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향해 가는 나그네
2021. 2. 21.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본향을 향해 가는 나그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눈으로 보는 그것이 참된 실상일까?
뜨거운 사막에서 나타나는 그 신기루를 실상이라 하고 그것을 쫓아가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참으로 불쌍한 존재라 여길 것은 그 보이는 것이 실상이 아니요 허상이기 때문이다. 추구할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 허상이다.
사람들이 이 땅에서 소중하다 여기는 부와 권세와 명예라는 것이 바로 그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트리나 파울루스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 줄무늬 애벌레 이야기가 나온다. 그 애벌레는 단순히 나뭇잎을 갉아 먹는 일보다 더 나은 삶의 목적을 찾아 길을 나선다. 길을 나선 그 애벌레가 광야에서 한 기둥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기둥에는 많은 애벌레들이 목숨을 걸고 서로 짓밟으며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그 일에 그도 동참하지만 그곳에서 노랑 애벌레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끝없는 경쟁,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는 그 매정함에 염증을 느껴 두 애벌레는 그 기둥을 탈출한다.
그러나 삶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던 줄무늬 애벌레는 그 궁금증 때문에 다시 그 기둥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홀로 남은 노랑 애벌레는 나비가 된다. 기둥에 다시 다가간 줄무늬 애벌레가 그 기둥의 꼭대기에 올랐을 때 그는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그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과 그 사실을 알고도 모두 쉬쉬하며 숨기고 있었다는 것과 자신이 올라왔던 그 기둥과 유사한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 기둥은 신기루였던 것이다.
만약에 그 애벌레 기둥의 꼭대기가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 꼭대기에 오르려고 그렇게 목숨을 걸었을까?
삶이란 과연 유한한 것인가?
사람이 태어나고 그리고 성장하고 때가 되면 죽음으로 끝나는 그런 것이라고만 한다면 삶은 유한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하다면 살아가는 그 무대만이 진실로 가치 있는 그 무엇이 될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그 삶에서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이 부와 권세와 명예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오직 현세만이 의미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러했으므로 그들은 오직 이 세상에만 집착했다. 그래서 그들은 유력한 제사장 가문과 세속 귀족 대표자들로서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고 세상의 부를 축적하는 일에 몰두했다. 우리도 사두개인들과 같이 그렇게 생각하는가?
(마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아담과 행위언약을 맺으셨다. 성경에 표현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이것이 하나님이 아담과 맺으신 행위언약이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의 그 열매를 먹음으로써 하나님과의 맺은 이 언약을 파기했다.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으셔야만 한다. 그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것이기에 그 일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음이었고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집행하셔야만 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 사람 아담은 자신이 행한 그 일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음을 스스로 고백했다. 죄인이 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그 부끄러움을 스스로 가려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은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사실을 성경은 그가 나뭇잎으로 옷을 지어 자신의 수치를 가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나뭇잎 옷이란 결국 말라비틀어져 부스러지는 것이니 그 부끄러움을 해결할 수 없는 것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공의를 집행하시되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살 수 있는 길을 준비하셨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비록 죄는 지었을지라도 그 사람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신 것을 드러내신 일이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영원히 가려서 그 부끄러운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아담의 노력은 실패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그 가죽 옷을 입은 아담은 부끄러운 그 죄가 가리워짐으로써 하나님 앞에 죄 없는 자, 즉 의로운 자의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죄 없는 의로운 자가 되었으니 그는 다시 영원히 살 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인 우리도 그와 같이 영원히 살 자가 된 것이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어쩌면 이 땅의 삶은 우리가 살아야할 그 삶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태도가 그 사두개인들과는 결코 같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의 백성들을 그 땅에서의 나그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믿음의 백성들을 예표하는 그 옛날의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의 나그네”라고 표현하고 있고, 그 옛날 초대교회의 믿음의 백성들 또한 그 땅의 나그네라고 하고 있다.
