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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은사, 사랑

by 영동장로교회 2017. 6. 25.

https://drive.google.com/file/d/0B1aVWZqG1JW8RDdQems1cl9EMzg/view?usp=sharing

 

가장 위대한 은사, 사랑

 

 은사란 하나님이 그 믿음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재능을 의미한다. 영어 성경에는 “gift”로 표기되고 있다. 그러므로 은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능력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구원의 은혜도 하나님의 은사라고 했다. 이 경우에는 그야말로 “gift”인 셈이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허락하시는 최종적인 목적, 그 이유가 담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은사란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는데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6:23, 개역)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따라서 그 은사의 종류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 간에는 귀함에서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들 은사가 합력하여 우리의 구원을 견고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 은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많은 성도들 사이에 부러워하는 은사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방언의 은사였다. 고린도 교회는 이 방언하는 은사를 모든 은사들 중에서 가장 우위에 두었다. 모두들 이 방언의 은사를 사모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써서 그들의 잘못된 은사관을 수정해 주고자 했다.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어쩌면 지금 우리도 고린도교회처럼 그럴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교회 생활을 한 사람이면 나도 방언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라던가 안수하면 병자가 치료되는 그런 은사를 가져보았으면하고 바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은 인간적인 욕심에서 생겨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은사의 진정한 가치는 그런 신앙적으로 과시해보고자 하는 욕심에서 얻어져서는 안된다. 오직 주님의 주시는 은혜로 그 은사를 받아 교회에 유익이 되어야 한다. 교회에 유익이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 사역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어야 한다.

 

(고전 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고전 12: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고전 12: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고전 12: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고전 12: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전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바울이 언급한 이런 은사들은 모두 교회를 교회되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구원 사역을 완성하게 한다. 은사의 유형은 여러 가지나 성령이 같다는 것은 그 은사의 역할이 성령이 궁극적으로 이루실 구원에로의 인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런 은사들을 언급하면서 마지막에는 사랑의 은사에 대해 언급한다. 이 사랑의 은사야 말로 은사 중에서 우리가 사모할 가장 귀한 은사라는 것이다.

(고전 12:28, 개역)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전 12:30, 개역)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전 12:31, 개역)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12: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음으로 할 것이니라

(12: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사도바울이 위대한 사도였던 것은 그가 지닌 세상적인 학식이나 세상적인 배경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랑의 은사가 충만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은사를 허락하심은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시려는 일이라는 것을 바울은 분명히 했다. 그래서 은사와 부르심을 묶어서 하나님의 후회하심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11:29, 개역)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5:20, 개역)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허다한 죄를 덮음은 곧, 다시 살리는 일을 의미한다. 죄는 죽음을 전제로 한다. 처음부터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죄를 범하면 죽음에 이르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죄를 덮음은 죄 없다 하는 일이 되므로 그에게는 죽음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고로 이 사랑이야말로 가장 능력 있는 은사가 되는 셈이다. 그 어떤 은사가 영혼을 살릴 수 있는가.

 

 그러나 이 사랑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은사는 나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시는 선물들인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은사를 행하게 하시는 것은 내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내게 위임하신 그 은혜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3:6,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병자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베드로 그 자신이었겠는가. 이전의 베드로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이기심과 자신의 주장이 너무나도 강했던 이전의 베드로였다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하는 신비적 연합을 이룸으로써 그는 드디어 주님의 그 사랑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앉은뱅이를 향한 사랑의 마음 문이 열렸고 주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 중에서 가장 귀하고 위대한 은사는 바로 이 사랑인 것이다.

 

  이 사랑의 은사와 같이 영혼을 살려낼 수 있는 은사가 있는가.

방언은 하나님과 자신만의 대화이니 이것이 사람들의 영혼을 살릴 수 있을까. 예언의 은사는 택한 자들을 깨닫는 곳으로 인도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영혼을 살려내는 역할은 아니다. 치유의 은사도 한 사람의 육신을 온전케 할 수 있지만 그 영혼을 직접 살려내는 역할은 아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일에 직접 관여하는 은사이니 어찌 가장 위대한 은사라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아담이 처음 지음을 입었을 때, 그에게는 이 사랑이 충만했었다. 그래서 아담은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릴 때 그들의 이름을 지어줄 수 있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는 충만했었다. 이는 그가 그 모든 것을 사랑한 것이었고, 그런 그들을 사랑하는 그 다스림은 결국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을 살도록 보살핀 것이다.

 

 생명 있는 것들을 다스린다함은 그것들의 생명을 지켜 보존하여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일은 허사가 된다. 실제로 기르는 짐승을 대할 때 사랑 없이 하면 그 짐승의 생명이 오래가지 못하고, 사랑으로 기르면 그 생명이 오래가는 것이 일반적으로 수납되는 사실이다.

 

 아담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동안에는 그에게 사랑이 충만했고 그 다스리는 일을 온전하게 감당할 수 있었다. 그는 진실로 사랑의 은사가 충만한 자였다. 그것이 아담에게 주어진 은사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떠나 사단의 편에 서게 되었을 때, 더 이상 그에게는 사랑의 은사가 함께 하지 않았다. 땅은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어 산 짐승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었다. 땅은 황무해졌고 생명 있는 짐승들의 먹을 것이 부족하여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영원히 잃어버린 것 같았던 이 사랑의 은사를 주님이 오셔서 다시 살려내셨다.

우리에게 사랑의 은사를 회복시켜주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죽음과 바꾸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사랑의 이 위대한 은사에 대해 스스로 증명해 보이셨다. 그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사랑의 은사 회복으로 이어졌고,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짐으로 이 땅에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졌다.

 

(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하는 그 사랑은 천국에서까지 유효하다. 반면에 예언과 방언과 지식은 이 땅에 속한 것인 고로 천국에서는 유효하지 않다. 예언은 천국에 이르는 순간 그 용도가 폐기된다. 천국은 더 이상 예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방언과 지식도 이 땅에서 필요한 것이지 천국에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 때는 온전히 앎으로써 예언과 방언과 지식이 온전하게 되고 따라서 사랑만이 소용이 있게 된다. 그래서 사랑이 가장 위대한 은사가 되는 것이다.

(고전 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성도에게 가장 큰 은사는 바로 사랑이다.

방언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 치유의 은사는 사람의 외면을 온전케 할 능력은 있지만 그 영혼을 살릴 수는 없다. 여기에 반해서 사랑은 사람의 영혼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 모두 이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며 이 은사의 주인공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