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6. 1.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다스리라’라고 하심에 관하여(2)”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정복하라는 말과 다스리라는 말에 대한 느낌이다. 보통 정복하라거나 다스리라고 하면 이 정복과 다스림이 미치는 쪽인 상대방을 생각하게 된다.
내 눈을 기준으로 하여 안으로 볼 때 보이는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다. 밖으로 보면 보이는 대상은 다스림과 정복의 대상이라고 생각해온 상대방이다. 정복당하는 쪽과 다스림을 받는 쪽은 분명히 상대방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정관념처럼 ‘정복하라’라거나 ‘다스리라’라고 하면 상대방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과연 정복해야 할 대상과 다스림을 받을 대상은 상대방이며, 그 대상에서 나를 제외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담과 하와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명하셨음은 분명하다. 성경 기록에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이런 명령을 하신 것으로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이 정복과 다스림에서 성공했어야만 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었고, 사명자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야 할 책임과 의무 하에 놓인 자였기 때문이다.
아담은 적어도 외적으로는 그 사명을 비교적 잘 감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 그가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줌에서 드러난다. 우리가 반려견을 입양하면 그에게 반드시 이름을 지어준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놈을 지극한 사랑으로 돌볼 것에 대한 일종의 약속이다. 그래서 아담이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그들을 사랑으로 다스릴 것임에 대한 상징이었다.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창 2: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이렇게 아담은 자기 외부의 존재에 대한 다스림에서는 성공한 듯이 보인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모든 피조물의 이름을 짓고 관리하는 일, 즉 외적인 통치에서는 그는 순종적이고도 유능한 청지기로서의 그 다스림에서는 사명을 어느 정도는 수행했지만, 궁극적인 시험은 내면의 절제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내면의 세계, 곧 욕망과 판단을 다스림에서는 실패하고 만다. 바로 “선악을 아는 그 나무의 열매”에 대한 그 욕망을 다스리는 그 일에서는 실패한 것이다. 자기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그 욕망에 대해서는 정복하지 못한 자가 되고 말았다.
아담에게서의 그의 내면에 존재한 이 욕망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의 욕망이었다. 아담은 외적인 질서를 다스릴 권세를 부여받아 행하는 일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되,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욕심과 싸우는 ‘자기 통제의 권세’에서는 일그러지고 말았다.
만약 그가 하나님께서 다스릴 자로 세우신 그 참된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깨달았더라면 그런 우를 범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자기 눈으로 바깥 세계를 바라보며 다스리려고 하지만, 정작 그 눈으로 자신 내면을 바라보고, 그 마음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데는 놀랄 만큼 무관심하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다스림’의 참된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늘 실수를 범하고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지 말고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가르치신 것이 바로 이 내면의 다스림에 눈을 뜨라는 그 말씀이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 눈 속의 들보’는 단순한 실수나 죄보다 더 깊은, 자기 의, 자기중심적 판단, 감추어진 욕망을 뜻함이다.
이것은 결국 내면의 다스림 문제이며,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실 때만 제대로 볼 수 있는 영역이다. 이 말씀은 윤리적 교훈을 넘어서, 회개와 자기 통찰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내면의 변화로 나아가라는 초청이었다.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마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 욕심을 다스리지 못할 때는 그 욕심이 욕망이라는 괴물로 변하여 그의 모든 생각과 그리고 판단하는 이성을 가로막아버린다. 아담이 범죄한 그 순간에는 욕망이 그의 내면을 사로잡았고, 그 결과로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었으니 결국 아담은 죄인의 자리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욕망에게 지배당해버린 아담이었으니, 그 순간의 그에게 과연 자신을 바르게 다스릴 능력이 남아있었겠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의 존귀함마저도, 과연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겠는가?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일은 결코 스스로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았으되 그것을 자기의 임의대로 행할 수 있는 자율적 통치자는 아니었다. 그 권한을 행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일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아직 아담은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실제로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그 현장에 하나님은 계시지 아니하였고, 사탄과 하와, 그리고 아담만이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곧, 아담이 ‘하나님의 동행 없이도’ 자기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고 하는 위험한 착각에 빠졌음을 시사한다. 그 순간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쳤고, 결국 자기 내면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여 다스림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오늘날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다스림에 실패하지 않으려면 늘 하나님의 동행을 간구하는 그 기도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이 사실에 대해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이 서신에서 오직 성령의 은혜인 그 열매로서의 절제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이 절제는 내적 다스림에 대한 절대적인 안전장치가 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절제란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은혜의 결과물로서의 그 열매라 했다. 성령 하나님이 동행하시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절제이고, 그 절제의 결과로서만 바른 다스림이 가능하다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결국 바른 다스림은 성령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서야만 가능하다. 그러하니 우리가 어떻게 깨어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날마다 성령 하나님의 동행을 간구하는 기도야말로, 우리의 삶에 대한 그 다스림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 아니겠는가!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내면을 다스리는 자율적 통치자가 되는 일이 왜 그리도 중요할까?
