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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가 선을 행하라 하신 뜻은?

by 영동장로교회 2022. 1. 2.

2022. 1. 2.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베드로 사도가 선을 행하라 하신 뜻은?”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본도, 갑바도기아, 갈라디아, 아시아, 비두니아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서이다. 이들은 유대인들보다는 이방인들이 더 많은 비율로 구성되어 있었고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보낸 것이 이 편지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실천적인 면에서의 교훈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본다.

(벧전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에 흩어진 나그네

(벧전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들은 주님의 그 가르침에 따라 진리를 바르게 깨달은 자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를 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씨’는 성경에 기록된 그 ‘말씀’이라고 주석가들은 말하고 있다.

오히려 썩어질 씨란 자신의 의지로 구원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썩지 아니할 씨란 영원히 멸하지 아니하는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킴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성령의 은혜로 중생함을 입음이다. 거듭나는 것은 말씀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에게 아무리 말씀을 주어도 살아날 수 없다. 죽어 있으므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있지 않는 것이다. 구속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살 수 있었을까? 또한 말씀은 곧 예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베드로 사도는 거듭난 그런 그들에게 주님이 구원을 선물로 허락하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가장 큰 선물인 것이다.

(벧전 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벧전 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 2: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그런데 구원의 은혜를 맛본 자들에게는 감당해야 할 한 가지 사명이 있다. 그것은 곧 제사장이 되는 일이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특별히 구별된 사람이다. 구약 시대에는 레위 지파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져온 희생 제물을 제단에서 불에 태워 번제로 드림으로써 백성을 대신해 죄를 용서받고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화평을 얻게 하는 사역을 수행했다.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그 제사장이 되라고 한다. 제사장이 된 그들은 마땅히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용서에 참여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화해를 이루도록 하는 그 일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믿지 아니하는 그들이 하나님의 그 용서에 참여하도록 하는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에게 선행을 보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옛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 역할을 감당하는 제사장의 나라로 세우셨다.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 기대와는 다르게 그 땅의 다른 족속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그 일을 위한 선행을 베푸는 일에 무관심했다. 결국 그 촛대는 옮기워졌다.

우리 역시 택하심을 입은 자이니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에 섰다.과연 우리는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히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벧전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벧전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베드로 사도는 구원의 반열에 들어선 자들이 마땅히 행할 바가 자신의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선한 행실을 보이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왜 그리 하여야 할까?

오직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일까?

 

구원 받은 자는 마땅히 그리 하여야 한다. 이는 오직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 그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함으로써 아직 믿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택한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함이다.

 

성도들의 선한 행실이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있음을 베드로 사도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는 믿음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도덕적으로 선한 행실을 보여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다. 성도들이 바른 도덕적 행실을 보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계속해서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백성들에게 선행을 행하라고 명하고 있다.

(벧전 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벧전 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벧전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그 지역 성도들은 많은 핍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순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핍박당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믿음의 백성된 그 신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있으면 이는 분명 위로의 말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 신분에 대한 깨달음이란 어떤 것인가?

(벧전 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그곳 성도들이 얼마나 억울한 핍박을 많이 받았을까?

그런 그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참고 인내하라고 당부한다. 그것이 그냥 억울한 채로 그냥 당하고 살라는 것이 아니다. 이 참음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고 한다. 하나님 앞에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을 이겨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이 되기 때문이다.

(벧전 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은 전적으로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함이다. 그런고로 택함을 입은 자들은 이 땅을 살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을 감당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선행을 하고 도덕적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바른 모법적인 행실을 보이라는 것이다.

 

성도들이 윤리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바른 삶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바른 모습을 보여야 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그렇게 행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단지 세상의 윤리적 기준에 따라 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벧전 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도덕적 선을 행하는 것도 오직 주 예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구원을 이루는 그 일을 함이다. 이를 베드로 사도는 믿는 아내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을 예로 들고 있다.

 

만약 믿음을 가진 아내가 지극히 선을 행하면 그 남편이 그것으로 감동을 얻어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역사가 일어 날 수 있는 동기가 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믿음의 백성된 자가 지극한 선을 행하는 것은 오직 이미 선택된 자를 주 예수께로 인도하는 계기를 만드는데 있다 할 것이다.

 

그 남편된 자는 누구일까?

바로 믿는 아내를 핍박하는 그 당사자가 아닌가!

그런데 핍박 받는 중에서도 착한 행실을 드러내면 어느 한 순간 핍박하던 남편이 감화되어 믿는 자의 반열에 설 수 있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은혜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주신 은혜를 깨닫는다면 한 순간 닥쳐올 핍박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이것이 믿음의 백성된 신분에 대한 깨달음이다.

