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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죄 없는 은혜, 다시 시작하는 용서의 자리 -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처분 사건에 관하여(2)

by 영동장로교회 2025. 5. 4.

2025. 5. 4.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정죄 없는 은혜, 다시 시작하는 용서의 자리”

-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처분 사건에 관하여(2) -

 

 

그러면 예수께서 땅에 쓰신 그 글들은 무엇이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왜 그 쓰신 글들이 무엇이었다고 성경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

 

성경은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그 뜻을 밝힌 글들이다. 그래서 성경의 그 기록들은 우리의 구원과 관계되는 그 비밀들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런 연고로 그 일들과 관계되지 않는 일이라면 그 기록은 성경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만약 그런 것들까지 모두 소상히 기록되었다면, 성경은 신변잡기처럼 방대하고 산만한 기록이 되었을 것이며,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본질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께서 땅에 쓰신 그 글은 우리의 구원과는 직접 관계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할지라도 우리의 호기심은 여기서 멈출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과 신학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견해를 펼쳤다.

 

일부 학자들과 전승에서는 예수께서 당시 사람들의 죄를 땅에 쓰셨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17장 13절에서는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되리니"라는 구절이 있어, 이를 연관 지어 해석하기도 한 것이다.

​(렘 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추측에 불과하며, 성경 본문이나 에티오피아 정교회 성경에서도 예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땅에 쓰신 글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으며, 이는 신학적 해석과 전통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을 뿐이다.

 

에디오피아 정교회는 고대 성경 사본인 게에즈어(Geʽez) 성경을 보존하고 있으며, 이 전통 속에서 요한복음 8장은 특이하게도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And Jesus stooped down, and wrote on the ground the sins of each of them...”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그들 각자의 죄를 땅에 쓰시니...)

 

이 해석은 에디오피아 전통 주석서인 "Andemta"에 기반하며, 여기서는 예수께서 고발자들의 은밀한 죄들을 드러내어 부끄러움을 일깨웠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주석가들의 공통된 대표적 해석으로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이 간음한 여인을 고발하고 있는 그 고발자들의 죄를 지적했을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예수께서 고발자들의 숨은 죄나 이름을 땅에 쓰셨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이들이 그렇게 말한 그 근거로 드는 것이 예레미야 17:13의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되리니…”의 이 말씀이다. 이 구절을 근거하여 예수께서도 그들의 죄를 흙에 기록함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양심의 가책을 받도록 했다는 해석이다.

 

그다음으로는 침묵을 통한 지혜로운 대응을 하시려고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땅에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의도적 침묵이며, 판단을 유보하고 감정적인 대응을 피한 절제의 모습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 해석은 예수의 자세를 모세의 율법과 은혜 사이의 갈등에 대한 깊은 묵상으로 본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모세 율법의 내용을 쓴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몇몇 주석가들은 레위기 20:10이나 신명기 22:22 등 간음에 대한 율법을 땅에 쓰심으로써, 그들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하셨다고 해석함이다.

(신 22:22)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신 22:23)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신 22:24)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레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대체적으로 주석가들의 해석은 이러한데, 여기서 다시 대표적인 주석가들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매튜 헨리 (Matthew Henry) 주석인데, 그는 예수께서 땅에 글을 쓰신 것이 고발자들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한 침묵의 행동이었다고 본 것이다. 그의 해석의 핵심은 글자 그대로의 내용보다, 그 순간의 정적과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예수는 격렬한 논쟁에 휘말리지 않고, 묵묵히 땅에 글을 씀으로써 그들의 함정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땅에 쓴 것이 무엇인지보다는, 그 행동 자체가 깊은 영적 상징으로 작용한다고 그는 보았다.

 

두 번째는 존 칼빈 (John Calvin) 주석이다. 그의 해석의 핵심은 예수께서 땅에 쓰신 글의 내용은 중요치 않으며, 의도적으로 대응을 유보한 행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글을 쓰셨다는 사실은 단순히 시간을 벌고 침묵을 지키기 위한 방식”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예수의 행동을 지나치게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그 행동을 통해 예수의 내면적 평정과 지혜에 주목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율법주의자들의 형식적 정의와 자기 의를 예수께서 지혜롭게 무력화했다고 보았다.

 

세 번째로는 윌리엄 바클레이 (William Barclay) 주석이다. 그의 해석에서 예수께서는 땅에 글을 쓰신 목적이 고발자 개개인의 죄목일 가능성이 크며, 그들의 양심에 직격탄을 날린 행위로 보았다.

 

그의 해석의 핵심은 “예수께서 그들 각자의 이름과 죄를 썼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함에 있다. 이는 예레미야 17:13과 연결되어, 땅에 쓰인 자는 심판받는 자로서 영적 수치의 상징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양심에 찔린 그들은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 아무도 남지 않았다고 보았다.

 

네 번째로는 성 어거스틴 (Augustine)의 주석이다. 그는 예수의 침묵과 글쓰기를 하나님의 인내와 은혜의 표현으로 해석했다.

“그분은 말하지 않으시고 기록하셨다. 이는 말로 정죄하지 않고, 행동으로 양심을 찌르신 것이다.” 또한 "예수는 간음한 여인을 변호하지 않았고, 정죄자들을 해산시켰다"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는 그레고리오스 신학적 해석이다.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azianzus 또는 Gregory the Theologian)는 4세기 교부로서, 동방 정교회의 대표적 신학자이다. 그는 이 사건을 ‘자비와 진리의 만남’으로 해석했다.

