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12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첫사랑, 그리고 인식의 출발선에서 만난 하나님”
- 돌아온 탕자와 반겨주신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전해오는 이야기 중에 소월이 살던 동네에 ‘숙이’라는 아이가 있었단다. 그때 중학생이던 소월은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로 가서 공부하고 있었기에 주말에만 집으로 왔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숙이라는 아이가 부모를 따라 뒷산 진달래가 만발한 그 길을 넘어 북간도로 떠난 사실을 나중에사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심정을 담아 쓴 시가 바로 진달래꽃이라 한다. 처음으로 느낀 가슴 속에 품은 사랑의 그 감정, 첫 사랑이었다!
소월의 그 아픈 심정이 그의 시에 고스란히 담겨 이렇게 표현되고 있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서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숙이’가 떠나가는 그 뒷산 길에 진달래꽃을 한아름 따다 뿌려주고 싶은 것이 그의 심정이었다. 한아름이란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정성의 한도에서의 최대한이었다. 온 세상을 다주고 싶어 한 그의 마음의 표현이 ‘아름따다’이었다. 그만큼 그 아이를 마음깊이 사랑하였다는 뜻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을 그런 사람이 떠나갔을 때, 그의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던 것을 “사뿐이 즈려밟고”라는 말로 표현했다. ‘숙이’라는 그 아이가 자신이 뿌려놓은 그 꽃들을 내리눌러 짓이기듯이 밟고 가라는 것은 그 아이의 떠남이 자신의 가슴을 짓이겨놓은 그런 아픔이었다는 그 고백이었다.
(註 : ‘즈려밟다’의 표준어는 ‘지르밟다’이고 “위에서 내리눌려 밟다”란 뜻임.)
첫사랑에서의 실연은 이토록 잔인하다. 그러나 소월 자신이 한 그 첫사랑은 또 너무나도 고귀하고, 아름답기에 그 사실을 “사뿐이”라는 말에 담아두고 있다. ‘즈려밟음’이 “짓이기듯이 위에서 내리눌러 짓밟음”이라는 말인데, 어떻게 그런 행동을 ‘사뿐이’ 할 수 있으랴!
수줍음을 많이 탄 내성적인 소월이었기에 비록 그런 짓밟힘이 있을지라도 그 아이를 그토록 사랑하였다는 절규에 가까운 그 고백을 ‘사뿐이’라는 말 속에 슬며시 밀어 넣었으리라.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까!
난생처음으로 느꼈던 첫사랑을 떠나보낼 때의 그 가슴 아픔이란 그 무엇에 비길 수 있었을까!
그 아픈 마음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내뱉은 말이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였다. 이는 죽을 만큼 눈물이 난다는 그 말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었을 것이다. 첫사랑에서의 실연은 이토록 가슴이 찢어지게 아픈 일이다.
그러나 첫사랑에서의 실연은 또 다른 사랑을 품어줄 수 있는 요람이 된다. 실연을 통해 사랑의 소중함을 깊이 깨달았을 때, 그때 다시 찾아온 그 사랑은 더 귀한 사랑이 될 것이다. 떠나보낸 첫사랑의 경험이 있었기에 다시 찾아온 그 사랑을 귀하게 여기게 되고, 보다 성숙한 자세를 가질 수도 있게 된다.
사랑에 대해 눈을 뜨는 그것을 제 2의 탄생이라 한다. 이때부터는 새로운 인식에 대해 눈을 뜨게 되며, 자신이 누구인지도 깨닫기 시작한다. 특히 선택받은 자들은 이 순간부터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구라타 하쿠조 (倉田百三, 1891~1943)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고, 그가 깨달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그의 명저서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다.
(※ 내가 이 책을 만난 것은 1977년이었고, 이 책은 이후로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제 막 사랑에 대해 눈을 뜬 청년들에게는 꼭 읽어보라고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하나님은 왜 이처럼 아픈 첫사랑을 하게 하셨을까?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과 인식에 대한 감각을 가지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라“고 명하셨다. 많은 주석가들이 고멜은 처음부터 창녀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고멜이 처음부터 창녀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호 1: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호 1:2)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 처음부터 죄인이었던가!?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지음을 입은 지극히 선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의 내적 욕망에 사로잡혀 선악과의 열매를 금한 하나님의 그 명령을 어기고, 그것을 욕심으로 먹음에 따라 죄인이 되었다.
이 같은 일이 이스라엘 족속에게서도 반복되었고, 하나님은 창녀처럼 변해버린 그들을 바로 잡을 요량으로 호세아를 통한 이 일을 행하신 것이었으니, 고멜이 처음부터 창녀였다면 이는 하나님의 그 처사가 처음부터 합당했다고 할 수 없음이 된다.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지만 결국에는 바람을 피우고 말았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지혜롭고 탐스럽게 보여 그것을 먹음으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아담에게서의 그 유혹이 고멜에게도 다가왔던 것이다.
자신의 남편보다는 유혹하는 자가 더 매혹적으로 보였던 것은 고멜에게서의 선악과였을 것이다. 고멜이 외간 남자의 그 유혹을 따라간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결국 그녀를 창녀가 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만들었다.
