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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영동장로교회 2021. 1. 24. 11:50

2021. 1. 24.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가장 큰 다름이 무엇일까?

 

우리와 하나님을 비교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고자함이다.

 

문득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지체 장애인인 남편과 지극히 정상적인 신체를 지닌 아내가 서로를 위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남편의 키는 7살 정도의 아이의 키였다. 난쟁이였고 왜소증이니 얼굴도 제대로 발달하지 못해 코와 입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진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떠돌이 악단에서 난쟁이로서의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선택한 사람이 그 아내였다. 그 여인은 외모가 준수했다.

 

그들이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여인의 지인들은 모두 말렸다고 한다. 그 부모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은 네가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10년이 훨씬 지난 그 순간에도 그들은 여전히 신혼 때의 그 마음에서 한 치의 변함도 없었다. 걸어갈 때도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갔고, 밥을 먹을 때도 서로를 위해 떠먹여주는 그들이 이렇게 말했다.

“신혼 기간이 지나면 서로에 대해 권태를 느껴 무덤덤하게 된다고 하는데 우리는 도무지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요.”

 

이들의 이 사랑이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될까? 그 남편의 그 정상인인 부인에 대한 사랑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그 아내의 그 남편에 대한 사랑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스라엘을 그 땅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모세가 요단 저편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선포한 말씀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그가 언급한 말씀 중에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은 불쌍한 그 나그네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랑이 드러나 그에게 정말로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 즉 식물과 의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 나그네가 누구인가?

 

애굽에서 나와 40년간 광야를 떠도는 그 족속들, 바로 그 이스라엘이다. 그들이 먹을 것 없는 광야를 헤맬 때 그들에게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을 주셨는데, 바로 만나였다. 그것으로 그들의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광야의 그 추운 밤을 넘길 수 있도록 하나님은 그들에게 의복을 준비해 주셨다. 그 때의 이스라엘이 미스코리아와 같은 미인들이라서 하나님이 그리하셨을까? 적어도 우리가 아는 바로는 그 때의 이스라엘은 흠모할만한 아무런 아름다움도 찾아볼 수 없었던 족속들이었다. 노예상태였던 그들을 구해준 그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방하기 만한 자들이었다. 먹을 것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 때문에 주려죽게 되었다고 불평했고, 물을 구하지 못했을 때에는 목말라 죽게 한다고 원망하기만 했던 족속들이었다.

 

그런 그들이기에 그들의 어느 한 구석에서인들 아름다움이라고 찾아볼 수 있었을까!

그들의 그 모습은 왜소증의 그 사내의 얼굴의 그 일그러진 모습보다도 더 추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그런 그들을 그냥 사랑하셨다. 그들의 그 추한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사랑해주신 하나님이셨다. 왜 하나님이 그리하셨을까?

 

하나님의 그 깊으신 마음을 다 알 길이 없겠으나 모세의 그 가르침 속에서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모세가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고 한 말씀에서이다. 하나님이 그 나그네 되었던 이스라엘, 좋아할만한 조건이 하나도 없는 그 이스라엘을 조건 없이 사랑하였듯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조건 없이 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의 외모를 보지 않으셨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사랑할 조건을 따지는가?

(신 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말라

(신 10: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 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신 10: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신 10: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이스라엘이 사사시대가 지날 때에 하나님께 자기들을 다스릴 왕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왕을 허락하셨다. 그들이 자기들의 소견대로 왕을 뽑았다. 그가 사울 왕이다. 성경은 이 사울 왕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삼상 9:2)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울의 외모에 대해 흡족해 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증거하는 성경의 또 다른 기록은 이러하다. 사무엘의 말로는 모든 백성들 중에 사울과 비교할만한 자가 없다고 했고 백성들이 흡족해서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그들은 사울왕의 그 외모를 보고 기뻐했던 것이다. 그 외모를 보니 우리의 왕이 될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삼상 10:23) 그들이 달려가서 거기서 데려오매 그가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나 더 크더라

(삼상 10:24)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은 달랐다. 그 백성 이스라엘이 스스로 택한 왕, 사울이었으나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이 불행해지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하나님은 버려두실 수 없으셨다. 사람을 외모로 보는 그 이스라엘이 선택한 왕이 이스라엘을 불행으로 몰고 가는 것을 하나님은 잠자코 바라보고 계실 수는 없었다.

