하는 자들이었기에 생각하는 것은 모두 사단의 그 뜻에 따른 것뿐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함을 입은 결과로 성령하나님의 우리 속에 새 생명을 심어주심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른 그 은혜로 우리는 중생함을 입었다.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중생은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 속에 심어주셨던 하나님의 형상이 새롭게 회복됨이다. 하나님은 선의 원천이시고 선은 하나님의 속성에 속한다.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 중에 아름답고 선한 그것이 본래 우리의 형상 속에 새겨져 있었다.

(대하 30:18)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의 많은 무리는 자기를 깨끗케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기록한 규례에 어긴지라 히스기야가 위하여 기도하여 가로되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그런데 아담이 범죄 함으로써 그 형상이 훼손되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거듭남을 입음으로써 하나님의 그 속성의 닮음이 회복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속성인 선을 닮았기에 선을 행할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인 로마서에서 선을 행하라고 가르친 것은 바로 이 중생함을 입은 선택된 믿음의 백성인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권면한 그것이다. 그들은 중생한 자들이기에 선을 행할 그 본성을 회복했으므로 당연히 행할 바로서의 그 선을 행할 책임 하에 놓인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의 이 권면은 구원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닮은 그 속성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 책임을 다하라는 권면이었다. 바울의 이 권면은 은혜를 입어 중생한 자들을 향해서 깨어나서 일하라고 하는 그 알림과도 같았다.

 

성경이 이 말씀을 담고 있는 것은 오늘날 중생함을 입은 우리들에게도 믿음의 잠에서 깨어 주의 일을 행하라는 그 알림으로서의 역할을 하려함인 것이다, 중생한 자로서 주의 일을 행하는 것은 마땅한 책임이요, 의무인 것이다.

 

바울이 이 말씀을 함에 있어서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라고 한 것은 우리가 하는 그 사랑에 거짓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사랑에 거짓이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우리는 죽음에서 삶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우리를 구원하는 그 은혜가 가득한 하나님의 그 사랑에는 거짓이 없이 오직 참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를 살림에 있어서 하나님이 행하신 그 모든 일들은 참이었다.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에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실 것을 이미 영원에서 작정하신 그 일이 참이었고, 때가 되매 그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삼아 우리 죄를 대신지게 하신 그 일도 참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살 것에 대한 그 증거로 그를 삼일 만에 부활시켜 살리신 그것도 참이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사랑의 그 일이 참인 것을 믿을 수 있게 하셨다. 그러하니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의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며, 우리의 의무가 됨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

 

이 사실을 바울은 “사랑에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롬 12: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바울은 기독교적 윤리에 입각하여 교훈하고 있다.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세상적인 도덕적 기준과도 잘 일치한다. 그러면 바울은 단지 세상적인 가치관에 따라 그렇게 가르친 것인가?

 

바울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세상적인 도덕적 관점에서도 형제를 사랑하고 우애하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그 세상적 가르침에는 하나님을 염두에 둠이 있지 않다.

 

하지만 바울의 그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 항상 전제되어 있다. 이것이 세상 윤리와 기독교 윤리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이다.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을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그저 세상적인 기준에 따라 착하게 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 굳이 교회를 찾아가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구원받은 은혜를 항상 염두에 두고 그 은혜를 입은 자로서 마땅히 행할 바로서의 선을 행하는 그 삶은 믿음의 백성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바울이 말한 ‘형제’는 한 가족 안에서의 형제를 말함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구원받은 믿음의 백성들 모두를 말함이니, 이는 믿음의 백성들 사이에서의 보편적 사랑을 이룰 것에 대한 당부였다. 이 사랑함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그 계명을 지켜 완성하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모세의 그 율법에서 언급된 5계명부터 10계명까지의 사람에 대한 그 규례를 지켜내는 일은 믿음의 백성된 자로서 행할 바 그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규정이었다. 그 계명을 지켜내는 삶은 구원의 서정에서 성화계단을 밟아가는 자로서의 의무라 할 것이다.

(신 5:16)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신 5:17) 살인하지 말지니라

(신 5:18) 간음하지도 말지니라

(신 5:19) 도적질하지도 말지니라

(신 5:20)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도 말지니라

(신 5:2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그러나 그것을 지켜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것이 쉬운 일이었을까!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 이웃 사랑하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바울이 이렇게 권면하는 그 이면에는 성령하나님의 그 도우심을 항상 간구하라는 당부가 곁들여져 있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형제 사랑하는 이 일을 행함에서는 내 의지와 노력만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하나님의 도우심 위에 내 노력과 의지가 동작한다는 것을 알이야 한다. 그래서 항상 기도와 간구로 이 일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와 세상 윤리 사이의 가장 큰 구별이 될 것이다.

(롬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바울의 이 요청이 구원의 은혜를 입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행하는 그 일이어야 한다는 것임이 그가 말한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라는 말 속에서 이해 될 수 있다. 소망이란 구원 얻을 그 소망이다.

 

따라서 로마교회 교인들이 이런 사랑을 나누며 그 속에서 낙을 얻은 것은 그들이 구원의 대한 확신을 얻음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그런 확신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서두에서 밝힌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고 한 바울의 그 선언에 근거하고 있다.

(롬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이런 소망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으로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그 행위는 가장 대표적인 이웃 사랑의 행위이다.

(롬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이것은 초대교회의 그 모습과 같다. 가난한 성도들에게 넉넉한 성도들이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줌으로써 행한 그 사랑이다.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달란트를 주신 것은 그들 사이에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많이 받은 자는 적게 받은 자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줌으로써 주는 사랑을 통해 기쁨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고, 적게 받은 자는 많이 받은 자들로부터 나누어줌을 받음으로 인한 그 사랑을 받아 기쁨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 사랑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이런 사랑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 하신 것이다.

 

자신을 핍박하는 자는 분명히 자신에게 원수된 자이다. 그런 원수를 축복하여주는 것은 그를 사랑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그 원수에게 베푸는 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나를 살리는 일이 되며, 동시에 그를 미워하는 것은 결국 나를 죽이는 일이 되어진다. 그를 미워함으로써 내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영원히 죽는 그 일이 됨이다.

(롬 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롬 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롬 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바울의 이 권면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함으로써 내가 구원에 이르는 그 일이 내가 힘써서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한 것은 나의 구원이 나의 노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다만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로서 그 일이며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해야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음을 말함이다.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분명한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서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