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2020. 2. 9.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성경을 읽다보면 때때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만나기도 한다.
누가복음의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구절도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친구를 사귈 때 정당히 번 돈을 사용해서 친구를 사귀어야지 어떻게 훔친 돈, 또는 사기를 쳐서 만든 돈과 같이 깨끗하지 못하고 죄악된 그런 돈으로 친구에게 밥도 사주고 선물도 사주면서 그렇게 사귀라 할까?
세상적인 사교술 또는 처세술을 이야기 하는 책도 아니고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거룩한 성경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책에서 어떻게 이런 가르침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말인가? 특히나 이 말씀이 제자들이나 혹은 그 당시 랍비들이 한 이야기도 아니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신가!
주님은 이 말씀에서 그렇게 친구를 사귀면 그런 일을 행한 자가 그 친구 덕분에 영원한 처소로 불의한 재물을 사용한 것으로 인해서 영원한 처소로 영접되기까지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영원한 처소란 곧 천국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결국 천국에 가려면 불의한 재물을 만들어야 되고 그 재물을 친구들에게 써야 된다는 말이 아닌가? 어떻게 성경의 가르침이 이럴 수 있을까?
우리의 상식으로 예상하는 성경적 표현이라면 적어도 “정당하게 번 선한 돈으로 친구를 사귀라”해야 말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성경의 기록에는 불의한 재물이라고 했을까?
(눅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먼저 이 이야기의 장면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주변에 제자들이 있었고 그리고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다가와 오는데, 동시에 그 자리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염탐하기 위해 다가와 있었다.
(눅 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눅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그 때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를 가르치셨는데 그 중에 탕자의 비유도 들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당연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들었을 것이다. 이 비유에서 주님은 특별히 그 맏아들에 대한 이야기도 아주 자세히 말씀하셨다. 빗대어 말씀하신 이 맏아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던 것이다.
(눅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눅 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눅 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눅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눅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눅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주님이 그 땅의 소외된 자들, 이 순간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바로 그 탕자아들이었다. 주님은 자신에게 몰려든 그 세리들과 죄인들,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단순히 그저 밥을 먹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일종의 잔치였다. 하나님을 떠났던 그들이 주님께로 모여든 것은 아버지께로 돌아온 탕자들이었으니 주님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셨을까!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를 시기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은 이어서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셨다. 바로 청지기의 비유였다.
청지기는 분명히 주인이 아니다. 주인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청지기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위임받아 이 땅에서 그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그 일을 감당하여야 할 청지기가 바로 바리새인이요 서기관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일을 위해 참으로 열심히 봉사하며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위임받은 권세로 자신들의 유익을 구하는데 몰두 했다. 자신들의 이웃에게 봉사하는 그 일에 헌신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자신들과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 할 수 있는 사마리아 땅의 그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전혀 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외면했다. 그 땅을 지나 북쪽 갈릴리 땅으로 갈 일이 생겨도 오히려 먼 길을 돌아 지나다닐 정도로 그렇게 철저히 외면했다. 따지고 보면 사마리아인들이 그들과 전혀 상관없는 이방인은 아니었다.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정복당해 그들과의 사이에서 생겨난 혼혈 후손들이니 그들은 같은 조상을 가진 친척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혈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개나 소와 같은 정도로 철저히 무시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들도 탕자인 셈이니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말씀을 전했어야만 했다.
(눅 16: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눅 16: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주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그 청지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는 희망이 있는 지혜로운 자였다. 주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더 나아가서는 그 땅의 신앙적 지도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로 돌아오기를 바라셨는지도 모른다.
(눅 16: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눅 16: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그들은 여전히 그 땅에서 그들의 그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까? 주님과 함께 다스리며 왕노릇 할 자는 바로 탕자처럼 주님에게로 나아온 세리와 죄인 같은 바로 우리들이 아닌가?! 그 날에는 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하나님의 불의한 청지기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잃고 갈 곳 없이 방황하게 될 것이며 최후의 심판 자리에 설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의 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같은 자들은 또 누구인가?
주님은 이 순간 그들에게 기회를 허락하고 계신다. “이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롭게 행하는 것을 나의 이 예화를 통해 듣고 너희도 이같이 하여 그 심판 날을 대비하라”고. 지금 이 땅에서도 그 불의한 청지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입장에 선 자들은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눅 16: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눅 16: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눅 16: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우리 모두는 이 땅에서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에게 진 빚이다. 이 예화에서 나오는 그 빚진 자들은 모두 우리를 상징한다. 가장 큰 빚, 그것은 우리를 살리려고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에 대한 빚이다. 우리의 구원에 관한 그 큰 빚을 우리는 지고 살아간다.
