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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이야기

by 영동장로교회 2019. 8. 4.



https://drive.google.com/file/d/1qh83nhIFxLgZ2OYtJ5MzIz3LRyXNHU-m/view?usp=sharing

2019. 8. 4.

요나 이야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심은 그를 무조건 사랑하심이다. 그러나 그 택함을 입은 자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모든 자들에게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는 하나님의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기도 하다.

(18:35)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18:42)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18: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지 않았다. 전도하지 않은 것이다. 요나서는 이런 이스라엘을 경성케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드러내신 것이다. 택함을 입은 우리에게 그 일을 하라고 요나를 통해 알게 하신 것이다.

 

또한 요나서의 이야기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것이 이 요나의 이야기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야할 선지자였으나 실상은 우리와 같은 세상적인 기준에 맞추어 사는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민족을 괴롭히는 니느웨 사람들을 미워하였고 그래서 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라는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선지자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 뜻을 따르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야만했다.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이 옳고 하나님의 그 명령이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주장한 것이다. 그의 신앙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1:5)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면서 끝까지 그가 스스로 깨닫도록 도우셨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더 큰 자유의지에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이 요나를 통해 보여주셨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에게는 그 감당할 사명에 대해서 반드시 이행할 것을 요구하시며 이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더 큰 자유의지가 행사되어진다.

(3: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3: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우리는 하나님이 이 같이 애를 쓰시며 힘 드시게 해야만 할까? 미리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이다.

(13:36, 개역)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15: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이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지혜자의 자리에 서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하신 가르침이 되고 있다. 요나의 그 고집은 자신의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그 사명을 지닌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니 그의 신앙은 죽어있었다. 하나님이 그의 행위를 통해 아무런 기쁨을 얻지 못하시면 그의 신앙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늘 기쁘시게 하는 일을 선택함이다.

 

초보 신앙인과도 같았던 그가 하나님의 역사로 점차 성숙한 신앙인의 자리로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고난을 우리를 깨닫게 하려하시는 또 다른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한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내가 받는 고난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의 회개하며 깨닫는 그 모습이다.

(2: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2)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2:5)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2: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2: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2:8)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이 고난은 나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절절한 심정의 표현이다. 그 고난 받는 모습을 하나님은 기뻐하실까? 나와 함께, 그 고난 받는 동안 마음 아파하시며 그 고난을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니느웨가 회개하는 그 역사는 하나님이 직접 하실 수도 있으나 요나를 통해 그 역사를 이루셨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니느웨가 회개하는 것과 같은 위대한 역사,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며 또 그 일을 우리로 하여금 이루게 하신다.

(15: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15: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5: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그 모든 공을 돌리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내가 복음 전파의 그 공로를 얻을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신 것이다. 이 공로는 우리에게 천국에서의 상급으로 주어질 것이다. 주님은 그 상급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이 같은 역사를 이루시려는 것이다. 어찌하든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7: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요나에게 일어난 그와 같은 믿음의 결과는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띄는 것도 전혀 나의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결과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주님을 택하고 따랐던 베드로를 하나님은 참으로 오랫동안 인내하시면서 그를 인격적으로 가르치셨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스스로 모범을 보여주시면서 베드로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도록 도우신 주님이셨다. 그리고 끝내는 베드로가 주님 앞에 완전히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스스로 택하여 걸어갔다.

 

그 길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었지만 베드로 자신에게는 목숨을 내어놓는 순교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베드로 그 자신의 온전한 사랑의 실천의 길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었다. 신앙의 초보였던 그가 주님을 만나 우리에게 완전한 모범이 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향해 걸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가 얻어진 것은 온전히 주님이 베푸신 은혜였다. 그리고 그는 결국에 주님의 가장 사랑하는 자의 자리에 서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21: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닫고 그것을 온전히 실행하는 삶을 사는 자인 것이다. 베드로가 그랬듯이 사도바울이 그러했고 그 옛날 모세도 그런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