(벧전 3: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벧전 3: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그 착한 행실은 겉으로 보이려고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진실한 마음에서 행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것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선행일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 외형적 선행을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이에 반하여 진심으로 드러나는 선행을 그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진심인 것으로 행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음에 숨은 사람”이란 그 진심을 말하고,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는 것은 진심이어서 변함이 없을 그 진실된 마음으로 행하는 참된 선행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선행을 보이는 그 아내에 대해 어찌 그 남편이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이미 구원하시기로 선택한 남편이라면 이 아내의 행실을 보는 순간이 주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이 될 것이고, 이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이 하나님 앞에 갚진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벧전 3: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벧전 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이어서 베드로 사도는 믿는 아내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의 예와 반대되는 경우도 말씀하고 있다. 베드로사도는 남편은 믿는 자인데 아내가 믿지 않거나 믿음이 온전하지 않는 경우라면 믿는 남편이 선행을 행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야 하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육체적으로 약한 것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아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기로 이미 선택된 자일 수 있음이니, 따라서 그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지닌 자로서 남편된 자는 세상의 관습이나 세상적인 지식으로 그 아내와 동거하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창조주 하나님이 아내를 허락하신 그 이유에 대한 지식을 깊이 깨닫고 그 원리에 따라 아내와 함께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남편들에게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될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 일이 될 것이다. 이처럼 믿음에 있어서 그 바른 믿음의 지식이 이처럼 귀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가정은 교회의 가장 최소단위가 되는 가정교회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이 가정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그 기도가 바르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를 베드로 사도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새해에는 우리 모두도 믿음에서의 바른 지식을 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벧전 3: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 사도의 마지막 당부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율법이요 주님이 그렇게도 강조하셨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베드로 사도가 다시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베드로 사도는 이 땅에서 믿음의 백성이 선행을 행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믿음이 아직 없는 자들 중에서 하나님이 이미 선택해 놓으신 그 백성들로 하여금 주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그 계기를 만들어 줄 요량으로 그리하라했다.

 

그런 일을 감당한 그들이 정작 중요한 자신들의 구원에서 탈락되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베드로 사도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구원에서 멀어지지 않았음이 드러나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그 일에서이다.

 

피차 원수가 되는 것은 최소한 둘 중에 하나는 천국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왜냐하면 천국은 원수된 사이가 있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백성들 모두가 끝내는 천국의 백성된 그 자리에 서기를 원하는 것이 베드로 사도의 바라는 바이기 때문이다.

 

복을 빌라는 것은 세상에서 얻을 그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백성되는 그 구원을 성취하는 그 복을 의미한다.

(벧전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이 세상에서 오래 살 것에 대한 그 생명이 아니라 천국 백성이 되어서 누리게 될 그 영생할 것에 대한 사랑을 “생명을 사랑하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좋은 날”이란 이 땅에서 기쁨을 얻는 그 날이 아니라, 구원을 성취하는 천국에 입성하는 그 날을 말한다. 이런 결과를 얻으려면 그 심성에서부터 남을 살리는 귀한 생명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심성에서부터 모든 선한 말이 나오고 선한 행동이 나올 수 있다.

(벧전 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벧전 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심성이 선한 양심을 지니면 그로부터 선행이 이루어질 것이다. 비록 이 일로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이 선행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할 것이며, 이는 결국 선택된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이며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생을 내신 목적이기도 한 것이다.

(벧전 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선한 양심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예수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바로 이것을 보이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의 그 선한 양심은 결국 불의한 죄인이었던 우리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셨고, 결국은 구원에 이르는 그 길에 들어설 수 있게 하였다.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벧전 3: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는 말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그 인성이 죽음을 당하셨는데, 성령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다는 말이다. 쉽게 표현하면 “인성을 지니신 육신이 죽임을 당하셨는데 그 육신을 성령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가 된다. 여기서 ‘영‘이라는 것은 예수의 영을 말함이 아니고 ‘성령 하나님‘이신 그 ‘성령’을 말한 것이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라는 말은 예수가 죽으셔서 그의 영이 옥에까지 내려가서 그곳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신 것이 아니라, 노아 시대에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이다. 쉽게 다시 쓰면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지금은 옥에 있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셨다”가 된다.

 

‘전파하시니’라고 현재로 표기 되었기에 지금도 죽은 영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안된다. 죽은 자에게는 이미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영문성경에는 ‘preached’라고 과거형으로 분명히 표기되어 있다.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오늘 날 교회가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것은 베드로 사도의 이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가 따르지 못한 결과로 보여진다. 베드로 사도가 믿음의 바른 지식에 따라 선행을 행할 것에 대하여 가르치신 이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바르게 깨달아 이 시대에 구원의 복음을 바르게 행함으로써 보여주어야 하는 그 막중한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디 그 책임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어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는 바이다.

 

주의 은혜가 항상 함께하는 새해가 되기를 축원하노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