(눅 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빛의 아들이란 곧 주님의 그 보혈의 은혜로 자신들의 죄에서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말한다. 베드로가 주님이 부활하시어 찾아오신 그 날 자신의 거물에 거두어 올린 그 153마리의 물고기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로 상징된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숫자로 표시하면 ‘153’에 해당한다.)
이제 주님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명하고 계신다. 이상의 상황을 이해하면 이 불의한 재물이란 바로 불의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취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받은 그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그 땅에서 종교지도자들로서 누리는 모든 권력과 경제적인 이득뿐만 아니라 구원을 위해 허락하신 그 말씀에 관계되는 것도 포함한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허락하신 그 율법도 불의한 재물에 해당된다. 그 율법이 불의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 율법이 그들의 손에 쥐어졌을 때, 그 율법은 불의한 재물에 해당한다. 불의한 청지기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주님은 불의한 재물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신 것이다. 주님이 의도하신 이 말씀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받아들이기 위해서 또 다른 성경에 기록된 표현을 살피면, 우선 현대인의 성경(KLB)에서는 이 ‘불의한 재물’을 ‘세상 재물’로 변역하고 있고, 영어 성경 Common English Bible에서는
“I tell you, use worldly wealth to make friends for yourselves, so that when it is gone, you will be welcomed into eternal homes.”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성경들을 참고해서 생각하면, 천국에서 우리가 받아 누릴 그 모든 것은 참으로 선하고 의로운 것들일 것이고, 반면에 그것과 상관없는 것들은 모두 이 세상에 관계되는 것이 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 땅에서 누렸던 물질적인 것들과 권세들은 모두 세상에서만 유효하다. 천국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모두 세상적인 것들이요, 그들의 손에서 이롭게도 사용되지 못하니 분명 불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에로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의 하나님의 말씀도 이 땅에서만 유효하다. 우리가 천국에 이르면 그 말씀들은 더 이상 아무런 효력도 의미도 없다. 그것은 오직 우리가 구원에로의 인도함을 받기 위해 필요했던 것들이다. 구원이 완성된 그 순간에는 그것들의 생명력은 다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도 세상에서의 것인데, 그 말씀들조차도 그들은 자신들의 것인 양 도무지 나누어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불의의 재물이란 “세속적인 부, 세상에서 얻어진 재물, 세상에 속한 것”으로 “천국의 보화”와 반대 개념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가 얻게 된 복음의 그것도 포함된다 할 것이다. 복음의 빚을 갚는 행위, 그것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이는 부자 청년에게 너의 재물을 팔아 이웃에게 나누어주라는 그 명령과 닮은 의미일 수 있다.
(마 19: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불의한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그 부자청년이 주님의 영생에 대한 처방을 들었을 때 근심하고 돌아간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했으므로 주님의 말씀을 비웃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저들은 분명히 귀머거리들이었다. 주님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음에도 도무지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으니 저들은 참으로 귀머거리들이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이 들리는가?
(눅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 16: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눅 16: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눅 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눅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눅 16: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본 절 전체의 의미가, 재물을 잘 사용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면 이 세상에 종말이 오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도 하나님이 그를 잊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의미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지극히 세상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해석이다. 성경책은 결코 윤리책은 아니다. 구원을 대 주제로 하는데 그것을 위해 윤리적인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런데 그 윤리적인 것이 성경의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너무나도 큰 오해이다.
불의의 재물이란 본래 내 것이 아닌 것을 의미한다. 불로소득이나 공짜로 얻은 재물들은 자신이 정당한 노동을 함이 없이 얻은 것이니 이는 진실된 재물이라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나, 비록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재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것일 수는 없다. 진실로 이 땅의 것 중에 내 것이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내 것이 아닌 것을 내가 가지고 있을 때는 옳은 재물이라 할 수 없다. 오직 참된 나의 소유는 하나님이 천국에서 허락하실 그 보화뿐이다. 이 진실한 재물이 아닌 것은 불의한 재물이라 할 수 있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 이 같이 값을 치루지 않고 얻어진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신 그 칭의를 얻음에는 나의 공로란 전혀 있지 않다. 내가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주께서 나를 의롭다고 하셨으나. 이 경우의 내 신앙이란 칭의를 얻는 공로가 아니라 단지 칭의를 얻는 기구로만 작용한다. 따라서 값없이 얻어진 이 복음의 은혜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바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그 일이다. 그들이 구원에 이름으로써 주께서 나를 칭찬하실 것이다. 그리고 예비하신 천국의 그 처소로 나를 인도하실 것이다. 그런고로 나의 복음을 전해 받은 그들이 영원한 처소로 나를 인도한 셈이 된다.
주님의 이 가르침을 올바르게 깨달아 구원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하노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