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다윗, 블레셋의 골리앗
2020. 2. 16.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이스라엘의 다윗, 블레셋의 골리앗”
다윗과 골리앗을 성경에 기록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그리한 것인가?
그렇다면 성경은 단순한 역사책이 되고 말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백성을 대표한다.
반면에 골리앗은 사탄의 상징이다.
사탄은 본래 천사였으므로 천사와 같은 능력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천사의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예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계수하였을 때 이스라엘을 멸하시려 보낸 천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 때 그 천사는 이스라엘을 진멸하려 왔으니 그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과연 천사는 이처럼 한 민족을 진멸시켜버릴 만큼의 능력을 족히 지니고 있다. 사탄의 능력 또한 그와 같다.
(대상 21: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대상 21:2)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 내게 보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하니
(대상 21:3) 요압이 아뢰되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시나이까 하나
(대상 21:4) 왕의 명령이 요압을 재촉한지라 드디어 요압이 떠나 이스라엘 땅에 두루 다닌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대상 21:5) 요압이 백성의 수효를 다윗에게 보고하니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백십만 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사십칠만 명이라
(대상 21:6) 요압이 왕의 명령을 마땅치 않게 여겨 레위와 베냐민 사람은 계수하지 아니하였더라
(대상 21:7) 하나님이 이 일을 악하게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대상 21:8)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대상 21:9) 여호와께서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대상 21:14)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염병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죽은 자가 칠만 명이었더라
(대상 21:15)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천사를 보내셨더니 천사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그 때에 여호와의 천사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
(대상 21:16) 다윗이 눈을 들어 보매 여호와의 천사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하늘을 향하여 편지라 다윗이 장로들과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대상 21:17) 하나님께 아뢰되 명령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나이니이다 이 양 떼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하니라
과연 골리앗을 상대한 이스라엘 군대는 벌벌 떨고 바위 뒤에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사울왕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그저 발만 동동거리고 있었다. 이는 무늬만 믿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삼상 17:1)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삼상 17:2)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을 대하여 전열을 벌였으니
(삼상 17: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이 장면에서 소개되는 그 골리앗의 모습은 이스라엘군대의 오금을 저리게 할 만한 모습이었다. 키 크기는 바로 거인 그 모습이었고, 그가 무장한 상태는 보는 이의 심장을 멎게 할 만한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사탄은 이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쩌지 못할 그런 정도의 위력을 지닌 존재로 우리 앞에 다가 선다.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믿음의 시련 속에서 만나는 사탄도 그렇다. 도무지 나의 믿음을 지켜나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사탄은 나를 무섭게 위협한다. 내가 믿음을 포기해야만 이 어려움 속에서 탈출할 수 있게끔 그렇게 사탄은 나를 몰아간다. 그 두려움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삼상 17:4)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삼상 17:5)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삼상 17:6) 그의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삼상 17:7) 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 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가 앞서 행하더라
사탄은 무섭게 나를 몰아붙인다.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다그쳐 몰아붙이듯이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세게 나를 몰아붙인다. 이 사탄의 몰아붙임에 사울왕은 혼이 나간 것처럼 되고 말았다.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믿음이 없는 사울은 그 골리앗을 감당할 힘이 전혀 없었다. 누가 자신의 능력으로 사탄을 이길 수 있을까!
(삼상 17:8)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삼상 17:9)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삼상 17:10)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삼상 17: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이미 이 순간의 사울은 더 이상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자였고 하나님은 그런 사울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를 여전히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하나님을 등에 업고 자신의 세상적 지위를 누렸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같은 자들의 그 모습이었다. 어쩌면 이 시대의 위선적인 믿음의 지도자들의 그 전형적인 예인지도 모른다.
(삼상 16: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다윗은 온전한 믿음의 사람의 모습을 상징한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믿음으로 무장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골리앗을 상대하기 위해 그는 오직 믿음으로 무장하여 나아갔다. 이럴 때, 믿는 자와 사탄의 모습은 다윗과 골리앗처럼 드러난다.
외형적으로는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는 싸움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그렇다. 사람으로서는 그 사탄을 당해낼 재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그 사탄보다도 능력 있으신 실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의 힘이 되어주신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이라고 성경은 소개하고 있다. 이는 말째 아들이라고 했다. 가장 어린 아들, 이는 세상적으로 볼 때 아무런 능력이 없어 보이는 그 모습을 상징한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또한 여덟 번째 아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통상 성경에서 말하는 8이란 새로운 출발을 상징한다. 이새는 나이 많아 늙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그의 믿음의 세계는 막을 내리고 있었고, 새로운 믿음의 계보, 다윗의 믿음의 세계가 새롭게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새로운 믿음의 시작이 다윗이라는 이 조그만 말째를 통해 열리고 있음을 성경은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삼상 17:12)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가 많아 늙은 사람으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삼상 17:13) 그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갔으니 싸움에 나간 세 아들의 이름은 장자 엘리압이요 그 다음은 아비나답이요 셋째는 삼마며
(삼상 17:14) 다윗은 막내라 장성한 세 사람은 사울을 따랐고
(삼상 17:15)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칠 때에
골리앗이 사십일을 조석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믿음의 족속, 이스라엘을 연단하고, 시험하신 일이었다. 이스라엘이 그 옛날 광야에서 40년간 믿음의 연단을 거쳤고,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40일을 산에서 연단을 받았고, 노아 홍수 때 비가 40 주야로 내려 노아로 하여금 믿음의 연단을 받게 하셨다.
