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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혜, 특별은혜

by 영동장로교회 2020. 2. 23.

2020. 2. 23.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보통은혜와 특별은혜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 때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그에게 4명의 아내를 통해 12명의 아들을 허락해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30: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30:2)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30:3)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30:4)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30:5)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30:6)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30:7)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30:8)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30:9)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30:10)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30:11)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30:12)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30:13) 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30:14) 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30:15)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30:16)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30:17)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30:18) 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30:19)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30:20)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30:21)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30: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30:2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30: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도대체 이 일이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분명 성경은 어떤 사건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기록한 그런 책은 아니다. 단순히 야곱이 12명의 아들을 두었더라고 했다면 그것은 성경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즉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를 자의 자리에 선 자였다. 그런 면에서 그는 구원받은 자의 대표격에 해당된다. 이 말은 곧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과연 성경은 아브라함에 대해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그런 아브라함으로부터 믿음의 계보를 이어간 야곱에게서 드디어 열두 명의 아들들이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와 그의 시대에는 아들이 둘뿐이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구별되었다. 이스마엘과 이삭, 그리고 에서와 야곱.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5: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아들과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못한 아들로 명확하게 구별하심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고 사람에게 그 권이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 이 두 세대를 통해 하나님은 분명히 택할 자를 택하시고 간과하실 자를 간과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두 세대에 걸쳐 그렇게 하신 것은 일종의 강조법이었다. 한세대만 그렇게 했다면 혹 우리들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도 있고 아니하실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와 같은 생각을 전혀 할 수 없게끔 두 번에 걸쳐 행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간과하심이 너무나도 분명한 하나님의 작정하심이란 것을 명심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런고로 이 세상에는 분명히 두 부류의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와 하나님이 간과하셔서 그의 죄악한 상태대로 그냥 버려두실 자로 구분된 두 부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들에게서는 이런 구분이란 무의미하다. 그들은 처음부터 이런 구분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란 그렇게 중요한 존재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냥 하나님 없이 살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느끼며 산다. 소위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25: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25: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25: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25: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25: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서는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삶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야곱은 그랬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도 사모한 나머지 그 형의 자리를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장자를 통해서 이어져가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그는 목숨 그 이상으로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25:31)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이 야곱을 통해 하나님은 이제 12명의 아들을 주셨다. 한 어미의 소생이 아니라 4명의 아내를 통해 얻어진 자식들이었다. 4명의 아내에게서 아들을 얻었다고 하신 것이었을까? 성경적 의미에서 4는 주로 세상에 관계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데,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강은 4지류로 나뉘었음에서 보듯이 이는 세상을 아우르는 것을 함의하기도 한다. 그래서 야곱이 4명의 아내에게서 얻은 12명의 아들들이란 온 세상에 있는 모든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자들을 상징한다 할 수 있다.

(2: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2: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2:12)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2: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2: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은 믿음의 백성들이다. 믿음의 백성들을 구하시려고 당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저들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요구하신 그 하나님이 아니신가!

 

애초부터 분명하게 세상에 속한 자들, 그들에 대해서는 성경은 깊이, 그리고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애초에 무지막지하게 대우하시느냐하면 그렇지는 않다. 너무나도 분명한, 하나님이 유기하신 자의 대표격인 가인의 경우라도 하나님은 그를 그 땅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면하게 지켜 주셨다. 또한 택하심을 입지 못한 이스마엘의 후손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셔서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는 복을 주셨다. 이것을 하나님의 보통은혜라고 한다. 악인들에게 조차도 고르게 비를 내리시고 태양의 빛을 고르게 허락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7: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7: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17:20)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 택하심을 입은 자들을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이 사랑하심은 그 택하심을 입은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를 부르신다는 것이다. 그 부르심에 대해 그가 응답하지 않으면 때로는 매를 드시기도 한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이 부성애적인 사랑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54:1)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54:2)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54:3)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54:4)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젊었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54:5)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54:6)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어릴 때에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자에게 함과 같이 하실 것임이라 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

(54:7)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54: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어떻게 경성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보여주신 예가 바로 야곱의 열두 아들들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신 역사적 사건이다. 열두 명의 아들이란 외형상 믿음 있다고 하는 자들의 표상이다. 통상 성경에서는 12를 믿음의 숫자로 표현한다. 그들은 외형상으로 믿음의 열두지파를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해 이 땅에서 스스로 믿는 자라고 말하는 모든 무리들을 대표하는 그런 것이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비록 택하심에서 제외된 자들이 있음에도 그 제외된 자들조차도 야곱의 열두 아들에 들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보통은혜였다. 그들에게도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리할지라도 그들은 구원의 반열에 들 수가 없었다. 구원의 반열에 들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노력으로는 불가한 일이었다. 아담이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고 노력했으나 그것은 허사였다. 훗날 하나님이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을 때 비로소 그들의 수치가 가려졌다. 돌짝밭에 떨어진 씨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끝내 열매 맺는데 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13: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야곱의 열두 아들처럼 이 땅의 많은 자들이 현재 이 땅에서 보이는 교회에 단지 출석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해 말하기를 나는 예수를 믿고 따라서 천국의 백성으로 예비된 자로다고 말한다. 야곱의 그 열두 아들은 야곱의 아들인고로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들이 그 땅을 사는 날 동안에 그러했다. 양피를 벰으로써 그것을 증명해보였다. 그들의 누이가 수치를 당했을 때 그 보복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그런 생각들이 아주 적나라하게 표출되었다. 하나님의 생각도 그러했을까?

