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10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는 하나님”
- 참된 은사를 구함에 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이 온전한가?
그리고 우리가 지식한 것을 모두 생각할 수 있는가?
배운 것을 모두 기억하여 언제든지 인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의 이 기억하여 인출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예수께서 성령하나님의 하시는 이 일에 대해 직접 말씀하시기를,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셨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에게 말씀하심으로 미리 우리에게 보이셨다.
모세가 자신은 입이 둔하여 말에 능치 못하여 바로 앞에서 무엇을 말하여야할지를 잘 모른다고 변명할 때에 하나님은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하심으로 모세가 필요할 때 필요한 말이 생각나게 하여 그로 하여금 맡은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는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신 자에게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 되셔서 능력을 베푸시겠다는 말이다.
(출 4:10)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출 4: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출 4: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불변하심을 그 속성으로 하시기에 하나님의 이 약속은 절대로 변치 않는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면 그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 되어주시겠다는 이 약속이 참인 것을 하나님은 성경의 여러 신앙의 선조들을 통해 보여주심으로써 증명해 보이셨다.
모세의 경우도 그러했다. 모세가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에 모셔 들였을 때 하나님은 모세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의 능력이 되어주셨다.
바로를 대면했을 때 열 가지의 재앙을 그의 앞에 드러냄으로써 그를 굴복시켜버렸다. 인간 모세의 능력으로는 감히 그 땅의 가장 강대한 애굽 제국의 통치자였던 그 바로를 굴복시킬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하나님이 모세의 하나님이 되셨을 때는 그 땅의 아무리 강대한 애굽 제국의 바로라도 모세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로 하여금 능력자가 되게 하셨을지라도 터무니없는 능력을 드러내게 하지는 않으셨다.
모세가 홍해 바닷가에서 홍해가 갈라지게 한 그 이적의 능력을 베푼 것은 하나님이 모세의 하나님이 되셔서 보여주신 능력이었다. 만약 그 순간에 모세가 홍해의 갈라지는 그 이적을 구하는 대신 하늘 군대를 보내주셔서 바로의 군대를 멸해버리는 그 이적을 베풀어 달라고 했다면 그 이적이 모세 앞에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베풀어졌을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로 작정하신 그 뜻에 따라 당신의 종들에게 능력을 베풀어주셨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가야만 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을 이루는 일이 되기에 하나님은 홍해가 갈라지는 그 이적을 모세를 통해 이루셨고 그 물로 바로의 군대도 멸하셨던 것이다.
인간 모세로서는 그 홍해가 갈라지는 그 이적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이 땅에 이적이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 바로 여기게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택하신 자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 각자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셔서 능력을 행하게 하셨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 그 순간에는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에게 은사로 그 홍해를 가르는 능력을 은혜의 선물로 주셨던 것이다.
그러면 은사가 무엇이던가?
은사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카리스마’나 ‘도레아’인데, 신약성경에 대략 스무 번 정도 언급되고 있다. 이 은사라는 말이 광의(廣義)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를 가리킨다. 또한 협의(狹義)에서는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성도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능력의 영적인 기능을 의미한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믿음을 인하여 서로 간에 안위함을 얻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즉 은사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믿음을 가진 형제들이 서로 간에 위로하며 거기서 얻는 몸과 마음의 평화는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것은 은사였다.
(롬 1: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롬 1: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은 것은 이적 중의 이적이다.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대한의 선물이시다. 과연 이 선물보다 더 큰 선물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을까!
따라서 성자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임한 은사 중의 은사였던 것이다. 누가 능히 이 보다 더 큰 기적을 베풀 수 있을까!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위대한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이 큰 은사를 우리에게 아끼지 않으시고 베푸신 하나님이 더 무엇을 아끼실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하나님께서 그리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연약한 우리는 이 믿음으로 강한 자가 되어 진다. 그래서 믿음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가 또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라 여김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우리에게 은사가 된 것이다. 이 은사를 받았으니 누가 능히 우리를 정죄하리요!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을 받아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내지 못하니 이 은사를 받은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까!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담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사의 능력이 아니겠는가?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딤후 1: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이 놀라운 은사의 능력으로 우리가 담대하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이제 거듭난 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대로 세상을 탐하는 그 길을 걸어가서는 안된다.
은혜를 입은 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는 믿는 자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이 삶은 반드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는 그것이다. 내게 주신 달란트대로 그렇게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요, 은사를 받은 자가 나아갈 길이다. 이것은 바울이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한 그 일이 될 것이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한 몸’이다. 따라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대로 각자의 역할을 다하여야 한다. 이때 우리가 명심할 것은 욕심을 내지 않을 그것이다. 주신 은사를 넘어서 더 많은 것을 탐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망령된 처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만족히 여기고 주신 은사대로 역할을 감당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롬 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롬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롬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롬 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롬 12: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음으로 할 것이니라
우리 역시 이 가르침에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리 적용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기준이 되시니 그의 뜻은 항상 절대적이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교훈한 바울의 이 가르침은 바울 당시에는 적합하였으나 지금 이 시대에는 맞지 않다 할 것이 없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이 적당한 때, 적당하게 필요한 은사를 분명하게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의기소침하며 두려워할 것이 없다. 능히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신 것이다.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기를 원하는 자에게 필요한 은사를 허락하신다. 다윗은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 부었을 때, 즉 그를 위해 기도하였을 때, 그는 분명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노라고 다짐했을 것이다. 그렇게 기도한 다윗을 하나님은 기뻐하셨을 것이다. 그러하셨기에 그 순간부터 성령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던 것이다.
