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27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시는도다”
내가 대학교수로 재직하던 그 어느 때에 국제학술발표회가 있어 인도 아그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마침 타지마할이 그곳에 있었기에 둘러보았다.
타지마할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던가!
화이트 대리석으로 만든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 건물은 사실은 무덤이다.
인도의 무굴 제국의 제5대 황제 샤 자한이 그의 사랑하는 아내 무타즈 마할을 기리기 위해 지은 무덤이었다.
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연극으로 공연한 것을 관람했는데 그 공연을 본 사람들은 모두 무타즈를 부러워했다. 그 땅의 위대한 왕이 한 여자 무타즈를 위해 그렇게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줄 정도로 사랑한 그 사랑에 모두 감동한 것이었다.
그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으면 한 시라도 헤어지기 싫어 싸움터에도 데리고 다녔는데, 그녀가 마지막으로 아기를 낳은 것도 그 전쟁터의 천막 속에서였다. 그러나 그 마지막 출산으로 그녀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숨을 거둔 그 천막 속에서 샤 자한은 8일 동안이나 울었다고 한다.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타지마할이 건너다보이는 아므나 강변에 검은 대리석으로 같은 모양의 자신의 무덤을 만들고 자신이 죽으면 그곳에서라도 그녀를 바라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꿈은 자신의 아들의 쿠데타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 샤 자한의 무타즈를 향한 그 사랑이 나라의 곳간을 모두 탕진시켜버려 나라를 망하게 만들 것 같다고 생각했기에 아버지를 타지마할이 멀리서 바라보이는 붉은 빛이 나는 아그라 성에 가두어버렸다. 그곳에서 샤 자한은 타지마할에 누워있는 무타즈를 그리워하며 그렇게 서서히 외롭게 죽어갔다고 한다. 아그라성이 붉게 빛난 것은 어쩌면 무타즈를 향한 샤 자한의 피눈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한 임금이 베풀어준 그 사랑으로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감동하고 부러워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 사랑에 대해서는 그렇게 냉랭할까!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 속에 하나님의 그 사랑에 관하여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한 사랑이란 무엇이던가?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것은 오직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심에 의한 결과이며, 이 선택하심을 입은 죄인이었던 우리는 아무런 공로도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 즉 의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런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푸셨는데 어찌 감동과 감사가 넘쳐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 자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형벌을 우리 대신 당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을까!
세상에서 이런 사랑에 견줄만한 사랑이 또 있을까!
사도바울은 이 위대한 사랑에 대해 깊이 깨달았기에 자신의 세상적인 권세와 명예와 부를 모두 내던지고 주님을 따르는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이 사랑을 에베소 교회에도 베풀기를 원하였고, 그래서 이 편지를 썼으니 그것이 에베소서인 것이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엡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 1: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셔야만 하는가?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하나님이 되실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도덕적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거룩하시기에 선하셔야만 된다. 하나님으로서의 이 선하심의 성질은 곧 사랑하심으로 드러나게 되어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서 사랑하신다는 것은 그의 선하심에 대한 증거가 되고, 그가 선하시다는 것은 도덕적 속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시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자가 되신다.
그 지독한 사랑이 당신의 독생자로 하여금 이 땅에 오게 하셔서 죄인된 우리를 대신하는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당하는 그 모진 고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오직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여 살리시려는 그 지독한 사랑이 명하시는 그 명령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순종하실 뿐이었다. 사람들이 준 몰약을 탄 그 신포도주는 십자가에서 당하는 그 고통을 온전히 감당해내시려고 외면하셨다. 몰약을 탄 그 신포도주는 잠시라도 고통을 잊게 해주는 효험을 가졌음에도 예수는 그것을 거절하셨던 것이다. 만약 그가 그 포도주를 마셨더라면 그는 진정한 구속주가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막 15: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막 15: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막 15: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하나님의 이 같은 사랑 베푸실 것을 내다본 다윗은 이렇게 시를 읇었다.
(시 8:1) [다윗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시 8: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 8: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시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함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 즉 인자를 권고한다는 것은 돌봄이다. 사랑하지 않는데 어찌 돌볼 수 있겠는가!
따라서 생각하며 돌보는 이 일은 하나님께서 그 선택하신 자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리는 그 표현이었다.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은 것은 그를 사랑하셔서 그리하신 일이다. 만약에 천사보다 능력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면 자신의 그 능력만 의지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보다 조금 낫게 지으신 그 천사는 처음부터 자신의 그 능력만 믿고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는 그 일을 행함으로써 사단의 자리에 서고 말았지 않았던가!
만약 우리가 천사보다 조금 더 낫게 지음을 입었더라면 사단보다 더한 존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이미 아셨기에 우리를 잃지 않으시려고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지으셔서 항상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리에 두게 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못함이 진정한 못함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전능자이시고, 절대자이시기에 그 못함을 어쩔 수 없는 못함에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못함에 순종한 보상으로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시니 우리가 왕같은 제사장의 자리에 서게 하신다.
(시 8: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 8: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시 8:7)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시 8:8)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 8: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 약속은 요한계시록에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는 말로 확언되었다.
(계 2: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계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계 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계 2: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계 2:29)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렇게 되어질 바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미리 보이셨으니, 히브리서 기자는 ‘인자’를 예수로 해석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히 2:5)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히 2:6)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히 2:7)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히 2:8)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히 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 2: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히 2: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히 2: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 2: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히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많은 자들 중에서 하필이면 우리만 선택하셨는가?
그는 절대대자이시다.
누구의 간섭이나 무엇에 의해 강요됨이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으신 자는 절대자뿐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다. 그러하시기에 그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구원할 자로서 우리를 자의적으로 선택하실 수 있으셨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대한 이 절대권을 변명하기 위해 사도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롬 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롬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롬 9: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그 목적은 무엇일까?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 에베소 교회에 편지한 이 글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영광을 찬미하는 이 일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일생을 통해 할 바 그 무엇이 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행하는 것도 그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이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그 일을 함이다. 그런고로 그 일은 곧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사명을 말함이다.
(엡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 1: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굳이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려는 그 이유와 목적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온 천하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다. 그런고로 모든 것이 당신의 소유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부터 받으시려는 그 이유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려하심이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도록 우리가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일함이다. 이렇게 일하지 않는 것은 게으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게으름을 싫어하심이 주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드러났다.
(마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마 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마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마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마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부지런히 애를 쓰며 노력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는 자에게 주실 상급이 왕 같은 존재가 되게 하시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주시겠다는 것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죄인이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하심의 은혜를 입혀주셨고, 그래서 그 뜻대로 영광 돌리는 삶을 살면 우리를 다시 만나주시겠다는 그 약속이다. 그 만남은 그냥 만남이 아니다. 우리에게 완전한 사랑을 다시 주시려는 그 만남이다.
그래서 성경의 이 표현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이것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도에서의 최대한 표현이었다. 어쩌면 실제로는 그보다 더한 자리에 세우실 것이다. 이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에 그 이유가 있을 뿐이다. 그러하니 어찌 기쁨이 넘쳐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벧전 2: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벧전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벧전 2: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 약속은 요한계시록에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이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증언인 것이다.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충만하여 기쁨이 넘칠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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