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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을 취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의 순종

영동장로교회 2021. 5. 16. 10:01

https://drive.google.com/file/d/13HVSeHSqqj6y6D9ZuQRCvKUHagk5zNAG/view?usp=sharing2021. 5. 16. 영동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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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을 취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의 순종”

 

 

예수는 전적으로 신이었을 뿐일까?

 

만약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이실 뿐이었다면 그에게 배고픔과 고뇌함과 고통스러움이란 것이 있었을까?

 

성경은 확실하게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이라면 어떻게 죽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는 분명히 십자가 위에서 죽었고 그리고 예언된 대로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었다. 따라서 그는 분명히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눅 23:52)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눅 23: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눅 23:54)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그래서 그도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의 행위와 환전하는 자의 행위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분명히 의로운 분노였을 것이다.

(마 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 21: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사랑했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무덤 앞에서 그의 누이와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

(요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요 11: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는 길에서도 그 성을 보고 눈물을 흘리신 것은 분명히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눅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길에서 그는 그 무거운 십자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다. 그래서 로마병사는 그를 대신해서 그 십자가를 지고 갈 다른 이를 지목해야만했다. 분명히 그도 우리와 같은 연약한 육신을 지닌 인간이었다.

(눅 23: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 예수였기에 그도 힘든 사역을 감당한 후에는 극심한 피로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도 휴식이 필요한 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눅 21:37)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십자가에서의 그 모진 고통을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육신이 당할 그 끔직한 고통을 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도 우리처럼 하나님께 그 고통스러운 형벌을 면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눅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눅 22:40)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눅 22: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눅 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 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눅 22: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눅 22: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그러면 예수 그는 단지 우리와 같은 사람일 뿐이었을까?

 

예수, 그는 분명히 우리와 같은 육신을 지닌 존재이지만 그는 죄인된 육신을 지닌 우리와는 다르게 죄 없는 육신을 가진 자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와는 다르게 죄 없는 육신을 가진 존재가 되기 위해서 특별한 탄생, 즉 동정녀 탄생이라는 특별한 탄생을 취하게 된다.

(눅 1: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눅 1: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눅 1:28)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눅 1: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눅 1: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눅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동정녀 탄생을 통한 죄없는 육신을 입어야 하는 것은 그가 죄인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희생의 제물이 되기 위함이다. 우리가 죄인된 것은 우리의 시조인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 즉 행위언약을 위반함으로써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 죄는 아담이 전 인류를 대표한 지위에서 지은 죄이기에 우리 모두는 결과적으로는 그 죄에 처음부터 동참한 자들이 되었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난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죄인의 신분에 놓여진 것을 하나님이 그대로 버려두신다면 그는 하나님이 되실 수 없으시다.

 

그는 사랑의 원천이 되시는 속성을 지니고 계시기에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우리 죄에서 건져내실 수밖에 없으시다.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그 죄에서 건져내시려고 우리를 대신해서 대속물로 삼으실 자를 정하셨다. 죄인들의 죄를 대신 져줄 수 있는 존재는 흠 없는 어린 양과 같이 반드시 죄 없는 존재여야만 한다. 하나님은 이미 그 방법을 이스라엘에게 알려주셨다. 그것이 제사에 관한 규례였다.

(출 12: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출 12:3)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출 12: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출 12:7)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출 12: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출 12:9)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출 12:10)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출 12: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출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 12: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출 12:21)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출 12:22)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출 12: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출 12:24)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출 12:26)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출 12: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우리 사람들 중에서는 흠 없는 어린 양과 같이 제물이 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죄인의 신분이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죄가 없는 육신을 입은 자를 이 땅에 보내셔야만 했다.

 

그것은 사람과 같이 육신은 가지되 남자의 후손이 아닌 방식, 즉 동정녀 탄생의 방식으로 육신을 입은 자여야만 한다. 그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마리아에게 그 사실을 알리셨다.

(눅 1: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눅 1: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그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죄인의 대속물이 되어야하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고 의롭다고 선언해주실 수 있는 자여야만 한다. 죄인을 의롭다고 하는 일, 즉 칭의하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밖에 아니 계신다.

 

그런고로 그는 하나님이셔야 한다. 성부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신다. 그리고 그 계획하심은 오직 성자 하나님에 의해서만 실현되어진다. 그래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 살리려고 오시는 그는 성자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2에서의 “그”가 바로 예수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이신 여호와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신데 특별히 인성을 취하신 자이시다. 그래서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으로 사람이신 것이다.

