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13.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사랑에 관하여(2)”
사도 바울의 이 가르침은 고전 10장에 가서 결론으로 도달하고 있다. 그래서 10장의 구조와 의도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경고로 제시함, 우상숭배의 영적 실체에 대한 경고 그리고 양심과 자유, 공동체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의도가 담긴 이글은 단순한 교훈적 사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관점에서의 경고적 유형론(typological warning)이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먼저 경고함으로써 10장을 전개하고 있다. (10:1–13)
바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 사례를 들어서 경고했는데, 그들도 영적인 특권을 누렸지만 (구름 아래, 바다 가운데, 영적 음료 등) 우상숭배, 음행, 하나님을 시험함, 원망 등으로 인해 대부분 광야에서 멸망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이렇게 말한 사도 바울의 의도는 자유만 강조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유만 강조하여 교만하면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도 명심할 일이다. 우리에게는 영적 자유함이 넉넉히 주어져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이 자유가 넘쳐 주체하기조차 어려운지도 모른다. 사탄은 이를 아주 유효적절하게 활용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넘어지게 할 것이다. 자유는 자율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유가 된다.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어서 사도 바울은 우상숭배의 영적 실체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고전 10: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고전 10:15) 나는 지혜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고전 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고전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고전 10: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고전 10: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고전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고전 10: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고전 10: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사도 바울은 단순히 고기가 문제가 아니라, 우상숭배 자체가 귀신과 연관된 일이라고 밝힌다.
주의 만찬은 주님과의 교제이듯이 우상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 경고한다. 귀신과 사귄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그 복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될까?
우리의 사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방 신전에서 우상 제사 음식 먹는 일에 이미 참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 진리를 깨달은 상태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그 일에 참여한 것일까?
고린도 교회의 신앙이 어린 상태에 있었던 자라면 아마도 그 진리를 알지 못한 채 그런 일을 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는 단순한 고기 소비가 아니라 우상 제사에 결합되는 것이므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는 행위에 참여함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그냥 내버려 둘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와 관련된 진리를 밝히고, 그들로 깨닫게 하려고 이 편지를 쓴 것이다. 그래서 23절 이후에는 양심과 자유, 그리고 공동체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고전 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고전 10: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10: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고전 10: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고전 10: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고전 10: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고전 10: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고전 10: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고전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며 개인의 자유를 절제할 필요성을 설명했다. 이는 ‘타자를 위한 자유(freedom for others)’를 말함일 것이다.
고기를 사 먹을 수는 있으나, 다른 이의 양심을 해치는 일이 된다면 자제하라고 명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 길로 인도하려는 사명자로서의 간절함을 담은 거룩한 명령이었다. 그의 이 명령의 목적은 명확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삶을 살라 함이었다. 이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삶을 살고 있는가?
연어는 한순간이라도 고향을 향하는 그 목표를 잊지 않았다. 어떤 유혹이나 겁박함이 그들의 그 염원을 꺾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향에 도달한 그들은 자기의 종족을 유지하는 그 사명을 완수하고,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어쩌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일 것이다.
연어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당신의 뜻을 밝히심이다. 이를 우리는 ‘일반계시라 한다. 이 일반계시의 한 예가 되는 연어의 삶은 또한 하나님께서 베푸신 ’보통은혜‘라 칭한다.
이는 연어를 통해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심이다.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이 은혜를 통상적으로 ’특별은혜‘라 칭한다.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그 뜻이 연어라는 한 생물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셨으니, 우리에게 구원하시는 이 은혜가 어찌 ’특별은혜‘가 아니겠는가!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고전 10: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여기서 말하는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 중 일부, 곧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멸망한 자들을 가리킨다.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이 사건은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 있다.
“백성이 길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그러자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았더라.”
(민 21: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민 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민 21: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즉, 광야에서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시험했던 이스라엘 백성 중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공급을 불신하고 불만을 품었던 자들이다. 이들은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냈느냐?”,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다”, “이 하찮은 음식(만나)이 싫다”와 같은 말을 하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조롱했다.
이는 하나님을 우습게 여김이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이들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삶이 가능했겠는가? 그들은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구원에 이르지 못한 그들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모두 구원에 이르기를 갈망하신다. 이를 분명히 밝힌 성경 구절로는 신약에서 디모데전서 2:3–4과 베드로후서 3:9을 들 수 있다.
(딤전 2: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을실 만한 것이니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진리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두를 사랑하사 하나같이 다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그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하나님은 단지 일부가 아니라 모든 믿음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베드로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증언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리 오래 참으실까?
하나님에게는 시간이 무한해서 오래 참으실까? 창조를 다 마치셨으니 할 일이 없으셔서 그리 오래 참으시는 것인가?
이는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아니하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이 그리도 크고 깊으시기에 우리가 이 모든 진리를 깨닫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자리에 나아오도록 그때까지 인내하시며 기다리시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나아올 때 비로소 우리에게 복을 허락하실 수가 있으시니, 그 복을 주시려고 그리도 오래 참으시는 것이다.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그리하실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심판을 유보함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사 우리가 구원의 길에 이를 수 있게 하시려 함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무어라 표현할 것인가!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드러난 구절이 있다. 에스겔 18:23이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아무리 악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면 하나님은 그에게 심판이 임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어찌하던지 회개를 통해 그들의 생명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겔 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 말을 하여 교훈하고 있다. “너희도 저들과 같이 주를 시험하지 말라”. 그리고 이 말씀은 또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러하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고전 10: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자유를 오용하고, 우상 제물 문제로 양심을 무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히 여기고, 영적 자만에 빠져 있는 상태는 아닌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거울삼아,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겸손히 은혜를 붙잡으라는 메시지를 그렇게도 간절히 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신다”라고 언급했다.
