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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의 이스라엘과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제자들과의 비교분석에 관하여(2)

by 영동장로교회 2024. 9. 8.

2024. 9. 8.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출애굽의 이스라엘과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제자들과의 비교분석에 관하여(2)“

 

 

 

희미한 그림자로 보여진 구원에 대한 진리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그 실체를 드러내심으로 명확하게 하셨다. 모세를 통해 희미하게 드러났던 그 진리가 이제는 실체가 되시는 성자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사역하심으로써 명확히 드러났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을 향해간 그 일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인도하여 참된 제자의 자리로 인도하실 그 일에 대한 그림자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땅에서 제자들을 부르신 그것으로 사역의 시작을 하셨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구원 얻을 자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됨을 의미했다. 그 제자들이 능력이 있어서, 또는 마땅히 구원 얻을 어떤 권리나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그 제자들도 죄인이기는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그런고로 그들이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의 은혜를 입음 때문일 뿐이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은 그들이 선택함을 입을 무슨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따른 그 은혜를 입었음일 뿐이었다.

 

주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그 삶을 배우게 하셨다. 그들이 주님과 함께했던 그 삶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성화’ 단계였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주님과 함께하는 그 삶 속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도무지 구원받을 길이 없는 죄인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어 믿음으로 그것을 고백하는 그 일을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참되고 진실하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고백하는 그 일을 하지는 못했다. 간혹 자신의 죄인임에 대해 고백한 적은 있었지만, 그 고백이 주님과 함께한 그동안에 변함없이 지속되는 진실한 고백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베드로가 그랬다. 그는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그 무렵에 게네사렛 호수에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신 주님의 그 이적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다. 그런 고백이 있었음에도 그는 매 순간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그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그 모습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 즉 ‘소명’의 은혜를 입은 자는 성령 하나님의 중생시키시는 그 은혜에 따라 새롭게 된 심령 상태가 되니 능히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회개’에 이르게 된다. 회개하는 그 모습에서 그가 회개의 공로를 세운 것처럼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회개는 그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결과일 뿐이니, 그것이 결코 그의 공로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그가 회개한 그것이 그에게서의 ‘의’가 될 수는 없다.

(눅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 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눅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그렇게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 순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의를 주장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예수를 버리지 않을 것에 대해 선언한 사건, 예수의 고난 예고에 대해 반대한 사건, 그리고 변화산에서의 자기주장을 한 사건 등이다.

 

마태복음 26에서는 베드로가 다른 모든 제자들이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만은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한 기록이 등장한다. 이는 분명히 베드로가 자신의 의를 드러내어 보인 행동이었다. 그 순간의 베드로는 자기의 능력만으로도 얼마든지 주를 따르는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믿었던 것이다.

(마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마 26: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마 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 26: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 26:35)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그때의 베드로 반응은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이미지와 예수님의 사역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정치적 구원자이자 군사적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베드로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베드로는 세상의 가치와 기대에 따라 예수님의 사역을 해석했으며, 이는 그가 여전히 세상의 기준에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베드로가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반대한 것은, 그가 세상의 가치 기준과 관점에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세상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의 베드로는 아직 성령에 의한 그 ‘성화’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몰라서 그랬다. 훗날 성령으로 변화되었을 때에는 그의 모든 행하는 바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진실로 참되게 의로운 행동이 되었다.

 

이처럼 의롭게 되는 일은 사람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 베드로를 통해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로 깨달을 수 있게 하시려고 했다.

 

 

베드로는 결국 주님이 붙잡히시던 날에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부끄러운 비겁한 자의 자리에 서고 말았다. 이 치욕스러운 베드로의 행적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누구라도 능히 자기의 능력만으로는 의로운 자의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해 보인 사건이 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의롭다고 하는 그 자리에 섬이 오직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에만 의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게 해주려 하심이었다. 만약 우리가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과연 우리에게 구원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 사실을 알리시려고 얼마나 애를 쓰셨겠는가!