 

간음한 여인은 율법으로는 정죄 받을 자지만, 예수의 신적 자비로 보호받았다고 보았다. 그가 땅에 쓰신 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죄인을 향하지 않고,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을 향한다는 상징적 선포”로 보았다. 그리고 예수께서 땅에 쓰신 글은 일종의 침묵 설교이며, 율법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총을 드러낸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다양한 신학자와 주석가들의 견해는 그 나름대로의 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해석되어 있어 그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의 견해대로 예수께서 정죄를 요구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이름과 그들의 죄를 하나하나 밝혀 기록하셨다면 그는 자기모순을 안게 되고,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그 술수에 말려들고 마는 것으로 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분명히 남의 흉을 보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의 이 말씀은 죄인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사랑으로 품으라는 가르침이었는데, 만약 예수께서 이 순간에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고, 거기에다 그들이 아무도 모르게 지은 그 죄들을 모두 적었다면 결국 모든 사람들 앞에 그들의 죄를 폭로하는 것이 된다.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마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눅 6: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이는 예수 자신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 되는 일이 될 것은 분명하다. 만약에 그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이름과 숨겨진 죄상이 모두 드러나면 그들 중에 누가 그것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를 요청하기나 할까!

 

지금 그들의 복장을 보면, 누가 보아도 거룩한 그 복장으로 치장되었을 터인데, 한순간에 자신들의 추악한 죄상이 드러나 그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의 이름을 기록했다고 해석한 것은 주님을 모르고 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신에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그 죄상을 낱낱이 기록하셨음은 분명할 것 같다.

 

아무도 모르고 자기만 아는 그 죄목을 보는 순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알았을 것이다. 주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니 그들이 아무도 모르게 어디에선가 범한 그 죄까지 소상히 아신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지내 온 그 죄목이 땅에 씌워지는 순간,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오늘 이 장면에서 예수께서 보여주신 그 모든 행위들은 남을 정죄하기 전에, 내 안의 죄부터 직면하라는 당신의 사랑 어린 교훈이었다. 우리가 죄인을 정죄하는 돌을 들기 전에, 먼저 우리 손에는 은혜의 손길이 있어야 한다는 귀중한 가르침을 주신 순간이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주신 바로 그 사랑이었다.

 

이 장면에서 예수는 진정한 율법의 완성자이시며, 동시에 은혜의 화신이심을 몸소 드러내셨다. 사랑은 율법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참된 정신을 완성하는 길임을 몸소 보여준 사건이었다.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드디어 예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이는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하나라도 구원에서 탈락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인내하신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겔 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그러나 그 인내의 시간은 무한하지 아니하다.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하실 일을 하셔야 한다. 회개치 아니하는 자에게는 그 죄값에 대해 영원한 형벌로 다스리실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공의하심에 따른 결과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그렇게 기다리심이다.

(롬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롬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롬 2: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히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히 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일어서신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물으셨다.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라고. 이 질문은 단순한 상황 확인이 아니라, 그 여인의 내면을 향해 “너의 죄를 인정하느냐?”라는 깊은 물음이었다.

 

정죄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그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이는 “네가 죄인임을 인정하느냐?”이니, 이 물음이 “너의 죄에 대해 회개하느냐?”라는 회개를 요구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이 사건에서 예수께서는 두 가지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셨다. 하나는 구부려서 땅에 글을 쓰시는 모습과 또 다른 하나는 일어서서 여인을 대면하여 말씀하시는 모습이다. 이 두 가지의 모습은 예수의 사역을 암시한다.

 

예수는 인성과 신성의 이성을 지니신 자로 이 땅에 오셨다. 인성을 취하심은 우리의 죄를 대신할 대속물로서의 그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함이셨고, 신성을 지니심은 죄인이었지만 구속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입는 그 칭의 선언을 감당하실 구속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함이셨다.

 

그래서 이 사건에서는 몸을 구부려 숙이시고 땅에 글을 쓰신 예수는 죄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려는 그 사역에 대한 암시였고, 일어서신 후에 여인에게 이야기하신 예수는 칭의하실 그 사역에 대한 암시였다.

 

이 사건의 마지막 순간에는 여인과 예수만 남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하실 일이라는 그것에 대한 선언이셨다. 단언컨대 우리의 죄를 근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이 순간에 그 여인이, 참소하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놓임을 받고, 오직 예수만이 그의 곁에 있었다는 것은 이를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칭의’를 선언하셨다. “내가 너를 정죄치 아니한다”라는 것은 “내가 너를 의롭다 칭할 것이다”라는 그 ‘칭의’의 선언이었다. 이제 그 여인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의인이라 칭함을 받았으니 죄로부터 분명히 자유로워졌다.

 

“이제는 내가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은 의인으로 칭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인 ‘수양‘을 의미한다. 이 순간부터는 하늘 백성으로의 필요한 훈련과정을 거치게 되는 ’성화‘의 계단을 밟는다. 이 성화는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견인‘하시는 은혜에 따름이다. 이것이 주님의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하신 그 말씀 속에 담겨있었다.

(요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이 여인은 그렇게 예수를 만났고, 그의 삶은 변화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변화가 없었을 것이라면, 오늘 이 본문은 구속사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성경은 거짓이 되고 말 것이다.

(약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구원하시기로 정한 자는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전능하신 절대자이시기에 당신의 그 뜻은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여인은 주님의 그 은혜로 새로운 참된 삶의 길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 여인은 그렇게 예수를 만났고, 삶이 변화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런 변화가 없었다면, 이 본문은 성경에 기록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성경은 구속사적 증언의 책이기에, 이 여인의 삶은 반드시 구원의 은혜 아래서 변화되었을 것이고, 그 삶은 새로워졌을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그 여인은 우리를 상징한다. 죄 아래 놓였던 우리, 그러나 은혜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우리,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새 삶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바로 이 여인의 모습 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