고멜이 바람을 피웠다는 것은 자신을 그토록 사랑한 호세아를 버리고 떠남이었으니 호세아로서는 실연을 당한 셈이다. 아마 호세아에게는 고멜이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그 끔찍한 첫사랑의 실연을 당한 것이다.
첫사랑이었다면 호세아가 고멜을 진정으로 사랑하였다는 말인데, 과연 호세아는 고멜을 참으로 사랑하였을까?
하나님이 결혼하라 하셨으므로 선지자였기에 자신의 뜻을 버리고 사랑함이 없음에도 오직 하나님의 그 말씀에만 순종하고 따랐음이었을까?
바람이 나서 가정을 버리고 떠난 고멜임에도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이 말씀에 대한 호세아의 반응은 이랬다.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샀노라”고.
(호 3: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 3: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호 3:3)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음부된 고멜을 사랑하라”고 하신 이 말씀 속에는 “지금까지 네가 고멜을 사랑한 줄을 내가 안다. 그러하니 고멜이 바람을 피워 너를 떠났다고 해서 지금 너는 그녀를 미워해서는 안된다. 오직 너는 그녀를 다시 찾아내고, 그리고 데려와서 여전히 사랑해주어라”라는 그 의미가 담겨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갔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분명히 호세아에게 그리 말씀하셨을 것이다.
호세아는 선지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하나님의 그 마음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했기에 하나님의 그 말씀에 대해 호세아가 취한 태도는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라는 모습으로 드러났다. 호세아가 한 이 말은 또한 그가 진정으로 고멜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드러낸 고백이도 했다.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셨다는 것은 이미 호세아의 마음에 여전히 사랑할 마음이 자리하고 있음에 대한 암시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았다면 어찌 내가 사랑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아무 때나 아무에게서나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지 않는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자에게만 생겨나는 것이 그 사랑의 감정이다. 일단 그 마음이 생겨나면 그 다음부터는 내 책임이다. 끝까지 그를 사랑하며, 지켜내는 그 일은 오직 나의 몫이다.
적어도 호세아는 그리한 인물이었다. 하나님이 고멜과 결혼하라 하셨으니 그 순간에 그는 분명히 고멜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 사랑은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게 했으니, 호세아가 고멜을 아끼며 사랑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렇게 사랑한 고멜이 어느 순간 바람이 나서 자신을 버리고 떠나갔을 때 그의 심정은 첫사랑을 떠나보낸 소월의 그 심정과도 같았을 것이다.
(호 1:3)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호 1: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호 1:6)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호 1:7)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호 1:8)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호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왜 하나님은 호세아로 하여금 이처럼 가혹한 시련을 겪게 하셨을까?
호세아를 통한 이 일은 하나님 당신의 심정을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드러내시려 하심이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불러내시고 그 후손인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 삼으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던가!
그 옛날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그 날에 그들의 고된 그 삶을 보고 얼마나 가슴 아파하셨던 하나님이시던가!
얼마나 애가 타셨으면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 내려오셨을까!
그 날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내려오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는 귀하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으로 내려오심이었으니, 이 사건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시려고 죄악이 가득한 이 땅에 오신 주님의 그 강림하심에 대한 예고였다.
(출 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한 낮의 그 뜨거운 사막의 열기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시려고 구름기둥을 앞세우셨고, 사막의 밤의 그 한기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시려고 불기둥으로 감싸 안으셨다.
전쟁을 피해 눈보라가 치는 그 밤에라도 피난을 가야만했던 어떤 어머니가 자신은 얼어 죽어가면서도 그 아기를 품에 안고 자신의 체온으로 살려내었던 그 사랑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의 이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마치 암탉이 그 날개 아래 병아리들을 품음과 같이 그렇게 그들을 품으시는 그 사랑을 하셨다. 목이 마를 때에는 목마르지 않게 하시려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는 그 이적의 사랑을 베푸셨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때에는 만나를 주시는 그 사랑을 베푸셨다.
어린아이가 먹을 것에 대해 투정하듯이 그렇게 고기를 먹고 싶다고 투정하는 그들에게는 메추라기를 주시면서 달래셨던 하나님이셨다. 그리하셨음에도 그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몽땅 외면하고 고멜이 통정한 사내를 따라 떠나갔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버렸다.
그렇게 사랑했던 이스라엘에게 배반의 실연을 당한 하나님의 그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 마음을 알아달라고 호세아로 하여금 고멜과 결혼하라 하신 것이었다. 단 한사람, 호세아만이라도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아주기를 원하시는 그 안타까움이 호세아로 하여금 고멜과의 결혼에 이르게 하였고, 하나님의 그 심정은 호세아의 그 비극적인 결혼 생활을 통해 드러날 수 있었다.
