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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못 가의 한 병자

by 영동장로교회 2018. 11. 4.


https://drive.google.com/file/d/1V_Ma8zmsaGDBJNUjnhAicqXGeY7BcG_A/view?usp=sharing


2018. 11. 4.

베데스다 못 가의 한 병자

 

요한복음을 요한이 기록할 때 그는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는 달리 예수님의 이적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 그가 기록으로 남긴 몇 가지의 사건은 무슨 의도로 기록된 것일까?

 

그가 남긴 주님의 이적에 관한 한 사건이 5장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 병인 하나가 등장하는데, 그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나음을 입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 병인이 누워있는 그곳에는 그 병인 외에도 많은 병자들이 있었다.

(5: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그런데 주님을 통해 나음을 입은 자는 그 병인 하나였다. 그 병인이 나음을 입은 것은 특별히 그가 주님에게 나아와서도 아니요, 주님이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알고 부르짖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주님이 그에게로 다가가셔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 것 뿐이었다.

(5: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런데 주님은 그를 낫게 하셨다.

주님이 그 병인을 고치신 뜻은 무엇인가?

 

통상 낫기를 원하는 자는 그를 치료할 자에게로 와야 한다. 그런데 이 장면은 오히려 낫게 할 자가 낫기를 원하는 자에게로 다가간 것이다. 이것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로 다가 오셔서 우리를 살리시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신데, 예수 그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삼십팔 년이나 된 오랜 병을 알고 있는 이 사람의 병이란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치료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앓고 있는 죽음에 이르는 바로 그 병, 아담이 선악과를 범함으로써 우리에게 유전된 그 죄책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내리신 사형선고, 이는 그 누구도 철회할 수 없는, 고칠 수 없는 병인 것이다.

 

흔히들 이 땅에서 선한일,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죽어서 좋은 곳에 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코 우리가 스스로 공덕을 쌓아 천국에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그리스도 앞에 나아간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이 우리의 노력이거나 우리가 자원하여 나아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장의 이 사건이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병자들이 그곳에 있었지만 오직 그 병인 한 사람만 택하심을 입은 것은 바로 이 사실을 드러내 보이신 예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병자가 주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를 찾아가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병자가 나음을 입었다. 이는 우리의 이 불치의 병,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이 병을 오직 주님만이 치유하여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주님만이 참된 우리의 구세주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병인을 다시 만났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고.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는 이 구절을 원전에서 확인하면 "이 이상 더 범죄를 계속하지 말라"는 뜻으로 되어있다. 죄를 범하는 지금까지의 삶을 청산하라는 의미이다.

이 병자가 그 시대에 극악한 범죄를 저질러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거나 범죄자로 도망다니는 그런 삶을 사는 죄인은 아니었다.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삶을 사는 병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이상 더 범죄를 계속하지 말라하신 것은 무슨 뜻인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다. 이것이 죄 짖는 삶이다. 하난미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는 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한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성화의 삶을 의미한다. 죄를 더 이상 범하지 않는 삶이란 성화를 이루어 가는 삶이다. 이는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가 마땅히 감당해야 되는,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의 의무이다.

 

요한은 이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예수야말로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만이 그리스도, 구세주이심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나음을 입은 병인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예수가 자기를 고쳤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는 신앙고백과 같은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던 자기를 살리셨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죄인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신 이는 그리스도라는 그 고백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바로 이 신앙고백이 필요한데, 그 병인은 스스로 이 신앙고백을 한 셈이다. 참으로 주님이 그를 살리신 것이다.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하실 것을 증거 하시기 위해 특별히 선택해 주신 이스라엘 족속들, 그들은 그 은혜를 입었으니 많은 민족들에게 그것을 증거 해야할 책임과 의무를 지녔었다. 적어도 그 병인처럼 가서 증거 해야 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족속들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구원자로 오신 메시야, 그 주님을 방해하고 있다.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그들은 신앙의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모세가 기록한 구약에는 노아의 홍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종말이 있고 그 때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구약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이다. 깨어 있는 신앙이 아니면 누구라도 이 같이 된 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강조하셨다. 깨어 있으라고.

(24:42, 개역)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24:43, 개역)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25:13, 개역)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주님은 깨어 기도 하실 때,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것도 주님이 신신당부하시며 깨어 있으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그 제자들과 같지 않은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26:38, 개역)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26:40, 개역)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26:41, 개역)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어쩌면 구원 얻을 우리도 그 이스라엘 족속처럼 신앙의 깊은 잠에 빠져 그렇게 주님을 방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