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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칠언의 의미(2) - 다 이루었다

by 영동장로교회 2017. 4. 23.

https://drive.google.com/file/d/0B1aVWZqG1JW8aWZlSGRod25UeU0/view?usp=sharing

가상 칠언의 의미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예수님의 가상 칠언 순서와 장절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23:34

2. 오늘 네가 나와 함게 낙원에 있으리라. 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19:26

4.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27:46

5. 내가 목마르다. 19:28

6. 다 이루었다. 19:30

7.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19:46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한다. 이 가상칠언은 의미 없이 아무렇게나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의미심장한 순서와 내용을 지니고 있다.

 

요한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주님의 하신 사역이 이미 하나님이 성경에 예언하신 대로를 이루시는 사역이었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의 사건도 성경에 응하시려는 사역이고, 이로써 주님이 참된 메시야요, 참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고 있다.

      

1언의 말씀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23:34)

주님 자신이 스스로 진실로 중보자이셨음을 증명하신 것이다.

누가 죽어가는 순간에 그것도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 가장 치욕적인 죽음을 당하는 순간에 원수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 이는 진실로 우리를 위해 중보자로 오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도이고 주님은 지금 그 기도를 하심으로 스스로 중보자이심을 증명하셨다.

 

이렇게 하심은 전적으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다. 주님의 사역은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그 계획하심에 대한 순종이었다. 성부의 그 계획하심은 이미 구약에 예언되고 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 우리를 살리실 그 일에 대해 하나님은 한 순간 즉흥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다. 만약 그리하셨다면 그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셨다. 이는 죄인된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귀하게 여겨주셨다는 증거가 된다.

 

그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오실 주님의 모형을 보여주셨다. 노예 상태에 있었던 이스라엘백성들을 구출해 내어주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을 만들고 그것에게 절을 하는 배반 행위를 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실 때에 모세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 한다. 그들을 살려달라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기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한 그 기도를 했다. 이는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실 주님에 대한 예언이다. 이 성경이 주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32: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32: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32:11)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32: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32: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32:31)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

(32: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모세는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려고 한다. 이는 그 백성들을 향한 사랑이었다. 주님은 이제 십자가에 자신을 매달아 죽음을 택하심으로 우리를 살려내고 있다. 이 위대한 사랑에 우리는 감사해 하는가.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부하나님이 명하신 그 사명을 철저히 감당하고 계시는 주님의 놀라운 이 사역하심을 우리는 아는가.

진실로 우리는 이 같이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내 형편과 내 기분대로 내 마음대로 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우리가 아닌가.

부활 주일 이 날에 새롭게 결단하자. 주님을 본받아 어떤 순간에도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겠노라고.

 

2언의 말씀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마지막까지 죄인을 구하려고 애를 쓰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이시다. 못으로 인한 고통과 사람들의 조롱 소리가 귀를 어지럽히는 그 순간에도 주님은 죄인을 향한 그 구속 사역을 멈추지 않고 계신 것이다.

 

마지막 순간, 고통으로 죽어가는 그 순간에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어 보이는 그 사실을 끝까지 주장할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주님같이 십자가의 이 순간에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오히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고 말하는 이 강도를 향해 저주를 퍼붓기 바빴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순간에도 너무나도 진지하게 구원받은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이 메시야임을 증명하셨다.

 우리로 하여금 어리석은 그  강도처럼 주님을 비방하는 자의 자리에 서게 하지 않으시고, 구원을 사모하는 그 강도와 같은 자리에 서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진실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하신 그 말씀이 내게 은혜로 다가오는,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하나님을 찬양하자.


3언의 말씀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19:26-27)

이 말씀은 세상의 인연보다는 하나님의 사명을 우선하는 그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주님께서 그 택하신 제자들이 사역을 감당할 때, 원칙을 말씀하셨다.

(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9: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9: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원칙에 대한 모범을 직접 보여주신 것이다.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한 것은 세상적인 인연에 매여 사역에 중심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이 철저히 성부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자 하심이다. 이 생각은 이미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순간에 분명히 하셨다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 그 모친 마리아를 향해 어머니라는 호칭대신 여자여라고 하심으로 그의 사역이 인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 명하신 공사역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이렇게 하심으로 모세의 십계명중 5계명을 충실히 이행하셨고, 당신이 이 땅에서 가르치신 사랑에 대한 말씀의 실천을 완성하신 것이다.

