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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와 삽비라(2)

by 영동장로교회 2020. 5. 10.

2020. 5. 10.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아나니아와 삽비라(2)”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무슨 의미일까?

 

자신의 재산을 팔았는데 그 중의 일부를 드리지 않고 숨겼다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하나님의 너무한 처사가 아닐까?

재물에 욕심을 가지신 하나님이신가?

누구는 단 한 푼도 헌금하지 않는데 반해서 그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대부분을 드렸던 것이 아닌가!

그러면 자신의 소유를 팔 경우 그 모두를 드리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이단들이 하는 그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이단들도 그들의 신자들의 재산을 그런 식으로 유도해서 모두 착취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베드로도 이단들의 그 교주들과 같다는 뜻인가?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우리에게 교훈하고자 하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그가 한 일이 성령을 속이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아나니아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모두 교회에 헌금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이었다. 하나님과 약속을 정하는 것은 일종의 언약이다. 이미 아담을 통해 하나님은 인류최초의 언약을 맺으셨다. 그 때 아담은 그리하겠노라 약속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 언약의 중요성을 크게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그리하였기에 그는 선악과 열매를 먹는 그 일을 크게 망설임 없이 하고 말았다. 하나님께 한 그 서원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결과로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의 자리에 섬과 동시에 그의 후손 모두가 죄인의 자리에 서는 실로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이 서원의 중요성은 성경에 분명히 보여 졌었다. 입다의 예가 그렇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예가 그랬다. 그들은 이 서원의 두렵고 떨리는 중대성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그 행함으로 훗날 믿음의 백성들에게 이 서원의 중요성을 알게 하였다.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분명 이 서원의 중대성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함부로 가볍게 서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는 공명심으로 너무나도 가볍게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이다. 입다는 그의 잘못된 서원으로 자신의 딸을 잃는 결과를 초래했고, 후대에 이 서원에 대한 교훈이 되었다.(입다의 딸은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된 바대로 번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은 아니다. 그녀는 평생 처녀로서 성전에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된다. 한국어로 번역된 이 부분은 오해의 소지를 지닌 번역결과이니 바르게 가르쳐질 필요성이 있는 부분이다.)

 

결국 아나니아의 죽음은 하나님이 그에게 죽음을 고의적으로 집행하신 것이 아니라, 아나니아 자신에게서부터 원인이 된 자신의 잘못에 기인한 자신적 죄과의 결과였다. 아나니아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태도는 어떠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제시해주고 있다.

(11: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11: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11: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11: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삼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삼상 1: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때의 초대교회는 부유한 자들이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 앞에 헌금하고 그 헌금한 돈으로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그런 사랑의 교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심으로 이루어진 거룩한 공동체의 삶이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교회공동체의 삶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진정한 삶의 모습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되었다. 훗날 우리와 같은 많은 믿음의 백성들을 위해 준비된 거룩한 공동체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초대교회를 온전한 공동체로 지키시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그런 행위를 하는 자들을 부러워했다. 자신도 성도들에게 그런 일을 함으로써 칭찬을 받기를 원했다. 명예의 욕심이 그에게 잉태한 것이다. 부자였던 바나바의 그 행위를 보고 결정적으로 자신도 그렇게 따라 해서 성도들의 존경을 받아 성도들이 자신을 추종함으로써 교회 내에서 자신의 지위가 높아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사단은 그의 명예욕을 자극하여 유혹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를 팔기로 했는데 그 순간에 그에게 욕심이 잉태했다.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은 그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 그 재물을 헌금으로 드리는 것이 성령이 함께하심에 따른 그 기쁨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아까운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드리기로 한 재물의 얼마, 즉 표가 나지 않을 만큼의 재물을 제하여 감춘 것이다. 이는 성령을 속이는 일이었고 베드로는 그것을 지적했다.

 

초대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순간에 서 있었다. 주님의 구속사역은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희생으로 마무리가 지어졌다. 성자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인 구속사역이 그렇게 완성이 되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역사, 구속 사역은 주님을 통해 이루어졌다. 우리의 구원을 이룰 성화와 견인 사역은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이시다.