(행 13: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벧전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요삼 1: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나그네 된 자들은 그가 거하는 그 땅에 대해서 욕심을 낼 수 있을까? 그 욕심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 그가 많은 돈을 모은다고 할지라도 그 돈으로 그 땅에서 자기의 소유로 삼을 것이 있지 않다. 그 땅의 거주자가 아닌 나그네는 그곳에서 땅의 소유자가 될 수 없고 그 땅에서 권력자의 자리에 설 수도 없다. 그런고로 그 땅에 대해 욕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 왜 그런 욕심을 가지게 될까?
그런 욕심은 허상을 보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았기에 그 신기루를 향해 쫓아가게 된다. 이러한 일은 통상적으로 ‘관습’이라는 틀 때문에 생겨난다. 어릴 때부터 의식 없이 길들여지는 것에 의해 생겨난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그 수많은 애벌레들이 자기보다 먼저 존재했던 애벌레들의 그 행동을 그대로 의식없이 답습해서 그 애벌레 기둥을 타고 올라가듯이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살 때 그들은 애굽 사람들인양 그렇게 착각하고 살았다. 그 선조 요셉이 그 땅에 들어왔을 때 그는 분명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그 후손된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400년을 사는 동안 스스로 애굽인인 것처럼 착각에 빠진 것이다. 그랬기에 그 땅의 것을 욕심내었고 결국에는 모세의 인도로 그 나그네 된 자리에서 탈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애굽에서의 삶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돌아갈 마음을 품었다. 나그네임을 깨닫지 못한 자들의 욕심이었다.
(출 16:3)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믿음의 백성들도 그 이스라엘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땅의 재물에 대해 욕심을 부리고 권력을 탐하며 명예를 얻으려고 목숨을 걸기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영원한 고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히 11: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히 11: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스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이 믿음은 본향에 대한 믿음이다. 누군가 이 말씀에 대해 언급하기를 ‘바라는 것들’이란 ‘부귀와 권세’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을 본적이 있다. 분명히 말씀을 바르게 전하려는 의도로 쓴 글 중에 언급이 된 것인데, 잘못 이해하고 쓴 글이라 본다.
본향을 사모하는 자가 이 땅에서의 욕심에 해당하는 부귀와 권세를 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라는 그것은 참된 복에 해당하는 ‘주님과 함께할 그 본향에서의 삶’, 바로 그 복이 주어질 것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그 바라는 것은 신기루와 같이 허망한 허상이 아니라 참된 것, 즉 실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약속이니 허상일 수 없고, 반드시 이루어질 실상이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이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추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이 땅에서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그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사도바울 역시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달았으니 깨닫기 전에 그가 추구했던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그리고 그는 이 땅에 사는 날까지 가장 귀한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갔다. 본향을 사모하는 자였다. 그래서 그는 진실로 지혜 있는 자였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아브라함 역시 그런 삶을 살았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유력한 자로서 살았다. 그 땅에서 부와 권세와 명예를 가진 족장이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땅을 떠났다.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나그네로서의 길을 떠난 것이다. 그가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그 당시에 그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정신 나간 노인네라고 평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는 주어질 그 본향,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그곳에서의 삶을 바라본 것이다. 그래서 그 땅의 모든 것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 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그가 길을 떠났을 때에는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에 대한 소망을 바라고 나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은 그 아들에 대한 욕심조차도 버리게 된다. 본향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에 도달했을 때에 그는 그 아들에 대한 욕심조차도 내려놓았다. 하나님 앞에 그 아들을 제물로 드린 것은 그 아들에 대한 욕심을 버린 순간이었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 그에게 있어서의 아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이전까지는 이 땅에 매여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한 존재로서의 아들이었으나 그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리는 순간에는 더 이상 자신의 욕심을 이루는 수단으로서의 아들이 아니라 본향을 사모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수단으로서의 아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은 가장 복된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이 땅의 복을 구하는 자에서 본향의 복을 구하는 믿음으로써 참으로 위대한 믿음의 조상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창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창 22: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창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