 

그가 성자 하나님이시기에 그는 사역하심에서는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셔야만했다. 그래서 그는 성부 하나님께 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이셨다.

(눅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눅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눅 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처음 사람 아담도 육신을 지닌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선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육신을 가지셨기에 육신을 가진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도 아담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연단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육신이 요구하고 탐하는 그 욕망에서 그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처음 아담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그 신앙적 연단을 받는 자리에서 그가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그 행위언약을 깨어버림으로써 불순종의 죄를 범했다. 반면에 예수는 결과적으로 그 아담이 이루지 못한 그 언약을 이룸으로써 그는 하나님이 명하신 그 율법을 완성했다. 아담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지만 예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래서 그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자격을 얻게 되었고, 따라서 우리는 구원받는 자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가 하나님이었기에 그 율법을 완성한 것인가?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으로 이룬 이 율법의 완성은 그의 신성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의 인성이 감당한 일이다. 다시 말해 그가 인간으로써 그 율법의 완성을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처음부터 그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쉽게 그 일을 완성한 것일까?

 

그러했다면 그는 우리에게 희망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그의 인성으로 율법을 이루는 이 일을 완성하기까지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가 따랐다. 그도 엄청난 자기희생을 통해 이 사역을 감당했기에 그가 우리에게 희망이 되는 것이다. 그가 자기희생을 통한 그 사역을 감당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용기를 내어 자기를 따라하는 그 일을 해보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그런 모범이었다고 할 것이다.

 

통상적으로 우리 육신이 요구하는 그 욕구를 조절하는 단계는 3단계로 구분한다.

 

그 첫 단계는 ‘자기 관찰 단계’이다. 이는 자신의 내면적 상태나 과정을 인식하는 단계를 말한다.

 

예수도 육신의 욕구가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이 첫 단계에 해당하는 자신의 내면적 상태나 과정을 인식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 부분을 지지하는 성경적 근거는 누가복음 2장에서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피면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라는 표현에서 그는 자신의 내면적 상태나 과정을 잘 인식해나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는 것이다. 바로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는 그것이었다.

(눅 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두 번째 단계는 ‘자기 평가 단계’이다. 자기 관찰을 통해 그것에 근거한 자기 자신의 상태를 판단하는 일이다. 즉 자기 평가이다.

 

예수는 점차 자라가면서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분명한 인식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월절 예루살렘에서의 사건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열두 살 될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가 선생들 중에 앉아 그 선생들에게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한 일이다. 즉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인식이 점차 뚜렷해져가고 있었음일 것이다. 자신이 성부 하나님의 명하심을 감당하려고 이 땅에 성육신 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하신 그 말씀에서 드러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눅 2:41)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눅 2:42)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눅 2: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눅 2: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눅 2: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눅 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눅 2: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눅 2: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눅 2: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눅 2:50)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눅 2: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눅 2: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제 세 번째 단계로서 ‘자기반응이 이루어지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평가결과에 따른 동기화 및 그에 대한 행동이 이루어진다.

 

예수는 자기 평가의 결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죄인을 살리려고 온 메시아임을 인식하고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그 자리에 선다. 자신이 메시아임에 대한 인식은 자기 스스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만약 그가 성령의 역사를 입지 않았다면 자기도취에 의한 망상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흔히 거짓 메시아는 이런 결과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히 성령 하나님의 도우시는 역사를 통해 이 일을 이루셨다.

(눅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눅 3: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그는 그의 육신이 요구하는 그 욕구를 철저히 제어했다. 만약 그가 이 욕구 조절의 삼 단계 과정과 같은 것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그도 아담과 같이 율법을 지켜 완성하는 그 일에서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는 우리의 메시아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육신의 욕구를 철저히 제어한 것은 바로 광야 40일간의 금식 기도에서 엿볼 수 있다. 그 일은 자신의 육신적 욕구를 철저히 제어함을 통한 성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을 이루는 것이었다. 만약 인간으로서의 욕구를 철저히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였더라면 그의 그 사역은 실패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광야에서의 그 40일간의 금식을 통한 자신의 욕구를 제어하는 그 시험을 이겨내었다. 그는 그 시험에서 승리함으로써 육신의 정욕을 온전히 제어하는 참된 인성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끝내는 죄 없으신 육신으로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으로써 그는 우리의 메시아가 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