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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동장로교회 2020. 1. 12. 13:57

2020. 1. 12.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주님은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사랑에 대해 강조하셨다. 주님이 특히 이 사랑을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한다는 것이 남에게 선을 베푸는 점에서 윤리적으로 가장 고상하고 귀한 덕목이 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기독교를 선택할 이유가 있을까? 다른 종교에서도 능히 이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그런 가르침을 외면한 종교는 바른 종교라고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주님을 따라야만 되고 그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믿음이라는 말은 달리 신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서정에서 중요한 길목을 차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입고 그 부르심을 받는 소명은 우리의 희망이나 노력이나 그 무엇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다. 이 소명에는 우리의 참여하는 바는 전무하다.

 

마찬가지로 중생또한 그렇다. 우리가 거듭나고 싶다고 해서 거듭나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 이 일이 이루어질 뿐이다. ‘회심의 단계에서 비로소 우리의 신앙적 각성이 이루어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 내면에 믿음이라는 실체가 형성된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이 믿음이라고도 하고 신앙이라고 표현 할 수 있는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믿음 없이는 결코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 없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에 관하여 증거 하기를 그 믿음이 하나님의 주실 바 그 상의 근거라고 했다. 그 상이란 곧 우리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믿음 없이는 결코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러면 이 믿음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서 저자는 이에 대하여 명쾌한 답을 제공하고 있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우리가 안다라는 것이다. 이는 지식 있음을 가리킨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행하신 바, 그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등에 관해 바르게 알지 못한다면 결코 우리는 구원의 반열에 설 수 없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의 지적 활동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매일 말씀을 상고(詳考: 꼼꼼하게 따져서 참고하거나 검토함.)하며 묵상할 것이 신앙생활에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할 것이다. 이는 구원받을 백성들의 의무사항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삶 속에서 얼마나 말씀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한해는 부지런히 힘써서 말씀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흔히들 성경공부라는 말로 이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그렇게 표현하기를 매우 싫어한다. 성경말씀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 가야 한다. 학교 다닐 때 공부의 대부분은 암기였다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에 대해서는 암기할 일이 아니다. 역사를 외우듯이 말씀을 암기하는 일, 즉 성경구절을 줄줄 외우는 그 일이 성경공부가 아니다. 그 구절의 말씀을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온전한 믿음의 구성 요소는 지식찬동신뢰이다. 신앙에서의 지식찬동으로 나아가고 찬동신뢰로 옮아간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대해 깨달아 아는 것이 지식이요, 하나님의 우리의 구원하시려는 그 뜻에 대해 한 점 의혹 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찬동이다. 노아가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그대로 의심없이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찬동이요, 그 찬동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아간 것이 신뢰이며 이 신뢰에서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 그가 방주를 지은 행위였다. 따라서 그가 방주를 제작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였음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들을 온전히 구원하시려는 그 뜻을 그들이 온전히 신뢰하였다면 그들이 결코 모세를 원망하는 그런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보고 했을 때 그들이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그런 말과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3: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13: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13: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13: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14: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14: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14: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14: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믿음은 단지 신뢰만으로 온전하여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까지는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활동이다. 여기까지는 모두 생각의 영역에 한정되는 일이다. 생각만 한다고 구원이 완성되어지지는 않는다. 흔히 바울의 그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이 신뢰까지를 믿음으로 착각하는 일이다.

(살후 2: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따라서 온전한 믿음이란 반드시 신뢰를 바탕으로 한 행위의 드러남이 뒤따라야 한다. 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 믿음의 행위는 믿는 자들의 증거가 외적으로 드러난 행동이다. 노아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오랜 세월동안 방주를 지은 것이 바로 그의 믿음이 지식에서 출발하여 찬동의 과정을 거쳐 신뢰에까지 도달함으로써 드러난 신앙의 최종적 모습이었다. 참된 신앙은 참으로 항상 의식적 행동으로 드러난다.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면 그는 이 신뢰에 기초한 신앙의 의식적 행동을 무시하고 가르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지적한 이스라엘의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란 믿음의 참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이스라엘의 잘못된 믿음의 행위를 가리킨 것이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역사 공부하듯 그렇게 암기했을 뿐이지 그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었으니 믿음에서의 진실한 지식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고로 그들에게는 참된 믿음에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참된 찬동과 신뢰라는 것도 있을 수 없었다.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9: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야고보는 바로 이 신뢰까지 포함된 참되고 온전한 믿음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죽은 믿음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에게 있어서 행함까지 연결시켜주는 신뢰가 결여된 믿음이란 얼마나 위험한가를 분명히 깨달았기에 그 편지를 읽을 사랑하는 자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에 따라 이렇게 쓴 것이다.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23)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그는 이 찬동하는 정도로의 믿음만을 생각하는 잘못된 믿음의 개념을 지닌 자들을 지극히 염려하여 온전한 신앙으로서 신뢰에 바탕을 둔 이 행위를 결코 누락하지 말 것을 강조함으로써 올바른 구원에 이르게 하려한 것이다.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의 이 믿음에 대한 바른 가르침 중에 언급한 이 구절에 바로 주님이 사랑을 강조한 그 이유가 숨어 있다.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자에게 말로만 하고 행함이 없다는 것은 곧 그를 사랑하지 않음이요, 반대로 그런 자들에게 베풀 때 온전한 믿음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온전한 믿음이란 것은 온전한 사랑일 것이다. 따라서 온전한 사랑이란 곧 믿음의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믿음의 완성은 온전한 사랑을 이룰 때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이 온전한 사랑을 베푸는 것은 나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온전한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 나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공로가 된다는 사고를 지녀서는 안된다. 주님이 나를 구속하지 않았다면 내게 이 온전한 사랑을 드러낼 기회가 주어졌을까? 그런 기회를 주신 주님께 다만 감사할 뿐이요 그 사랑을 드러낸 내가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살리는 일이 되는 것이니 그런 기회와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그러하니 내가 사랑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에게 빚을 지는 행위가 된다. 내 공로가 아니라 나의 빚이란 것이다.

 

흔히들 생각하기로는 사랑은 베푸는 일이니 내가 일종의 손해를 감당하는 일이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믿음 있는 자의 믿음의 드러남이니 그 사랑이 드러남으로써 그의 믿음이 증거된다. 믿음 있음은 구원의 길에 서 있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결국 사랑하는 일은 자신을 위한 일인 것이다.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서 주님이 기뻐하실 위대한 사랑의 실천자들이 되는 은혜가 충만한 한 해가 될지어다, 아멘!