 

베드로의 그 교만에서 우러난 자기의 의를 주장한 사건 중 하나가 예수의 고난 예고에 대한 반응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자신의 사역에 대해 밝히심으로써 당신의 사명을 감당하셨다. 진정한 주님의 제자라면 주님의 그 뜻에 동참하고 그의 사역을 돕는 것이 마땅했다.

 

그 순간의 베드로는 성령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중생의 은혜를 입었기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죄악한 본성에 따라 세상을 탐하는 그 일도 능히 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순간 세상적인 욕심에 따라 판단했을 때, 자기에게 이득이 될 주님과의 동행하는 그 일이 무산될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세상적 이익을 위해 그렇게 말씀하신 주님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것이 “주님, 이런 일이 결코 주님께 미치지 아니하리다”라고 말한 것이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베드로의 이 행동은 자기의 생각과 판단이 옳다는 그 신념에 따른 것이었으니, 이는 그의 의를 드러낸 사건이 되고 말았다. 만약 베드로의 그 생각대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그 일을 그만두시게 되었더라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 사람의 자기의 이기적인 생각에 따라 행한 거짓된 의가 많은 믿음의 백성들에게 큰 화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늘 유념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백성으로서의 마땅한 도리요, 의무이다.

 

베드로의 그 행동은 비록 중생하는 은혜를 입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회개하는 자리에 섰을지라도 성화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자에게서는 능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혹시라도 온전히 성화를 이루지 못한 내 연약한 믿음에서 나오는 그 행동 때문에 하나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은 없는지.

 

 

예수께서 자기를 부르신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늘 생각했어야만 하는 베드로는 그것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것 같다. 주님과 함께하는 그의 삶 속에서 자신의 성화를 위해 몸부림쳤어야 했지만, 그의 관심은 그런 성화에 있기보다는 늘 세상을 향하고 있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언제나 가나안을 사모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틈만 나면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며 애굽 타령을 했던 것처럼 여전히 성화의 성숙을 이루지 못한 베드로도 틈만 나면 세상 타령했다.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자는 것은 자신의 세상적인 욕망의 한 형태였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와 함께한 그 모습에서 그는 하늘 영광을 보았을 것이고, 그래서 그 영광스러운 삶을 함께하고 싶었을 것이다. 주님이 그때 그 땅에 오신 것이 그 영광을 누리시려고 오셨던 것인가!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찌해서 주님의 제자 된 자가 주님의 그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편안한 하늘 영광만을 누리려고 욕심을 부렸을까! 베드로는 그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니, 주님의 뜻에 따른 의를 행함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에 따른 자기 의를 이루려 함이 되었다. 이는 온전히 성화 되지 못한 초보 신앙인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었지만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라는 점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마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 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마 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베드로가 때때로 자기의 생각과 뜻대로 자기의 의를 드러냄으로써 주님의 뜻과 배치되는 행동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런 일을 저지르는 초보 신앙 상태에 버려두시지는 않으셨다. 그에게 ‘견인’하는 은혜를 베푸셔서 끝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된 그 자리로 인도하셨다. 이는 견인하시는 주체가 되신 성령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였다.

 

그에게 그 일을 하신 하나님이 바로 그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신 자기의 선생 예수이셨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끊임없이 신앙적 성숙을 위해 힘을 불어넣어 주셨다. 매 순간 그로 하여금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지도하셨다. 이 사실은 변화산에서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라고 하신 그 음성을 들려주심에서 알 수 있다.

 

“저의 말을 들으라”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여 따르며 배우라는 명령이셨다. 우리보다 못해 보이는 믿음을 가졌던 그 베드로가 끝내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감히 흉내 내기도 어려울 정도의 믿음의 사람의 경지에 올라섰다.

