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17.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성경에 나타난 이적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
성경에는 참으로 많은 이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이성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수긍이 되지 않는 책이기도 하다. 모세가 지팡이를 높이 드니 홍해가 갈라졌다. 이것이 도대체 과학적으로 이해가 되는 일인가? 중력은 지구 중심으로 향하니 그 무거운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라져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이는 분명히 물리 법칙을 위배하는 현상이다.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출 14:6)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출 14:7)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출 14:8)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출 14: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출 14: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출 14: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출 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출 14: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출 14:17)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출 14:18)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출 14:19)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출 14:20)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출 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출 14: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출 14:23)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출 14:24)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출 14:25) 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출 14: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출 14:27)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출 14:28)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출 14: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출 14: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그 옛날 사람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했다고 한다. 어떻게 사람이 죽지 않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는 어떻게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인가? 그가 새와 같이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과 같이 비행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인가? 또 그가 설사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더라도 그가 어떻게 그 높은 하늘에서 숨을 쉴 수 있었을까? 에베레스트와 같은 정도의 높이를 갖는 산에 올라가더라도 산소통을 매고 가지 않으면 보통 사람은 숨을 쉴 수 없고 결국은 질식되어 죽고 마는데 어떻게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갔다는 것인가?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또 한 사람 엘리야도 그랬다. 그는 모세의 그 이적과 에녹의 그 이적을 함께 보인 선지자였다. 그가 물을 치니 물이 갈라져 마른 땅이 드러나고 그 위로 그의 제자 엘리사와 함께 건너갔다. 그리고 그도 에녹처럼 하늘로 승천했다.
(왕하 2:8) 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
(왕하 2: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왕하 2:10) 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
(왕하 2:1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왜 이렇게 성경은 그 많은 이적들을 기록하고 있을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고, 그 사람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영광 받으시는 일은 결국 그 지으신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결국은 하나님은 그 사람을 가장 복된 자의 삶에 세워 두려하신 일이셨다.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이 자신을 가장 복되게 하는 일이란 것을 그는 깊이 깨닫지 못했다. 큰 것을 보지 못하고 작은 것에 눈이 어두웠던 것이다. 하나님의 그 뜻을 저버리고 스스로 자신을 복된 자리에 세우려고 했던 그 좁은 이기심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일은 죄를 범하는 일이 되었고 그는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 죄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었고 결국은 죽음의 결과를 초래했다. 인간에게 죽음이 임한 것이다. 인간의 욕심이 잉태한 그 죄는 하나님이 심판하셔야만 했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그 사람을 끝내 포기하실 수가 없었다. 그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살리기 위한 길을 여셨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죄에 대해서는 분명히 공의를 집행하셔야만 하는 하나님이시기에 누구라도 그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후에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은 그 죽음에서 건져내시기로 작정하셨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죽은 자를 살려서 그와 더불어 영원히 기쁜 삶을 누리시려는 그 하나님의 작정하심은 가능한 일인가? 어떻게 죽어 썩어진 자가 다시 산다는 것인가!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어떻게 죽어서 형체도 없어져버린 그를 다시 생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리실 수 있을까?
적어도 과학을 배우고 더더욱 생명공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자라면 하나님의 그 살리실 작정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죽어서 썩어져버린 그 육신을 다시 살려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이 말이 되는 일인가?
합리적 사고를 하는 지식 있는 자라면 도무지 수납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그렇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신 그 특별 계시인 성경을 주실 때 이 사실에 대해 스스로의 증명을 해 보이신 것이다.
우리를 살리시겠다는 그 일, 죽은 자들을 무덤에서 소생시켜 내실 뿐만 아니라 자신과 더불어 이 땅에서 천년동안 왕노릇하게 하시겠다는 그 일은 어떤 기적보다도 더한 기적이 될 것이다. 이를 ‘이적‘이라고 한다.
누가 이와 같은 약속을 믿을 수 있겠는가!
과학적으로는 도무지 설명해낼 수 없는 말도 되지 않는 이 이야기를 지금 우리로 하여금 믿으라고 한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대로 믿겠는가?
신앙을 가진 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한다.
그렇다.
이해할 수 없는 그것을 그대로 믿는 것이 ‘믿음’일 수 있다. 그러면 이단들이 주장하는 자신들의 그 교리도 우리는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여서 믿어야 한다는 것인가?
어떤 사실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믿는 것을 ‘맹종’이라 한다. 진정한 의미의 ‘믿음’은 이 ‘맹종’과는 전혀 다르다. 진정한 의미의 ‘믿음’이란 그것에 대한 나의 ‘확신’과 ‘찬동’이 따라야 한다. “나는 그 사실에 대해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하는 ‘확신‘에 바탕을 둔 것이 바로 ‘찬동’이다. 이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따르는 ‘맹종‘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나를 다시 살리신다 하시니 나는 그냥 그 말을 믿는다”라고 하면 ’맹종‘이 될 수 있다.
죽은 자를 살려내는 그 일은 분명히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시 살린다는 것을 사람이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속이는 ‘기만적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온 우주와 인생을 창조하신 이가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 하나님이시라면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능히 죽어 그 몸이 모두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갔을지라도 다시 살리시는 일이 어찌 불가능할 것인가!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그럼에도 다시 살리는 그 일을 도무지 믿지 못할 자들을 위해 하나님은 이미 역사 속에서 많은 이적을 행하셨고 그 이적을 특별계시인 성경에 기록으로 남기셔서 믿음의 백성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심으로 다시 살리실 그 일에 대한 ‘완전하고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은혜를 주신 것이다.
