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9.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다”
예수께서 자신의 지상 사역이 마무리되는 그 시점에 이르시자 마지막 한 가지 일을 행하셨다. 그 일은 저녁을 먹는 중에 일어나셔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왜 밥을 먹는 도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일까?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요 13: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요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요 13: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오는 손님에게 그 집 하인이 발을 씻겨드리는 풍습이 있었다. 사막 지역이니 신고 다닌 신과 발에 흙먼지가 묻어 불결했을 것이기에 그것을 씻어드리는 것은 극진한 예우가 되었다. 아브라함도 그를 찾아온 손님들에게 그리 대접했다.
(창 18: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창 18: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창 18: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창 18: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손님의 발을 씻기는 그 일은 그 집 하인이 하여야할 일이었다. 그런데 유월절 최후의 만찬에서는 주님이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다. 그리하셨다면 주님이 제자들의 하인이었다는 말인가?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 사건도 역시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사건이었다.
발은 우리 몸의 더러운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대표적인 신체기관이다. 그런데 참으로 더러운 것은 우리 속에 존재하는 바로 그 죄이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회막에 들어갈 때는 그 죄를 상징하는 수족을 씻은 정한 몸으로 나아가야만했다.
(출 30:20)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출 30:21)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우리의 시조 아담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더러워졌다. 그래서 그는 그 더러움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자신의 그 부끄러움을 가려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옷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영원히 가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그 옷이란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으로는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에 대한 상징이 되었다.
죄로 인해 생겨난 그 부끄러움을 가려주시려고 하나님은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아담에게 입혀주셨다. 그 부끄러움이 영영 가려지게 되었다. 이는 죄의 문제에 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우리의 죄라는 것은 하나님을 당사자로 하여 맺은 언약을 파기함으로써 생겨난 것이기에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래서 성부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자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죄에서 구속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주님께서도 이 사실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다. 유월절 만찬사건 이전에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고 하심으로써 자신이 성부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속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이 땅에 오셨음을 분명히 밝히셨다.
(요 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요 12: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우리가 아담으로 인한 그 원죄의 굴레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일이다. 이 믿음의 고백을 구원의 서정에서는 특별히 ‘신앙’이라고 표현한다. 이 신앙은 자신이 죄인됨에 대한 참된 인식과 진실한 고백인 ‘회개’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요 14: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요 14: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또한 우리가 참된 회개를 이루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선택’하심을 입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우리가 구원받을 자로 영원에서 선택되지 않았더라면 성령하나님을 통한 ‘중생함‘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성령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중생함을 이루었기에 재창조를 입은 영혼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성령하나님의 은혜로 재창조된 우리는 능히 자신의 죄인이었음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였고, 그래서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있었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이 나를 죄에서 구속하실 메시야 되심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를 담보로 하여 주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칭의‘의 은혜를 입은 몸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자신의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달라고 요구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이 칭의의 사실에 대해 “이미 목욕한 자”라는 말로써 그 사실을 표현하셨다.
(히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 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의 가장 더러운 죄가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사해졌으니 얼마나 깨끗한 자가 되었는가!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목욕을 한 자”라고 표현하신 것이다.
자신의 발을 씻기려고 오신 주님을 보고 베드로는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라고 말하면서 당황해 했다. 발을 씻기는 일은 하인들이 하는 일이라는 근동 지방의 풍습을 알고 있던 베드로로서는 참으로 황송한 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자신의 발을 주님께 내어준다면 이 일은 주님을 자기의 하인으로 여기는 일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요 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그러나 주님의 의도는 베드로가 생각하는 그 수준 너머에 있었다. 그 첫 번째 의도는 제자들이 훗날 사도로서의 그 사명을 감당하는 그 일에 대한 모범을 보이고자 하심이었다. 그들이 훗날 복음을 전하는 그 사명을 감당할 그때에 만약 주님의 이 발 씻기심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다면 그들은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주님이 하인들이 하는 그 일을 하심은 훗날 제자들로 하여금 섬김을 받는 자가 되는 그 자리에 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자의 자리에 서라는 그 명령이셨다.
이미 이전에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의 자리에 서라고 가르치셨지만 그것을 도통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었다. 말씀으로 가르치셨지만 깨닫지 못한 이 제자들에 대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마 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 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막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10: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이제 곧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자신의 지상 사역을 마무리하셔야 되는데, 자신을 대신해서 사명을 감당해야할 제자들이 이 섬김에 대해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최후의 수단으로 행동으로 이 모범을 보이신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 주께서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하신 그 말씀 속에 숨겨져 있었다.
(요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그리고 드러내어 하신 말씀인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신 말씀으로 그 사실을 확정하셨다.
(요 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요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결국은 제자들 모두는 섬기는 그 자리에 섰고,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했다. 이는 그들에게 성령이 임함으로써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와 같은 결과를 이루어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성도를 섬기는 일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직접 썼다.
(롬 15: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 의도의 두 번째 의미는 바로 ‘칭의’와 ‘견인’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씻기시는 이 일은 더러움을 청산하는 일, 즉 구속하심에 관한 이야기이다.
(요 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는 모두 죄악 중에 머물러 있었다. 주님께서 “죄에 대하여라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하심으로써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모두 죄악 중에 머물러 있었음이라고 밝히셨다.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셨기에 우리는 죄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의로운 자라고 불러주셨으니 이것이 ‘칭의’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죄를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다.
그래서 항상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우리의 그 기도에 성령하나님은 항상 귀를 기우려주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니 이것을 ‘견인’이라고 한다. 이 사실을 드러내어 밝히신 주님의 말씀이 “이미 목욕을 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 발을 누가 씻어주었는가?
베드로가 자기의 발을 자기가 씻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의 발을 씻어주셨으니 이는 우리가 신앙생활 중에 범하는 그 죄를 씻어줄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이신 주님뿐이시라는 것을 주께서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드러내어 밝히신 것이다.
우리를 죄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보호하시는 성령이란 곧 주님의 보내신 그 영이시니 주님만이 우리의 발을 씻기실 수 있음이다.
(요 1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만찬 중에 예수께서 굳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 일을 하신 것은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함이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곧 살고자 하는 일, 즉 영생을 소망하는 그 일에 대한 상징이다. 그런 순간에 주님이 씻기시는 일을 하심은 영생을 위해 절대 필요한 그 죄를 없이 하시는 그 일을 하심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어 영생하는 그 일을 성취하려면 반드시 주님을 만나 주님을 통해 깨끗이 씻음 받는 일, 즉 ‘칭의’의 은혜를 입고 주님이 보내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죄와 분리되는 삶을 살아가는 ‘견인’의 은혜를 입는 삶을 살아야한다.
이 일은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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