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16.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사명자”
흔히 말하기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그의 제자가 됨을 의미한다고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 여기서 모든 족속이란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게 된 자들을 말함이니, 그런고로 복음을 받아들여 믿게 된 자들은 모두 주님의 제자인 것이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함께 하셨던 그때는 제자들은 단지 전하며, 치료하는 그 일들을 감당했다. 그러나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주님이 하셨던 그 가르침을 대신 감당하여야할 책임과 의무가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그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가르치라 명하셨다.
주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시던 그때는 제자들은 단지 전하는 일과 병 고치는 일을 감당했을 뿐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다. 선생 되시는 주님이 계셨기에 제자들이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승천하셨으니 그 가르침을 누군가는 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만약에 주님이 아니 계시니 이 가르침이 종료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 가르침은 종료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가르침이 없으면 누가 구원의 비밀을 알 수 있겠는가!
구원의 비밀을 바르게 깨달음이 없이는 바른 믿음에 이르지 못하고, 바른 믿음이 없이는 구원에도 이를 수도 없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일은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하니 그 가르침은 이어져야만 한다. 사도바울도 자신이 가르친 것처럼 디모데에게도 자신이 가르친 것을 다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명하고 있지 않는가!
(딤후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이 가르침은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끊임이 없이 이어져야만 한다. 그런고로 이 일은 믿는 자들에게 맡겨진 진 임무가 되니, 곧 사명이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다 사명자들인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사실인 것은 사명자들이 가져야할 바른 마음 자세에 대해 주님께서 청지기의 비유를 들어 강조하여 가르치셨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사명자는 주인의 뜻을 알고, 지혜 있고 진실하게 행한 바른 청지기처럼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눅 12: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눅 12: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눅 12: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눅 12: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눅 12:46)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눅 12: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눅 12: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사명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노라면 많은 고난과 핍박이 따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하여 포기해서는 안된다. 주님은 분명히 이런 고난과 핍박을 견디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는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이라고 하셨다.
상을 준다는 것은 고난과 핍박을 견디면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뜻이다. 그를 기뻐하시니 상을 주시지 않았겠는가!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그런데 사명자로서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사명을 감당하는 그 일을 자신의 능력으로 하려고 덤벼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명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감당할만한 능력을 선물로 주신다. 그러므로 그 능력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할 일이다.
그런데 사람은 착각을 한다.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라고. 사람의 그 어리석음을 하나님께서는 능히 아신다. 믿음의 사람이라도 이런 착각을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믿음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자를 위해 교훈하시려고 성경에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키셨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창세기에서는 아담이요, 구약시대에는 모세요, 신약시대에는 바울이다.
아담은 그 땅 에덴에서 다스림을 통해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여야만 했다. 그는 그 에덴을 잘 다스림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할 막중한 사명을 지닌 자였다.
사명자는 일꾼이다.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는 늘 일꾼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이 땅을 산다는 것은 사명을 감당하는 그 일을 한다는 것이다.
아담 역시 그와 같은 일꾼이었다. 일하면서 살아야할 에덴은 그래서 완전한 천국은 아니었다.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그 천국에서만은 그런 일을 함이 요구되지 않는다. 온전히 하나님을 찬양하며 참된 안식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일꾼으로서의 아담을 위해 하나님은 그 다스림에 필요한 지혜와 지식을 넉넉히 주셨다. 그런데 그 아담은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여 그 능력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탐하는 일에 사용하고 말았다.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고 판단한 그 능력은 하나님께서 그 땅의 모든 창조물들을 잘 다스리라고 주신 그 능력이었다. 그런데 아담은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말았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께서 내가 더 능력이 많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는 그것을 싫어하셔서 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하셨구나“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어!”라고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 지혜와 지식이 자라면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최고라는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부모님보다 자신이 더 현명하고 똑똑하다고 하는 착각으로 그 부모를 무시하기도 한다.
사람이 무엇을 알듯 한 상태에 이르면 자기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일류성 편향 (illusory superiority bias)이라 칭한다고 한다. 일류성 편향은 자신의 능력이나 성취가 평균보다 높다고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말하는데, 자신의 능력이나 성취에 대한 메타인지 (metacognition), 즉 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부족하거나 잘못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메타인지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얼마나 잘 할 수 있는지, 어떤 전략을 사용해야 하는지 등을 판단하는 능력으로서, 메타인지가 낮으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거나 합리화하려고 하며, 자신의 성공을 과대화하거나 타인의 성공을 과소화하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능력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식하지 못하고, 타인의 실력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부족하며, 자신의 능력을 개선할 방법을 모르는 반면에, 능력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의 실력이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타인의 실수를 이해하려고 하며, 자신의 능력에 대해 겸손하게 평가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담은 자신의 과오를 하와의 잘못으로 돌려 책임을 회피하고 있었다. 사명자라면 자신에게 있는 그 능력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시려고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명심해야 한다. 빌려준 것이니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고, 남용하거나 잘못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또 주신 것이니 빚진 자로서의 도리도 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아담이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사명을 감당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은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달려든 자의 대표격이 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구약 시대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한 예를 보여주심으로 사명자의 자리에 선 우리를 교훈하셨다. 그가 바로 모세이다. 그는 애굽의 왕자로 자라났다. 그리고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야 하겠다고 결심한다.