 

가장 불쌍한 여인, 남편이 없고 이제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서 잃어버린 마리아를 위한 주님의 사랑이 그의 가장 아끼고 사랑한 제자, 요한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실제로 이 요한은 마리아를 평생 모시고 살았다. 아들, 예수를 대신해서.

이 사랑이 온 교회에 충만할 것을 주님은 원하시는 것이다.


4언의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27:46)

이는 주님 자신이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셨음에 대해 성부하나님께 감사하는 표현이리라.

성부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를 살리시려고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제물로 삼으시기로 결정하셨고, 그 계획하심을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심으로 구체화 되었다. 우리를 살리시려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이념만인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러하셨음을 주님이 증명해 보이신 것이다.

 

죄인된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이 주님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나 보이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부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사랑이 자신을 통해 드러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현이 이 말씀이셨던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고통당하고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외면당해버린 것 같은 그 절망감에서 나온 부르짖음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라면 이 순간에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이 드러나 보였다고 감사할 수 있을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릴 때, 그는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하는 마음으로 그리 했을 것이다. 이삭은 기쁜 마음으로 번제단에 스스로 걸어올라 갔을 것이다. 이는 진실로 오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그 마음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가 아니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당신의 뜻에 따라 나를 버리셨나이다. (그리하셨음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구절에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그리하셨을까.

이미 온 몸이 상해 큰소리를 낼 여력도 없었을 텐데. 어떤 자들의 말대로 하나님에게 부르짖는 절규라면 그는 사명자로서의 자격이 없어지게 된다. 절규는 원망을 포함하는 의미이니 그에게 사명을 맡기신 성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하는 소리가 되며, 그는 참된 사명자가 될 수 없고, 참된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 절규라면 대단히  이기적인 예수님이라는 것이 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 위대한 사랑, 당신의 독생자를 제물로 삼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리려는 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듣고 깨달으라고, 모든 사람들이 들으라고 그렇게 소리 높여 외치신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5언의 말씀 : "내가 목마르다!"(19:28)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주님께서 육신적인 목마름이 절정에 달해서 하신 말씀일까. 그럴 수도 있다. 주님도 사람이시므로 인간이 느끼는 고통 그대로를 느끼셨을 것이다. 단순히 육신적인 목마름뿐이었다면 굳이 성경에 기록으로 남길 이유가 있을까.

 

오히려 이 목마름은 여전히 구원받아야 할 자가 많음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제자들로 하여금 이 목마름을 해결하는 사역을 하도록 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자신이 한 그 사역을 이제 제자들이 본받아서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 같이 그렇게 감당해내기를 바라시는 바램이었다.

 

이 바램은 이루어졌고, 지금도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6언의 말씀 : "다 이루었다!"(19:30)

성부 하나님의 그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선언이시다.

또한 주님은 성부 하나님의 예정되신 자이신 동시에 보내심을 입은 사명자이셨다. 이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하심으로써 그의 사명의 온전한 완수를 선언하시고 계신다. 이는 예정을 입은 자로써의 할 바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택함을 입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자신의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예정하셨으므로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 곧 순종이다.

일찍이 주님은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들은 각기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남겨 주인에게 돌려드리는 예화를 들려주셨다. 받은 만큼을 다시 벌었다는 것은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다 이루신 것은 구속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신 것을 말한다.

죄인을 부르신 그 일, 이제 그 사명이 우리의 몫으로 남겨졌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 사명이 감당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7언의 말씀 :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성부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기도이다. 택함을 입은 자가 하나님 앞에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도가 이것이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주어진 사명에 대해 최선을 다했으므로 그 다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한다. 이것이 바른 예정관이다. 하나님의 그 예정하여 선택된 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순종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 다음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순종을 한다. 택함 입은 자의 맏아들 격인 주님이 이 같은 모범을 보이심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분명히 보여주신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사, 택함을 입은 자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신 이 주님이야말로 참된 메시야요, 참된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보이셨다.

우리의 기도가 또한 이것이니 "내가 진실로 이같은 은혜를 허락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나이다!"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