죄를 범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 지음을 입은 자로서의 그 아담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리에 서 있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 속성을 지님을 의미한다. 유유상종이라 하지 않던가!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그분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분을 닮지 않는다면, 동행은 불가능한 것이다. 세상에서도 서로 다른 성향을 지닌 자들은 결코 함께 어울릴 수가 없다. 친구를 알려면 그 친구를 보라고 하지 않던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그 속성을 닮지 않는 상태에서는 결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 하나님과 완전한 동행을 이루는 곳, 그곳은 우리가 늘 꿈꾸는 바로 그 천국이며, 장차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는 삶을 살 것이다.
아담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자율적 통치자의 자리에서 떨어져 버렸을 때, 그는 결국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됨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자리에서 쫓겨남을 의미한다.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따라서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성화를 이루어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의 내면을 다스리는 일, 즉 내면적 다스림의 자율적 통제자의 그 자리에 서는 연습이다. 이 연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유는 이 일을 통해서야만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일을 결과하기 때문이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성경이 그 많은 인물을 통해 이 다스림에 대해 교훈하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모세의 이야기도 그중 하나로서 성경은 대단히 엄중하게 다루고 있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그 사건이 바로 모세가 내면의 다스림에서 실패한 일이다.
(민 20:10)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민 20:11)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민 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명자였다. 그래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그 일에 전심전력했어야만 했다. 모세에게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음이란 자신에게 맡겨진 그 백성 이스라엘을 자신의 목숨보다 아끼는 그 사랑을 이루는 그 일을 감당함이었다.
실제로 그는 하나님이 우상에게 경배한 그 백성들에게 진노하시고 그들을 멸하려고 하실 그때,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실지라도 이 백성들을 멸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그 기도를 드렸다.
(출 32:31)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출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
그 순간의 모세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려 죄인을 구속하신 주님의 그 사랑을 그대로 빼다 닮았다. 그의 삶의 여정은 그런 사랑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한순간, 사랑하는 누이 미리암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마음에 깊은 슬픔이 자리하고 있었을 그때, 그 상실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백성들의 원망은 그의 내면에 또 다른 상처로 번져갔다.
(민 20:1) 정월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서 백성이 가데스에 거하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 장사하니라
(민 20:2)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민 20:3)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가로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 뻔 하였도다
(민 20:4)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누이 미리암이 세상을 떠난 그 아픔을 당한 순간에도 그 심정도 모르고 오직 자기들의 유익만을 탐하여 하나님의 처사에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 이스라엘을 향한 분노가 치밀었다. 아담이 하나님을 붙잡은 그 손을 놓았던 순간처럼 모세도 그 순간에는 하나님을 붙잡았던 그 손을 놓아버렸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한순간 멈추어져 버리니 그의 내면에 있던 절제가 사라지고 그 다스림은 무너졌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끝내는 반석을 두 번이나 치고 마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이 사건을 성경에 기록으로 남기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모세를 우리에게 교훈의 거울로 삼으라고 명하심이었다.
(고전 10: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고전 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전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명자에게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엄격하게 그 책임을 물으신다. 그래서 사명자였던 모세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엄한 책임을 물으셨으니 그는 가나안 땅이 보이는 느봇산에서 그의 삶을 마감해야만 했다.
(신 34: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신 34: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신 34:3)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신 34: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신 34: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신 34:6)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경우도 이 내면적 다스림에 대한 좋은 예이다.
이스라엘이 세상적인 욕심으로 왕을 구했다. 그들의 눈에는 왕이 앞장서서 군대를 이끄는 이방 족속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부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다스림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족속들이었다. 끝없이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의 그 다스림에 배가 불렀다. 그래서 투정했다. 우리에게도 왕을 달라고!
(삼상 8: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삼상 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삼상 8: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삼상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하지만 하나님과 같은 왕이 어디 있는가!
세상의 왕이란 대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그런 다스림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런 왕을 구했다. 죄로 인해 지혜가 가려져 있으니 어찌하랴! 지혜자 솔로몬은 그런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그것이 지혜라고 가르쳐 주었다. 호세아 선지자도 그렇게 가르쳤다. 하지만 영적으로 죽어 있으니 그들이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었겠는가!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세월이 흐르고, 그들의 후손들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뵈었으나 여전히 죄로 인해 영의 눈이 가려져 있었기에 그 하나님을 알아볼 수 없었다. 참하나님이신 예수를 그들은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버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최대로 불행한 일을 저지른 족속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그 이스라엘이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알지 못해서 그 백성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을까!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고후 4: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행 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 7: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아니다. 분명히 아니다!
그토록 어리석고 불행한 일을 반복하는 그들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는 참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세상에 보이시려고 그런 자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고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를 드러내시려는 것이었다.