누구라도 그런 호세아 선지자를 보면 불쌍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어쩌면 모두가 하나님은 왜 잔인하게 호세아에게 그리하셨느냐고 힐난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호세아보다 더 심한 심적 고통을 당하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첫사랑을 알게 하시고, 또 내가 누구인가 하는 인식에 비로소 눈을 뜨게 하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 심정을 알고 이해할 수 있게 하려하심이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그 순간, 하나님은 입술을 깨물며 그 아픔을 삭히고 계셨을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이 아픈 가슴을 헤아려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끔찍이 아끼며 사랑하셨음을 성경의 기록 중에 ‘심히’라는 표현 속에 담아두셨다. 천지를 만드시던 그 날에 하나님은 그 만드신 것에 대한 소감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심으로 드러내셨다.
첫날에 빛을 만드신 그 일을 하시고 보시기에 좋으셨다고 소감을 피력하셨다. 빛 그 자체를 만드신 것이 좋으셨겠지만 실상은 그 빛이 우리와 관계된 그 빛이었기에 좋으셨던 것이다. 그 빛을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 창조하신 것이기에 좋으셨던 것이다.
땅 위에 식물과 동물을 만드시고 난 뒤에도 보시기에 좋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들도 모두 우리를 위해 만드셨으므로 좋으셨던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준비하셨다. 그런 후에 당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만드셨고, 그때의 심경을 토로하시기를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다.
(창 1: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심은 태어날 아기를 위해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는 어머니의 그 모습에 대한 원형이시다. 어머니는 태어날 그 아기를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심에 대한 최상의 표현이셨고, 그때 그 기쁨이 어떠함을 담은 표현이 “심히 좋았더라”였다.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을 최고로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바로 나를 닮음 때문이 아닌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그렇게도 질긴 사랑이었다. 이 악착같은 사랑을 우리가 도무지 깨닫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그 답답한 가슴은 타들어 갔을 것이다.
그래서 목숨보다 더 귀히 여겨 그렇게 사랑한 그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의 그 아픔을 느끼도록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그 심정을 깨달아 알 수 있게 하셨다. 그것이 바로 ‘첫사랑’이었다. 이 첫사랑의 아픔과 함께 깨어난 것이 또한 우리의 인식이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서의 이 지각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책임을 깊이 통감하게 하는 그 일을 시작케 한다. 이는 곧 우리의 죄책에 대한 그 인식에로의 나아감이다.
내가 진실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음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죄인이었던 나를 이토록 아껴 사랑하신 하나님이셨다는 것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더할 수 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자리에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이해는 종국에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그 삶의 자리에까지로 나를 인도하게 한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감당함에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그 사랑을 깊이 깨달음이 없이는 불가하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깊이 사랑하신 그 사랑하심을 깊이 깨달아 이해는가?
그런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이 느끼실 그 아픔에 대해서도 진정으로 이해하는가?
그리고 그런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그 기쁨에 대해서는 또 얼마나 공감하여 이해하는가?
탕자의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그 심정에 대해 정확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를 상징하고 있는 그 탕자 둘째 아들이 돌아오던 날, 누가 먼저 알아보았는가?
(눅 15: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눅 15: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눅 15: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눅 15: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훙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눅 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 15: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자신의 잘못을 깊이 깨달은 탕자였지만 그 깨달음에서 건져낸 아버지를 향한 그 그리움은 끝내는 사랑하는 아들이 떠나버림으로 인해 생겨난 그 아픔을 이겨내면서 기다려야만했던 아버지의 그 삭아 문드러진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떠나버린 그 아들을 애끓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눈물 고인 아버지의 그 눈이 돌아오고 있는 탕자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야 말았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들이 돌아오기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삭아 문드러져버린 자신을 돌보는 일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돌아온 그 자식의 초라한 몰골에만 마음 아파하며 달려가 안아주신 아버지,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는 돌아온 그 탕자 아들의 손에 자신이 끼고 있던 그 가락지를 끼워주었다. 이는 자신의 상속자가 됨에 대한 증거였다. 참 아들이라는 말이다. 배반하고 떠나버린 우리를 이렇게 참 아들로 인정하여 천국의 상속자로서 기쁘게 받아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주님은 이 탕자의 비유를 통해 분명히 하셨다.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느꼈던 그 감격과 기쁨은 또 얼마나 컸던가!
그러나 그보다는 하나님께로 나아간 우리를 반기시는 하나님의 그 기쁨이 더 크시다는 사실을 이 탕자의 비유로 밝히셨다.
주님은 돌아온 이 탕자에 대해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는 말씀으로 대신 표현하셨다. 다시 얻었다는 것은 아버지가 이제 다시 이 아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며, 함께 있던 자들이 즐거워했다는 것은 아버지가 진실로 먼저 즐거워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온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즐거워하신다는 것이 주님의 이 탕자 비유로 분명히 드러났다.
주님께서는 또 다른 비유인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를 통해 떠나버린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 일이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만드는 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셨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그 일이 이토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일이 되었다.
(마 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마 18: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그러하니 우리는 돌아온 우리를 반기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반드시 기억해야한다. 하나님의 크신 이 사랑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그 위대하신 사랑이 주님의 목숨까지도 버리게 만드셨다고.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진실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조건 없는 그 사랑에 우리는 감사할 줄 알아야한다. 그리고 마땅히 그 사랑에 보답할 길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며, 그 답을 찾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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