(출 16:35)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출 24: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창 7:4)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창 7:12)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이스라엘은 이 시간 동안 그들의 믿음을 바로 세웠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택하신 족속들을 위해 한 믿음의 사람을 예비하셨으니 그가 다윗이었다. 그를 통해 그들은 새로운 믿음의 세계, 다윗의 왕국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 다윗이 곧 오실 주님을 예표하는 자였다.
도무지 믿음에서 새로워지지 못하고 있는 이 땅의 선택된 족속들을 위해 주님이 다윗처럼 나타나셨다. 우리들을 새롭게 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지금 주님의 그 은혜를 입어 우리의 믿음에 새로움을 입었는가? 새로움을 입어야 하는 것은 주를 믿는 우리들의 의무이다. 그렇게 변화되지 못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한 악하고 게으른 청지기인 셈이다. 이를 주님이 기뻐하실까? 그런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이 주어질까?
(삼상 17:16) 그 블레셋 사람이 사십 일을 조석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었더라
늙은 이새가 어린 다윗을 통해 보낸 것들은 아무런 의미없이 그냥 생각없이 보낸 것이라면 성경에서 이렇게 자세히 숫자를 기록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나님과 오랜 세월을 보낸 그 믿음의 사람 이새가 황혼에서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한 상황을 보고 믿음의 의미를 담아 보낸 물건들이었다.
곡식을 볶았음은 “이미 이 족속 이스라엘이 그 많은 믿음의 연단을 받은 족속들이 아니든가!” 하고 깨닫게 한 것이다. 볶은 곡식을 보내되, 한 에바를 보냈다. 하나란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된 족속을 표현한다. 그 곡식 한 알 한 알이 따로 따로 흩어진 것이 아니라 한 에바로 주머니 속에 담겼으니 이스라엘 족속들이 한 믿음 안에서 뭉칠 것을 교훈한 물건인 셈이다.
이때의 이스라엘은 어떠한가? 사울왕은 자신의 욕심에 따라 하나님을 떠나있고 이스라엘 군대는 자신들만 살려고 하는 생각에 다 자기 길로 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 모습 속에 블레셋을 이겨낼 가능성이 보이는가? 교회가 하나 될 때 능히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음을 이 땅의 믿음의 지도자들은 이해하고 있는가?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이 장면을 현장에서 보듯이 이렇게 생생하게 기록을 남겨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교훈을 우리에게 주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배려하심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떡 열 덩어리를 그 아들들에게 보낸 것은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서서 사탄을 맞서라는 하나님을 대신한 늙은 이새의 명령이었다. 열이란 사람의 믿음에서의 완전을 의미하는 그 숫자이다. 치즈 열 덩이를 천부장에게 준 것도 이스라엘 군대의 천부장으로서 온전한 믿음으로 이 전투에 나아가라는 그런 의미였다. 이는 믿음의 군대, 하나님의 군대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굳이 믿음의 사람, 늙은 이새는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늙은 이새가 이같이 행한 것은 전쟁이란 사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을 깊이 교훈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의 영적 전투도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의 주시는 그 능력으로 한다는 사실을 우리도 한시라도 망각해서는 안된다.
(삼상 17:17) 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지금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영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삼상 17:18) 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삼상 17:19) 그 때에 사울과 그들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중이더라
믿음 있는 자와 믿음 없는 자의 보는 바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사울과 다윗을 통해 교훈하셨다. 믿음 없는 사람 사울에게는 골리앗이 크고 위압감이 넘치는 어찌해볼 수 없는 존재로 보였고, 다윗은 보이는 그대로 연약해 보이고 골리앗을 전혀 상대할 수 없는 그런 존재로 보였다. 우리가 믿음이 연약하여지면 모든 세상의 것들이 이렇게 다가와 보여 진다. 내게 다가온 모든 문제들이 거대한 골리앗처럼 보이게 되고, 도무지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다윗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아무리 두렵고 거대하여 넘어서기 어려워 보이는 그 골리앗도 믿음의 눈에는 단지 한 마리의 사자나 곰처럼 보였다. 다윗은 양을 지킬 때 그 사자와 곰을 일상처럼 만나고 그것들을 제압했던 경험을 가진 자였다. 그 짐승들의 입에서 양들을 지켜낼 때 늘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것을 경험한 다윗이었다.
이제 우리의 눈에도 나의 믿음에 도전하는 세상의 그 두려운 것들이 다윗의 눈에 곰과 사자처럼 보이듯이 그렇게 보여져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우리의 믿음으로 고백이 될 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다윗은 우리에게 힘 있게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믿음대로 골리앗은 그의 앞에서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 믿음의 사람이 사탄을 제압한 순간이다.
(삼상 17:31) 어떤 사람이 다윗이 한 말을 듣고 그것을 사울에게 전하였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부른지라
(삼상 17:32)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
(삼상 17: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삼상 17: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삼상 17: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삼상 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삼상 17: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삼상 17:42)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삼상 17:43)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삼상 17: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 17: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삼상 17: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과연 칠십 인의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나아갈 때 귀신이 쫓겨나며 사탄이 그들 앞에 항복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눅 10: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네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하신 주님의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바로 이 다윗과 골리앗과의 전투를 통해 미리 보여주심으로 증명해 보이신 하나님이시다. 이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의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라 하시는 주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 17: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마 17: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마 17: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마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마 17: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마 17: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마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다윗처럼 그리고 주님의 보내심을 입은 그 칠십 인과 같은 믿음의 주인공이 다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노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