우리라고 이 세상의 믿지 아니하는 다른 자들보다 나을 것이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아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선택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참으로 당신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려 하심이었다. 그런 위대한 사랑을 우리가 한 조각이라도 이해하기나 하는 것일까?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일전을 앞두고 있었는데, 사무엘 선지자는 더디 오고 군사들은 겁이 나서 달아나고 있었다. 이 순간을 참지 못하고 사울은 스스로 제사를 주관했다. 하나님의 일을 탐해버린 것이다. 아담이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그 일에서 실패한 것처럼, 그렇게 사울 왕도 선악을 아는 그 나무의 열매와 같은 그 제사를 먹어버렸다.
(삼상 13:5)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여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서 벧아웬 동편 믹마스에 진 치매
(삼상 13:6)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삼상 13:7)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은 떨더라
(삼상 13:8)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삼상 13:9)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 사건을 성경에 기록케 하셨을까?
성화 계단을 밟고 가는 우리에게 사울 왕과 같은 잘못을 행하지 말라는 우리를 향한 사랑의 교훈을 하심이었다.
만약 우리가 그 사울 왕의 입장에 있었더라면 사울 왕처럼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는가?
절체절명의 순간, 어쩌면 사무엘은 이 전쟁이 끝나고도 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군사들이 사기를 잃고 모두 달아난다면 이 전쟁에서 패할 것은 자명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도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온다면 과연 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담대하게 기다릴 자신이 있을까?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 다스림이란 어떤 순간에서라도 하나님 당신의 뜻을 따르라는 그 다스림의 명령이시다. 이런 내면적 다스림에 대해서 우리는 승리해야만 한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그랬다. 그가 바로와 대면했을 때, 어쩌면 예쁜 미모를 가진 자기 아내 사라로 인해 자기가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그 두려움 때문에 자기의 내면을 다스리는 그 일에서 실패했다. 하나님의 동행을 간구하는 그 기도를 드릴만한 믿음의 경지에 아직 이르지 못한 그때의 아브라함이었다. 그랬으니 그는 능히 자기의 내면을 다스리는 그 다스림에 대해서 실패하고 말았다.
(창 12: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창 12: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창 12:13)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위대한 믿음의 사람 다윗의 경우도 좋은 예가 된다. 골리앗의 기세에 눌려 감히 대응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그 결투에서 아직 나이가 어려 전투에도 참여시켜 주지 않았던 그 다윗이 당당히 나섰다.
(삼상 17:26)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사울 왕이 자기의 갑옷과 투구를 주려고 했다. 적어도 맨몸보다는 나을 것이라 여긴 사울 왕이었다. 하지만 다윗으로서는 그것으로 무장하기에는 몸집이 너무 작았다. 대신에 다윗은 하나님께 동행해 달라고 기도한 그 믿음으로 무장하고 담대히 나아갔다.
(삼상 17:38)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삼상 17:39)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치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삼상 17: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그 순간에 하나님은 다윗과 동행하셨다. 하나님이 다윗의 오른손을 붙드셨고 그 손에서 물맷돌은 정확히 나아가 골리앗의 아마에 정통으로 꽂혔다.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삼상 17: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삼상 17: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그렇게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신을 다스려 나간 다윗이었다. 하지만 한순간 그가 하나님과의 동행을 멈추었을 때, 그는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그 다스림에 실패해버린다.
이스라엘이 한참 전쟁 중이었다. 전쟁에서 그는 늘 이스라엘 군대에서 앞장을 섰다. 앞장을 선다는 것은 그 백성들을 사랑함을 의미했다.
이스라엘 군사들도 자기의 백성이지 않은가! 그들 중의 하나라도 다치지 않기를 원하는 그 마음, 그것이 다윗의 그 백성을 사랑함이었다. 늘 자기 백성을 보호하려고 앞장서서 전투를 치르던 다윗이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 궁에 머무른 것은 한순간 하나님과의 동행이 멈추어짐이었고, 자기 백성들이 상하는 것을 막으려는 그 사랑도 멈춰짐이었다. 오직 자기의 목숨과 자기의 유익을 먼저 구하고자 하는 그 욕망이 그 순간 다윗의 내면에서 빗장을 풀고 나온 일이었다.
(삼하 11:1)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사랑이 내팽개쳐진 그 상태는 다윗으로서의 자기 다스림에서 실패한 그 순간이었다. 그 다스림에서 실패했을 때 그의 내면에 갇혀 있던 욕망이 빠져나왔고, 그 욕망은 결국 밧세바를 취하는 그 죄로 귀결되었다.
(삼하 11:2) 저녁 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삼하 11:3)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삼하 11:4)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내면적 다스림이 실패했을 때, 그 속에 감춰져 있던 욕망은 날개를 펴고 위로 솟구친다. 그때의 욕망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결코 감당하지 못한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 하는 다윗도 그 욕망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의 믿음에 치욕스러운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우리가 늘 성령 하나님의 동행을 구하며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내 능력으로는 결코 이 마음 깊은 곳의 욕망을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 하나님만이 그 욕망을 다스리시며, 우리 안에서 참된 질서와 평안을 세우실 수 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의 이 거친 욕망을 성령의 권능으로 억제하시고,
저로 하여금 내면의 다스림에서 승리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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