 

그 순간의 베드로는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진실로 의로운 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베드로가 자기의 능력으로 그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시는 그 은혜로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가 의로워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의 선물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행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행 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행 2: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 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를 주장했다. 서로 누가 큰지에 대한 논쟁을 벌인 사건은 서로 자신이 더 의롭다는 그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주님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기에 바빴다.

(막 9: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막 9:34)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막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자의 자리에 섰을지라도 온전한 성화를 이루지 못한 자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을 주님의 제자들을 통해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바른 성화의 길을 가도록 교훈하심이 되었다.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믿음의 생활을 했을지라도 그때의 주님의 제자들과 같은 그런 모습만을 보인다면 우리를 위해 교훈하고 계신 주님의 그 심정은 또 어떠하실까?

 

예수께서 제자들을 모으고 그들과 함께 한 그것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려 하신 시간이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그 여정은 자신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간이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은 족속이라는 그 사실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했어야만 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바르게 깨달았더라면 현재의 자신들을 돌아보고, 자신들이 구원받을 길이 없는 죄인들이라는 것을 발견하여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사모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갔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의 1세대들은 그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고, 진정한 회개에 도달하지도 못한 고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 된 자리에 서지도 못했다. 결국 그들은 참된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없었다. 그러했으니 그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대신에 광야 그곳에 장사 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면 그의 내면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이 드러났을 것이다. 죄로 인해 죽은 심령이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어 거듭났으니 하나님을 사모하는 그 본성이 살아난 것이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본성이 살아났으니 하나님을 사모하여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그때의 이스라엘 족속들은 하나님의 그 은혜가 주어졌으니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사모하는 백성이 될 수 있었다.

 

그때의 그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에게 고백한 그 믿음의 고백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부족하지 않아 보인다. 믿음이 성숙한 단계에 이른 자의 모습이 바로 그때의 그 이스라엘이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믿음의 백성을 상징하고 있었다.

(수 24: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 24:16)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수 24: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수 24: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

(수 24: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수 24:20)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수 24: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수 24:2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수 24:23) 여호수아가 가로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수 24:24)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한지라

(수 24:25)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

(수 24:26)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수 24:27)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그들은 광야에서 성화의 단계를 밟아갈 때 성령 하나님의 견인하시는 은혜를 입었던 것이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이른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그 은혜의 결과였다. 그들이 스스로 이루어낸 어떤 의로움에 따른 그 결과는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전적인 순종으로 따랐다. 여리고 성의 전투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여리고 성을 무너트린 것은 그들의 공로가 아니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였다.

(수 6:15) 제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수 6: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수 6:17)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수 6:18)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수 6: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수 6: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수 6:21)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그 성이 무너진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그들을 견인하시는 과정에서 그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심이셨다. 그 견인의 은혜로 그들은 가나안 땅에 입성했으니 이는 우리가 얻을 ‘영화 구원’을 상징하는 그 일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서 ‘영화’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결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선물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도 예수와 함께 동행한 그 시간 동안에는 자신들이 누구인가에 대해 깊은 성찰을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참으로 구원받을 길이 없는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깊은 인식에 도달했어야만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한 것 같다.

 

때때로 서로 높은 자리에만 서려고 다툼을 일으키고, 자신들의 세상적인 유익을 위해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갔다. 한때 죄인임을 고백하고 주님께 믿음을 고백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그들의 공로가 될 수 없었다. 믿음을 고백한 그 일도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일이라고 하심으로써, 그것이 베드로의 공로가 아님을 밝히시기도 하셨다.

(마 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결국 주님이 이 제자들을 양성하시는 그 사역을 통해 스스로 의로워지는 그 일이 허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려고 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성령 하나님의 견인하시는 그 은혜로 참된 제자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성령 하나님의 견인하시는 그 은혜는 훗날에 제자들이 성령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극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가 의로운 자의 자리에 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일 뿐이라는 것을 주님의 제자 양육 사역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내어 보이셨으니, 누구라도 스스로 의를 이루어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그 욕심을 버릴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