홍해를 가르는 그 일은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우리들의 처지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다다랐을 때 이집트의 군대가 그들을 추격해 왔다. 완전 무장한 그들 앞에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없다. 뒤를 보면 홍해 바다인데 그것은 곧 그들의 죽을 운명을 암시하는 존재였다. 절대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진 이스라엘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아담의 그 죄로 인해 모든 사람들은 이미 죄 중에서 태어났고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들이다. 누구나 늙으면 그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홍해 바다와 이집트의 군대 사이에 놓인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우리의 모습을 상징한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 때 하나님의 종 모세가 하나님의 명으로 그의 지팡이를 높이 드니 그 홍해가 열렸다. 그 갈라진 바다를 건너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생명을 구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니 그 홍해 정도를 그렇게 하시는 일이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다. 우리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그 일이지만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죽은 우리를 살려내시는 그 일, 우리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이시니 능히 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는 전능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창 17:1)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홍해를 가르신 이 일을 하나님이 직접 행해 보이심으로 장차 있게 될 우리를 살리실 그 일도 능히 하실 줄로 믿어지게 하셨다. 이렇게 믿어지는 것이 ‘신뢰’하고 ‘찬동’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맹종’과 분명히 질적으로 다른 일이다.
이 홍해의 이적만 기록하셨다면 우리는 또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홍해사건은 어쩌다보니 그러실 수 있으셨지만 나를 살리는 그 일까지 확실히 하실 수 있으실까”라고. 그래서 하나님은 도무지 부인할 수 없을 만큼의 확실한 이적을 베푸셨다.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살았다는 것이 가능할까?
온통 사막이고 먹을 것이란 자신들이 준비해온 얼마 되지 않는 양식 정도였을 것이다. 설마 그들이 40년 동안 먹을 식량을 준비해 왔을까?
40년치 식량을 준비해 온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출 16:3)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식량은 그렇다 치더라도 물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출 17:3)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그들에게서의 광야란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이스라엘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될 우리를 상징한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생명을 살리시고, 불기둥을 내셔서 사막의 추운 밤의 그 한기로부터 보호하셨다.
(출 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갈증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그들을 위해 반석에서 물을 내어주심으로 그들을 살리셨다. 이 이적은 또 다른 우리의 다시 살리실 것에 대한 확정적 증거로 제시하셨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을 저들을 위해 만나를 내려주심으로 그들의 생명을 살리셨다. 이것 또한 영원히 죽을 우리를 반드시 살리실 것에 대한 증거로 보여주신 것이다.
(민 20: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민 20: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민 20:9)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민 20: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민 20: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출 16: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출 16: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출 16: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출 16: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출 16: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구약의 이 특별계시를 통해 하나님은 참으로 많은 증거를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러나 그래도 믿을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보다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셨다. 사람의 몸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의 그 증거하심은 도무지 우리로 하여금 부인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하였다.
주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우리를 장차 나사로를 부르신 것처럼 그렇게 불러주시겠다는 약속의 증표였다. 어쩌다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는 사람들의 경우가 있다. 그들은 흰옷 입은 천사가 자신들을 영접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이런 경우들도 예가 될 수 있으나 그것은 주님이 직접 보여주신 증거는 아니다. 그들은 몸이 썩지는 않았으니 우연적으로 다시 소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죽은 우리가 다시 살 것에 대한 강력한 증거는 될 수 없다.
그러나 나사로의 경우는 이미 썩어 그 냄새가 진동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는 완전한 죽음, 도무지 다시 살 가망성이 전혀 없는 상태를 표시한다. 주님의 행동에서 이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나사로는 주님과 참으로 친밀한 관계를 지닌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사로의 소식에 즉시 오시지 않으시고 며칠을 의도적으로 지체하셨다. 바로 완전한 죽음, 사람들이 그는 도무지 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자라고 명백히 할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시체가 썩을 때까지 의도적으로 기다리신 것이다. 이는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실 그 일이 전혀 허언이 아니심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증명을 해보이신 사건이다.
(요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 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요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요 11: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요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요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요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요 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요 11: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요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요 1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요 11: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 11: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요 11: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요 11: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요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요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요 1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요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주님이 물위로 걸어오시고 그리고 빠져가는 베드로를 건져내심으로써 스스로 죄에 빠져 죽어가는 우리를 진실로 살리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보이셨다.
(마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마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영원히 사는 그 일, 그 어떤 이적보다도 뛰어난 그 구원의 이적을 베풀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으심을 그 많은 이적들을 통해 증명해 보이셨다. 그런데도 어떻게 믿지 못하는가! 우리가 구원을 얻어 영생하는 그 일은 어떤 이적보다도 더 큰 이적인 셈이다. 이것이 허언이 아님을 하나님은 줄기차게 이 땅에서 이적을 행하여 보이심으로 그와 같은 구원의 이적을 우리에게 허락하심이 진실임을 직접 증명하셨다.
이렇게까지 해 보이셨는데 그래도 아직 주님이 나를 살리실 그 작정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것인가?
하나님이 살리시기로 정하신 자들은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나를 사랑하시는 그 은혜에 무한한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쁨과 감격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릴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아!
하나님의 나를 사랑하시는 이 큰 은혜여!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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