(34:1)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34:2)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34:3)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34:4)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여 이르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34:5)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34:6)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34:7)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34:8) 하몰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연하여 하니 원하건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34:9)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고

(34:10) 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주하되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 하고

(34:11) 세겜도 디나의 아버지와 그의 남자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다 주리니

(34:12)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주리라

(34:13)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

(34:14)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

(34:15)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34:16)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34:17) 너희가 만일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

 

하나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다. 그중에는 참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그런 자들도 스스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우리가 입었노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못하였다는 것을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로써 구원의 가장 큰 복을 누릴 그런 자리에 있는 자였다. 외형적으로는 그랬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하나님이 극히 싫어하는 바를 행했다. 그의 서모와 간통함으로써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그런 자리에 섰다. 이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입지 못한 그런 자의 모습이었다.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하나님의 선택을 입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죄악된 상태 그대로에 머물렀다는 것인데, 인간의 죄악된 그 상태에서는 능히 그 서모를 간통하고도 당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죽이고 나서 하나님께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냐고 따지고 들었던 그 뻔뻔함과 같은 것이다.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그런 자들이기에 자신들을 걱정하고 그 먼 곳까지 달려와서 안부를 확인하고자 했던 그 동생 요셉을 죽이자고 모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한 자들이었다. 이런 모습을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케 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대한 경계의 말씀이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들과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 같이 불행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선줄로 생각하지 말고 넘어질까 염려하라 하신 그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고전 10: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고전 10: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전 10: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야곱의 열두 아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교훈하시는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범한 그 잘못을 하나님은 기꺼이 용서하시려고 그 교훈을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러실 의향이 없으셨다면 굳이 그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 하실 필요가 있으셨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잘못에서 돌이켜 노력한다면 하나님의 그 선택하심은 우리의 노력에 의한 공로로 얻어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인데 어떻게 내가 세운 공로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되어지는가?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 노력하라 하셨다. 그 주님의 말씀도 내가 노력해서 구원을 얻으라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모든 길을 주님께서 준비하셨다. 그것에 대해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감당해야한다. 적어도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걸어가는 그 일조차 주님이 하셔야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의 인격을 무시하는 처사가 될 것이며, 더불어 우리는 죽은 자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결단코 우리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더더군다나 우리를 살리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시는 것과 같은 일을 행하실리는 만무하다.

 

걸어가지 못하는 존재란 죽은 존재일 것이다. 앉은뱅이이니 엎고 가시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한다면 적어도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는 하나님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들로 다 예비케 하신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를 아무 흠도 없게 그렇게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천국은 결코 불구자 같은 모양으로 우리를 영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한다.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온전한 자로 인도하신다. 여기서의 걸음이란 육적인 신체적인 걸음이 아니란 것을 능히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유다는 그의 동생 요셉이 다른 형제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된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지혜를 발휘하여 그 동생을 살려낸다. 이는 그 동생을 깊이 사랑하였으므로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런 그의 사랑은 오실 주님의 그 사랑, 죽음에 처해진 우리를 구하여 살려내신 그 사랑을 예표한다. 그래서 그의 후손, 그의 계보를 따라 주님이 오셨다.

(37: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37: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37: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37: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37: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1: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유다는 분명히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아들이었다. 그가 그런 사랑이 충만한 성품의 소유자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함을 입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의 그 성품, 지극히 선하여 하나님을 닮은 그 성품이 회복되어졌음을 의미한다. 다른 형제들은 같은 아비의 피를 물려받아 태어났음에도 사악한 성품의 소유자들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제외되어있었기에 죄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유다는 그런 성품을 타고 났다고. 보통은 말하기를 그렇게 좋은 성품은 타고난 것이라 한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이 거듭남을 입어 그 원래의 성품, 하나님이 창조하신 때의 그 성품이 회복되어진 것에 분명하다.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 이야기는 택하심을 입은 우리로 하여금 택하심을 입은 야곱의 그 아들처럼 그런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며 살라는 주님의 가르치심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남을 입은, 즉 중생한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야할 책임과 의무 하에 놓여 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을 성화과정이라고 한다. 바로 택하심을 입어 천국 백성 될 우리가 천국 백성 되어지는 그 연습을 하는 그것을 소위 성화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그런 훈련과정에 임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혜 베푸심을, 악인에게도 베푸신 그 은혜, ‘보통은혜에 대비해서 특별은혜라고 칭한다.

 

이제는 하나님의 그 특별은혜베푸심에 참여한 자들로서,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 돌리는 귀한 삶을 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항상 충만할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