바로의 궁전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자랄 때, 자신에게 젖을 먹여준 유모 역할을 한 자신의 친어머니로부터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함을 입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 교육받았을 것이다.
자신이 장성한 왕자가 되었을 때,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때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일을 능히 해 낼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애굽은 가장 강대한 나라였고, 그는 그 나라의 왕자였으니 자신의 능력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모세가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동족을 구원해내었다고 말할지라도 사실은 그 일의 결과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이라 할 것이고, 모세 자신도 내가 그랬다고 할 것이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그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려고 행한 일이었지만 결국은 모세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얼마나 큰 죄를 범하는 일이던가!
천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을 때 그 천사는 사탄이 되고 말았지 않았던가!
(사 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사 14: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사 14: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왕자로서의 모세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했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그렇게 함으로써 죄를 범하는 그 자리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만 계실 수 있었을까?
사명자를 외면하실 하나님은 아니시다. 그를 끔찍이 아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모세를 그냥 버려두고 보실 하나님이 아니시다. 모세를 아껴 사랑하셨으니 그를 광야로 쫓아내셨고, 그곳에서 모세는 신앙적으로 성숙해져갔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는 그런 수준의 신앙인으로 변화되어갔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모세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한 것은 이제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생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그 일을 할 수 없음에 대한 고백이었다.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모두 내려놓은 모세였다. 사명자인 우리도 이처럼 나의 능력으로 하리라는 그 생각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때로는 이 생각으로 사명을 감당하려고하기 때문에 그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 짐이 되어버리고 만다. 사실 주님이 맡기신 그 사명은 우리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출 3: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능력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사명을 감당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그 사명자에게 능력이 되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스스로 자신을 모두 비워 내려놓을 때 그의 힘과 능력이 되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이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면 되었다.
(출 3: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한 것은 사명을 감당하는 그 일에 자신의 능력을 손곱만큼도 드러내지 않을 것에 대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사명을 감당하는 그 일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능력도 내 것이라 여겨 주장할지도 모르는 그것까지 스스로 차단시켜버린 모세였다.
그 능력도 쓰지 않겠다는 모세의 결연한 그 의지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 차단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여기셨고, 그래서 모세에게 화를 내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그 능력을 사용해야 할 때는 사용해야한다.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억누르는 것은 불순종이다.
(출 4:13)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출 4: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출 4: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사명자가 온전히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철저히 비워내고, 그 속에 주님이 내재하시도록 간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과 공명을 이루는 그 작업이다. 하나님에게 공명되면 그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오게 된다.
모세가 하나님과 공명상태가 된 것을 드러낸 표현이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는 그 말씀이다. 과연 모세는 그 백성들로부터 하나님처럼 여김을 받았다.
(출 4: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출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자신을 내려놓고 그 마음을 완전히 비워놓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온전히 임하실 수 있다. 모세는 그것에 대한 대표적인 예였다.
하나님께서 사명자인 우리를 위해 신약시대에는 대표적인 인물로 바울을 보여주셨다.
그는 바리새파에 속한 독실한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교육받았으며,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였다. 그의 말대로 그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대단한 자였다. 이는 그 나름대로 사명자로서의 자각이었을 것이다.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그러나 그때의 그 자각이 있게 한 그의 신앙은 성숙하지 못한 신앙이었다. 서툰 신앙상태에서 자신의 학식과 유대교의 열심히 합쳐져서 생겨난 착각이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보려했을 것이다.
그 열심은 결국 믿음의 백성을 탄압하는 그 일에까지 미치고 말았다. 그래서 다메색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갔다. 이 일은 그 나름대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려한 이 바울을 하나님은 그래도 사랑하셨으니 모세와 같이 그를 그대로 버려두실 수는 없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이 그를 만나주셨다.
(행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행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다메섹 사건으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다. 성경은 그가 기도 중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그 공명을 일으키는 일을 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사명자가 자신의 주파수를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추어 공명이 일어나도록 하는 그 일이 바로 기도하는 그것이다.
(행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행 9: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행 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행 9: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와 함께 하시니 이것이 하나님께 공명됨이다. 이 공명됨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자가 되었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런데 바울이 죽은 자를 살렸으니 그는 분명히 하나님에게 동조된 자였고, 하나님의 능력에 공명된 자였다. 그런 그가 사명자로서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감당하였고, 병자들을 고쳤으며 주님처럼 말씀을 가르치는 그 일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으니, 그가 기록한 성경이 66권 성경 중에서 13권이나 된다.
사명자로서의 바울은 그 마음속에 전혀 세상적인 욕심이 없었다.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권세도 누렸던 그가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겨 버렸으니 그에게 세상적인 욕심이란 있을 수 있었겠는가!
오직 그 속에는 주님이 계셨고, 주님의 그 명령 따라 그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갔다.
사명자라면 이처럼 세상 욕심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 자는 나쁜 꾀를 내어 남을 속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그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을 행하는 자를 간사한 자라하니 사명자라면 이런 간사함이 없어야 한다. 주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 마음에 간사함이 없다고 특별히 지적하여 말씀하신 것은 사명자에게 이런 간사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심이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그 일은 간사한 일이다.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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