(삼상 16:12)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삼상 16:13)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 그냥 기름을 그의 머리 위에 뿌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히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윗도 자신이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게 해달라고 같이 기도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했으므로 성령이 다윗과 함께 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다윗이 골리앗과 마주섰을 때, 그 다윗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당연히 이 골리앗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과연 다윗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삼상 17:26)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삼상 17:27) 백성이 전과 같이 말하여 가로되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여차 여차히 하시리라 하니라
다윗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그에게 은사를 베푸시되 세상의 두려움을 없이하여 그를 담대케 하는 믿음의 용기를 그 순간에 은사로 허락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 골리앗을 사자나 곰과 같은 짐승 하나정도로 여기게 되는 담대함을 소지하게 되었다.
이 담대함은 그 순간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은사였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믿었다.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 되어주셨고 그 골리앗의 위협으로부터 그를 보호하시고 드디어 그를 무너뜨리는 그 일까지 하셨다.
(삼상 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삼상 17:37)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다윗이 골리앗에게 한 이 말,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한 이 말은 다윗의 믿음의 고백이었다.
이 말은 정녕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믿음의 그 고백인 것이다. 나는 과연 이 세상의 그 두려운 일과 맞서는 그 순간에 다윗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칠 수 있는가?
(삼상 17:43)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삼상 17:44)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삼상 17: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삼상 17: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은사는 기도함에 의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하여야 할까?
아담으로 인한 그 원죄를 지닌 자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본능이다. 가인의 기도가 그랬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에게 내려진 죄벌이 너무 중해 견딜 수 없다고 하고,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어 타살당할까 두려우니 보살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창 4: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창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남을 입었으니 이전의 나와 같은 그런 기도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의 욕망을 위한 그 기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그 기도가 우리가 할 그 기도이다. 사도 바울이 그랬다. 그는 자신을 위한 그 기도가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한 그 기도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간구했다.
(고후 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딤후 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은사를 베푸실 때. 어떤 이에게는 방언의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치유의 은사를, 또 어떤 이에게는 가르치는 은사를 허락하신다. 그들이 능력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심에 따른 능력의 나타냄이다.
이때의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능력들을 선물로 받는다. 긴급하게 병든 자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필요가 있는 그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치유의 은사를 주신다. 사도 바울이 죽은 자를 살린 그 순간에는 하나님이 바울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그 은사를 베풀어주셨던 것이었다.
(고전 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고전 12: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고전 12: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고전 12: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고전 12: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골리앗을 상대한 그 순간의 다윗에게는 그 골리앗을 무너뜨릴 수 있는 그 능력이 가장 귀한 은사일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하나님이 되신 그 하나님께서 그 순간에 다윗의 그 물맷돌이 골리앗의 가장 약한 그곳, 급소인 이마의 정 중앙에 가서 꽂히도록 다윗의 오른 팔을 붙들어 주셨던 것이다.
삼손의 경우도 그러했다. 삼손이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셨을 때,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 되셔서 삼손으로 하여금 괴력을 지닌 장수가 되게 하셔서 블레셋을 떨게 만드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삼손의 하나님이 되어주신 그 마음에서 떠나셨을 때 삼손은 범인들과 다름없는 무력한 자가 되었고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쇠사슬에 묶여 맷돌을 돌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삿 16:20)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삿 16:21)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그러나 그가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셨을 때 하나님은 다시 삼손의 하나님이 되어주셔서 그에게 큰 힘의 은사를 다시 베풀어 주셨다.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몰살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할 큰 건물의 두 기둥을 무너뜨리는 그 일을 이루는 능력의 은사를 베풀어주셨다.
(삿 16: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로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서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삿 16:27)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도 거기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의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삿 16: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삿 16:29)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삿 16:30)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생각해보라, 그 순간 삼손이 방언의 은사나 자신의 눈을 고칠 수 있는 치유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했다면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셨을까?
그 순간 삼손이 큰 힘의 은사를 다시 자신에게 부어달라고 한 그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합한 기도였으니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그는 그 큰 힘의 은사를 받아 누렸던 것이다.
그 순간 삼손이 그 큰 힘의 은사를 구한 것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는 이기심에서 나온 기도라 할 수 있을까?
삼손의 기도는 얼핏 보면 자신의 두 눈을 뺀 것에 대한 복수를 위한 기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기도는 자신에게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고통을 준 원수들인 블레셋 족속들에 대하여 원수를 갚게 해 달라고 한 기도였다. 이 기도에서 진정한 삼손의 민족적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한 그 기도였으니 어찌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은사를 구하는 기도 역시 이런 기도가 되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그 기도는 결과적으로 나를 살리는 그 기도가 되게 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 됨이다.
사도들이 각 지방에서 모인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순간의 방언함도 하나님께서 사도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셔서 방언의 은사를 주심이었다. 그래서 베드로의 하나님이 되어주신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방언으로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하셨다.
(행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행 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행 2: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 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지금 내가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라면 나의 하나님 되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말씀의 영감을 얻게 하셔서 은혜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는 그 은사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그러하니 나는 공연히 이 순간에 내게 치유의 은사나 또 다른 어떤 은사를 얻게 하여달라고 떼를 쓰는 일을 할 이유가 없다.
우리들 중에는 치유의 은사나 방언의 은사와 같은 그런 은사를 얻게 되는 것을 부러워하는 자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나를 가장 잘 아신다.
따라서 이 순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게 필요한 은사가 무엇인지를 아시고 그에 가장 필요하고 적합한 은사를 주실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 은사를 감사함으로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고전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전 12:29)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고전 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사를 감사함으로 받아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그 은사를 사용하는 참된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원하노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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