 

주님이 지상사역을 마무리 하시고 승천하실 때 내가 가면 보혜사를 보내마하신 그 약속이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이루어졌다.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16: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6: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6: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16: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 재림의 날까지는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초대 교회 이후로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실로 막중한 그 역사를 감당하실 성령 하나님에 대한 그 인식은 처음 시작 단계에 있는 그 초대교회로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첫 단추를 꿰는 이 일이 잘못되면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구원애는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하기에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이 성령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세워져야 훗날 믿음의 백성들의 성령하나님을 통한 구원사역은 바르게 자리를 잡아 갈 것이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의 은혜이신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 같이 섬세하게 은혜의 공작을 행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하나님의 그 사역을 훼방하는 그 일은 그 순간 무엇보다도 심각함을 지니고 있었다. 성령을 훼방한 아나니아의 그 죄를 그냥 모른 체하고 지나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믿음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 그 초대교회는 이 땅의 모든 믿음의 백성들의 새 생명의 잉태를 준비하는 공간이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그 초대교회를 지켜내시는 일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실 일이셨다. 그 초대교회의 신앙의 순수성을 보전하는 일에 아나니아의 그 행위는 신앙적인 면에서 너무나도 위험스런 바이러스같은 것이었다. 온 교회의 신앙을 일시에 오염시켜버릴 수 있는 그것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신 것이다.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그 초대교회를 온전하게 지키시기 위해 아나니아의 그 잘못된 믿음은 반드시 제거하셔야만 했다. 아나니아의 죽음은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심은 바로 지금의 우리를 위한 준비 작업이셨던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나를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선행 작업이셨던 것이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면 그렇게까지 섬세하게 준비하셨을까!

 

그 때 초대교회의 믿음의 백성들은 다 하나님의 그 죄에 대한 그 집행하심에 놀라움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실로 그 놀라움은 감출 수 없었다. 아주 분명하게 그 성령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두렵게 섬기는 믿음의 경외심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경외하는 신앙의 유산은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수될 수 있었다.

 

성도들이 이 일을 듣고 두려워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나니아를 죽게 했다는 그 막연한 공포심 때문에 두려워했다는 것이 아니라, 바른 믿음의 생활을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고 그 삶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의 중요함을 깨달음에서 오는 그 막중한 사명감에서 비롯된 떨림이었다.

지금 내게는 그와 같은 떨림이 있는가?

(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5: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5: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5: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5: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5: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주님은 자신에게 대하여 잘못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능히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결코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는 주님의 말씀이기에 사람의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는 절대 명령이 된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가장 무서운 죄가 되는 것이다.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초대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세워나가야 하는 절대적인 선행의 믿음의 집단이었다. 그들은 믿음의 전통을 세워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신앙적 전통이 후대의 모범과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순간에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엄격한 집행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바로 그러한 시간에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이는 일, 그것은 성령의 사역하심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요, 그 사역을 방해하는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의 그 잘못된 행위, 성령을 훼방한 죄는 즉각적으로 판단되었다. 그 판단은 죽음이었다.

 

성령 훼방 죄는 결코 사함을 얻을 수 없는 일, 즉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 되었고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은 끝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니 그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아나니아의 죽음은 바로 그런 죽음을 예표하고 있다. 그 때 그곳에 있었던 믿음의 백성들은 성령 훼방 죄의 그 두려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아나니아를 통해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베드로의 그 지적이 있은 그 순간 바로 그에게 죽음이 다가왔던 것은 성령 훼방 죄의 크고 두려움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게 해주는 일이었다.

 

이 사건은 성경에 기록이 되었고 그 기록이 남아 오늘 우리에게까지 교훈되고 있다. 지금은 비록 아나니아처럼 한다하여도 그와 같은 죽음이 바로 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여기고 그것을 무시한다면 그 날에 심판하실 때 그 죄는 결코 용서받을 길이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그와 같은 예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을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나로 하여금 아나니아의 이 사건을 통해 교훈하는 하나님의 그 뜻을 분명하고 바르게 깨닫게 하시어 바른 믿음 위에 서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