(고전 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전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이 사도 바울이 언급한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신다”라는 이 말에 대한 좋은 예이다. 그의 믿음이 연약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수준에 맞는 시험, 즉 훈련을 시키셨다. 이는 하나님의 인격적이심이 그대로 드러남이었다.
신앙이 아직 연약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맞는 훈련을 시키셨다. 바로를 대면하는 그 순간에 그는 자신의 믿음으로 그 위기를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노력을 하지 못했고, 그런 신앙적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피할 길을 마련하셨다.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셔서 바로로 하여금 이 사건의 의미를 깨달아 알게 하셨고,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창 12: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창 12: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창 12:13)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창 12: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창 12:15)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창 12:16)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창 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창 12: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창 12: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창 12: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드디어 그의 신앙이 성숙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보다도 귀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시험을 하셨다. 그 시험에서는 그는 온전히 자신의 믿음을 보일 수 있었다.
아브라함의 이 신앙적 여정은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의 백성들을 위한 훈련의 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전형적인 예였다. 지금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견인하시는 그 은혜 속에서 믿음의 훈련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따라 창세 전에 이미 구원할 자를 선택하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의 작정하심에 따라 때가 이르러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고,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중생시키시는 은혜로 거듭남을 입어 성화의 과정을 밟고 있다.
이 성화는 우리가 감당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견인하시는 은혜가 따르고 있다. 그래서 매 순간 우리는 시험을 직면한다. 이 훈련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돕는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아브라함이 바로를 만난 것도 하나님께서 그를 믿음의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해 마련하신 한 훈련으로서의 시험이었다. 그 시험은 그에게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쉬운 일로 보였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었을까?
그가 감당하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은 또 아니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에게 조금 버거울 정도로 시험문제를 내신다. 우리가 운동할 때 우리의 능력보다 조금 버거운 운동을 하면 우리의 운동능력이 느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렇게 출제하신 그 문제를 풀지 못하고 힘들어 하면 하나님께서 살짝 우리에게 힘을 보태주신다. 그것은 그 순간에도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멈추지 않으심에 대한 증거이다. 아브라함이 바로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나타나심이 그러했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따라 아브라함은 자신의 소유를 하나라도 잃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다. 아브라함을 사랑하심이 그렇게 드러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실을 깨달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글에서 이렇게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와 신자의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는 신학적 균형을 보여준 말씀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이 글을 기록한 근거는 무엇이며, 하나님께서는 왜 시험하시는 것일까?
이는 전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심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과 천국에서 영원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그 삶을 함께 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는 그 훈련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시험하는 그것으로 드러난다.
시험을 당할 때 그 시험이 감당하기 어려울수록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준이란 말은 곧 우리의 믿음의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심이다. 그러니 그것만큼 감사할 일이 또 있겠는가!
하나님의 이 사랑하심에 따른 부가적인 목적이 또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믿음의 진실함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이다. 이는 전적으로 연단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껍데기인지 드러나게 하신다. 진짜 믿음은 고난 속에서도 믿음으로 반응하고, 가짜 믿음은 조건이 사라질 때 쉽게 무너진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지극하시고 진실하심을 그 속성으로 지니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일을 위해서는 우리 역시 그러한 속성을 지녀야 한다. 믿음의 훈련을 통해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갈 수 있음이다. 이를 우리는 성화라 하는데,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일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두 번째는 더 깊은 신뢰로 이끄시기 위함이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신뢰하게 만드신다. 그래서 때로는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상황도 허락하신다.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에서 아브라함은 초반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다.
아들을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으니,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는 그 일을 결행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 가져온 결과였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데 어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한다 할 수 있겠는가!
그 상태에서는 결코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없다. 그렇다면 그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그 상태가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세 번째는 순종을 배우게 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조차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면, 우리 역시 시험을 통해 자기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훈련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히 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순종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를 수 없다. 그렇다면 애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라”라고 명하신 그 사명을 우리가 온전히 이루어낼 수 있겠는가?
아담이 이 순종에 완전하지 못했기에 결국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자리에 선 것이었다. 세상에 이처럼 불행한 일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이러한 불행한 자의 자리에 우리를 세우지 아니하시려고 순종을 배우게 시험을 허락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이 진실한 사랑에서부터 나온 이 일이 시험하심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찌 이 시험을 우리가 마다할 수 있겠는가!
네 번째는 성숙한 인격과 인내를 이루기 위함이다.
(약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은 우리 안에 인내와 성숙함을 만들어낸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인격이다. 그 인격은 훈련 없이는 자라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험을 허락하심이 축복이 아니겠는가?
다섯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때로 시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세상이 보게 하시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시험을 이기는 모습 속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이 드러날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그 기회를 주심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되니 이 또한 은혜요, 복 주심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시험은 믿음 없는 자에게는 걸림돌이 되지만, 믿음 있는 자에게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지도록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승리하도록 이끄시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는 인격적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이심에는 분명하다.
우리는 그렇게 은혜받은 자이기에, 하나님의 강을 거슬러 다시 돌아오는 연어처럼, 세상의 흐름을 따라 흘러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회귀하는 귀한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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