 

그 모든 불행의 원인은 외모로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이스라엘의 그 잘못에 있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왕의 자리에서 사울을 제하셨다. 그리고 다윗으로 하여금 그 왕의 자리에 서게 하셨다. 이 결정하심을 통해 그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하심인 것을 알게 되기를 바라셨다. 또한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심을 다윗을 택하시는 그 일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다윗은 이새의 말째 아들이었다. 아비 이새가 볼 때에도 그는 왕이 될 만한 위인이 되지 못했다. 그 아비도 다윗을 외모로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다윗의 중심을 보셨다.

(삼상 16:10)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삼상 16:11)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믿음의 백성이라고 하는 우리도 그 이스라엘이나 이새와 같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평판과 그의 경력과 그의 언변 등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그런 화려한 외모를 보고 평가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지도자의 자리에 그를 세우려고 한다. 왜 목회자들이 꼭 외국의 신학박사학위를 얻으려고 할까? 이 땅의 큰 교회 목회자 중에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는 자가 몇 명이나 될까? 왜 그들이 그런 것에 목을 맬까? 그것은 이스라엘처럼 외모로 평가하는 그런 우리 때문일 것이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의 잘못된 태도를 바로잡아주시기 위해 참으로 많은 애를 쓰셨다. 모세를 통해 가르치셨고,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가르치셨으며, 다윗왕의 선택과 그 다윗의 삶 등을 통해 보이셨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은 여전히 그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했으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에서도 보이는 형식에 치중하는 그릇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였다. 하나님을 대하는 그 일에서 그들은 그 중심을 보기보다는 외모를 보는 그런 어리석은 신앙인들이 되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참된 구원의 복이 주어질까?

 

하나님은 그 어리석은 이스라엘을 그래도 사랑하시니 어찌 그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외식하는 신앙인의 자리에 버려두실 수 있으시랴!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그것에 대해 가르치시게 되었다. 성자 하나님의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그 일이다. 성자 하나님이신 그가 인간의 육체를 입고 우리에게 드러나셨을 때, 우리는 그를 ‘예수’라고 불렀다.

 

그는 참된 구원에 이르는 그 비결을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된 자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에 설 수 있게 하셨으니 진정한 ‘구세주’이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메시아’라고 부른다. ‘구세주’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하면 ‘메시아’이고, 헬라어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메시아’라고도 하고, ‘그리스도’라고도 한다. 예수는 이 땅에서 가르치실 때에 결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셨다.

(마 22: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눅 20:21)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만약 그가 외모를 보았다면 갈릴리 그 촌 동네에서 가난하고 병든 자에게 가르치시는 대신 세련된 예루살렘에서 귀족들이나 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결코 그리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배움이 없어 무식하고 가난한 어부 베드로를 위시한 여럿을 제자로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복음 사역이 이루어지도록 하셨다.

 

만일 내가 예수였다면 그런 자들을 제자로 삼았을까?

남들 보기에 그럴듯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에 결코 그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친구를 택할 때에 남들보다 가진 것이 많은 그런 잘난 자들을 택하려고 애를 쓴다. 그래야 내가 돋보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나를 질책하고 계신다.

(요 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행 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행 10: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언젠가 그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음 생활한 그것에 따라 보응하실 것이다. 그 때에 우리가 외모를 보고 취한 믿음 생활을 했는지의 여부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보아야 한다. 나는 외모를 보고 판단하고 행하는가?

 

남의 이목을 살피는 믿음의 생활도 외모를 취하는 것에 속한다. 난쟁이 남편을 택한 그 여인의 그 사랑, 그것은 결코 외모를 취하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 여인은 누가보아도 볼품없는 그를 남편으로 택했는데, 주님은 그 남편보다 더 볼품없는, 내면이 병든 우리를 신부로 택해주셨다. 이 사랑이 그 무엇과 비교될 수 있으리요!

(롬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롬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롬 2: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롬 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롬 2: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롬 2: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주님의 그 진실된 사랑을 깨달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약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 2: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이제 우리는 주님의 이 참된 사랑을 깨닫고 이 사랑을 나누어줄 수 있는 믿음의 백성이 되어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