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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by 영동장로교회 2018. 9. 9.


https://drive.google.com/file/d/1Fn9SBK0PpHptW4rMkdUj8LTwtHzFYniF/view?usp=sharing

2018. 9. 9.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을 구원하신 하나님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에 말씀이라고 번역된 로고스란 철학적인 의미에서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을 말한다. 이 용어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시킨 사람이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a)였다. 필로는 '하나님의 로고스'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며, 중재자(즉 대변자거나 제사장)로 부각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로고스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총화(總和)이자 이 세상을 질서있게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성경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로고스'는 주로 하나님의 권능(147:15;148:8;4:12)과 계시(2:1;26:1;딤전 5:17)를 의미하고 있다. 특히 요한은 본 절에서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Deity)을 부각시킴으로써, '로고스'가 바로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임을 보여준다. 본 절에서와 마찬가지로 14절에서의 '말씀'에서도 '로고스'의 인격성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말씀이란 표현 대신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지 왜 그렇게 알기 어려운 표현을 썼을까?

 

요한복음은 예수가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따라서 그 예수에 대한 메시야 되심을 체계적이며 논리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헬라철학에 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독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 대신에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능력의 총화이자 이 세상을 질서 있게 다스리는 존재라는 의미에서의 로고스라면 요1:3에 해당할 수 있다.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과 함께하신 말씀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의도하심 그 자체라고 할 것이다. 성경은 천지의 지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구원의 모든 계획하심이 그대로 실현되게 하는 존재, 그것이 말씀인 것이다.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따라서 우리를 살리시려는 성부 하나님의 그 계획하심은 성자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므로 능히 성자를 말씀으로 표현 할 수 있는 것이다. ‘로고스에 대한 이해를 이미 하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보다는 말씀이라는 표현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가 참된 메시야되심을 이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좀 더 나아가 예수야말로 진정한 메시야라고 증거하고 있다.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영원한 생명'이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영원한 생명을 줄 자, 바로 그가 메시야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가 되게 하려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의도하심이 담겨져 있는 존재가 바로 말씀이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을 부여하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택하신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 본원적(本源的)으로 존재하고 있는 영생을 매개로 하여 영원한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하나님은 이 사실을 구약의 역사를 통해 이미 우리에게 증거해 보이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한 그 역사하심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온전히 믿어 그 일의 주인공이 되라 명하심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그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를 친히 불러내신 것이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구원이었다.

(15: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24:3)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그가 그 아비집에 머무는 것은 죽은 자의 거하는 곳과 마찬가지였다. 우상이 가득한 집, 그곳이 아브라함의 아버지 집이었다. 그곳에서 불러내심은 죽을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는 곧 영원한 생명을 주실 자에 대한 예표이다. 이 사건은 죽을 자를 살려내실 하나님, 즉 오실 메시야에 대한 그림자인 것이다.

(24: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 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이삭이 번제단에 묶여지고 각을 뜨려한 순간에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이 그를 건져내심으로 그에게 구원을 베푸신 것이다. 이 또한 죽을 자를 살리시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실 메시야에 대한 그림자이다. 믿음의 사람 이삭이라 할지라도 그도 죄인이며 죽음을 면할 길이 없는 자임에는 분명하다. 그런 그를 죽음직전에 살려내신 하나님의 사자는 분명 이 땅에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22: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그 순간은 야곱이 형 에서로 인한 죽음의 공포에 놓여있을 때였다. 그 순간에 하나님이 그와 씨름하시면서 그를 구원하셨다. 야곱과 씨름한 이는 바로 오실 메시야이신 성자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 역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표인 것이다.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32: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32: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32:29)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그는 죽음의 문덕에 닿아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그를 휩싼 순간 유다가 그를 구해 내었다. 유다는 구원의 주님을 예표한다. 요셉이 그 순간 죽음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37: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37: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37: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떼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약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37: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37:27) ,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37:28) 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들이 지나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고 은 이십 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고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구원하심을 보이신 것은 세 번의 강조이며, 이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코자하심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시다. 그리고 이를 다시 확정해보이신 것이 바로 요셉의 구원이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